오늘은 금강경의 무득무설분 제7,
깨친 것도 없고 설한 것도 없다.
내용을 먼저 한번 쭉 읽어보겠습니다.
수보리야, 어의 운하오_수보리야 어떻게 생각하느냐
여래가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었다고 생각하느냐
여래가 설법한 바가 있다고 생각하느냐
수보리가 말씀을 올리되
내가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바 뜻을 아는 것으로서는
정해진 법이 아뇩다라삼먁삼보리라고 이름할 것이 있음이 없으며
또한 정해진 법이 여래께서 가히 설법했다고 할 것이 있음이 없습니다.
하이고_ 왜냐하면
여래께서 설법하신 바는 다 취할 수 없고, 말할 수 없고, 법도 아니고, 비법도 아닙니다.
소위자하오_ 이유는 무엇인가
일체 성현이 다 무위법으로서 차별이 있기 때문입니다.//
무슨 소리인지요? 뭔 소리입니까, 이게...
이게 금강, 금강설인데
금강이라고 하는 것은 불변이에요, 불변. 금강의 특징은, 변하지 않는 겁니다.
변하지 않는 것은 우리 중생의 본래 고향, 본래 고향이다.
우리가 떠돌이 생활을 하도 많이 해서
고향을 잊어버린 지가 아주 오래됐어요.
그래서 이런 얘기들으면
오랫동안 나그네 생활하던 나그네가 고향이야기 들을 때, 전혀 아는 것이 없는 거와 같아서
이게 그냥 무슨 소리인지 짐작이 전혀 안 갑니다.
그러면 처음부터 하나하나 설명을 해보겠습니다.
이 7번째는 의심을 하나 끊어주는 건데요
무슨 의심이냐하면
여리실견분 제5에서
부처님은 상으로서 볼 수가 없다_ 제상이 비상이다, 이랬거든요.
상으로서 볼 수가 없고,
모든 상이 상이 아님을 본다면 그것은 여래를 보는 것이다.
이렇게 설법을 했는데
부처님께서는 실지로 성불도 하시고 설법도 하셨으니까
그것은 상이 아닌 것으로 여래를 본다라고 하는 것과는 틀리지 않습니까.
이런 의문을 수보리가 일으킨 겁니다.
그래서 범소유상이 개시허망이라 모든 상은 허망한 것이다
제상이 비상임을 볼 때_ 모슨 상이 상이 아님을 볼 때 바로 여래를 본다 했는데
실제로 부처님은 성불도 하시고 설법도 하셨으니까
그것은 상을 다 여읜 것이 아닙니다.
이걸 의심을 했어요.
그래서 부처님이 성불했다라고 하는 의심,
설법했다라고 하는 의심을 끊어주는 법문이다, 이런 말씀이에요.
그래서 그것이 제목을 붙여서 무득무설분이라, 이렇게 이야기를 합니다.
수보리야, 어의운하요?_ 수보리야 어떻게 생각하느냐?
여래득 아뇩다라삼먁삼보리야,_ 여래가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었다고 생각하느냐?
여래유설법이야_ 여래가 설법한 바가 있다고 생각하느냐?
부처님에게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었다_ 이 말은 깨달음을 얻었다 이 말이고요
부처님이 부처님일 수 있는 것은
수하에 성도라, 보리수나무 아래서 도를 이루었기 때문에 부처님이에요.
우리가 부처님 하면 12월 8일 보리수나무 밑에서 성도하셨다, 이거 다 알잖아요.
수하성도를 못했으면 부처님이 아니거든요.
그리고 또 부처님일 수 있는 것은
녹야원에서 설법을 하셨기 때문에 부처님입니다.
이걸 녹원전법이라고 그러고,, 초전법륜이라고 그래요.
처음으로, 처음으로라는 말은 누구도 부처님과 같이 설법하신 분이 없어요.
이게 무슨 말이냐?
누구도 열반을 말씀하신 분이 없습니다.
생사에서 벗어나는 길을 이야기한 분은 없어요.
그래서 처음으로 생사없는 열반세계를 하셨다.
그래서 초전법륜이라고 그럽니다. 처음으로 법륜을 운전했다, 이래서...
그러니까 보리수나무 밑에서 성도하시고, 녹야원에서 설법하시고,
이것이 부처님의 아주 근본 가풍인데,
이 반야바라밀 법문에서는
부처님이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은 것이 없고
보리는 깨달음인데요, 깨달음을 얻은 것이 없고
부처님이 설법한 것이 없다.
이래서 금강경이 어렵다는 겁니단. 이래서.
부처님은 성도하시고 설법하신 것이 아주 가풍인데
어째 금강경에서는 없다고 그랬는가.
그 이유는
이 금강경은 근본 반야를 말씀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반야.
반야는 아주 중생의 고향입니다. 고향.
그래서 이 반야를 말씀하기 때문에, 부처님이 보리를 얻은 바가 없고, 부처님이 설법하신 바가 없다.
이 문제가 아주 중요해요.
이 문제가 풀리지 아니하면, 인생 문제는 안 풀려요.
이 문제는 뭐냐 그러면
첫째로 무상을 알아야 하거든요.
상이 상이 없는 걸 알아야 해요, 제상이 비상인 거,
왜 이 문제가 걸리느냐 하면
색이 공함을 모르기 때문에 걸리는 거예요.
색즉시공 그랬는데, 색이 공한 것이 색공이 무상인데요, 상이 상이 없는 건데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형체는 공이다)
금강경은 무상입니다. 무상, 없을 무, 서로 상. 무상이다, 이 말이오.
그게 색이 공이다, 이 말이죠.
그다음에 무주에요. 머묾이 없는 거예요.
색성향미촉법에 머문 이 없다. 또 색성향미촉법이 아닌 것에도 머묾이 없다.
현장역에는 색성향미촉법에도 머물지 않고 색성향미촉법이 아닌 것에도 머물지 않는다. 이렇게 말씀을 했어요.
그러니까 어디에도 머묾이 없는 게 무주입니다.
일체 상이 상이 아닌 걸 말씀하는 게 무상입니다.
그래서 금강경은 무상이요, 무주다.
이것이 반야바라밀입니다. 무상무주가.
그러니 이게 아무리 말을 해도 이게 도대체가 알 수가 없어요.
왜 그러냐하면,
우리가 생각으로, 무상을 한 번도 본 일이 없고, 무주를 한 번도 경험해본 일이 없어서 그렇습니다.
무상무주, 전부 우리가 상만 봤지 무상을 못 보고요,
늘 어딘가에 머물렀다 이거예요. 집착을 했다, 이 말이죠.
색성향미촉법, 모든 현상에 집착하지 아니하면
그 떠난 그 무엇에도 집착을 해 있었지, 머문 이 없었던 경험은 한순간도 해본 일이 없습니다.
그런데 그런 이야기를 하니까 당황할 수밖에 없는 거죠.
그럼 우리가 한번 생각을 해봅시다.
부처님이 보리수나무 밑에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으셨는데
그 아뇩다라삼먁삼보리가 뭘까?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건, 몸을 생각할 수 있거든요.
다 죽어가던 몸을 살렸나?
흔히 보면 몸을 살렸다. 생명을 건져준 은인이다 그러잖아요.
그럼 얻을 수 있는 가능성이 몸이다.
그러면 사람이다. 사람을 얻었나. 아니면 물질을 얻었나. 아니면 허공을 얻었나.
이 세상에서 얻을 수 있는 건,
몸 사람 물질 그것뿐이에요.
그런데 이 몸은 있거든요.
그 있는데 왜 이 몸으로 만족하지 못하느냐하면 언제 죽을지 모르는 몸이라, 이 몸이.
그래서 자기도 모르게 항상 불안한 거예요.
이 몸을 얻었거든요.
누가 얻었느냐? 어머니·아버지한테서 얻었어요.
그런데 불교에서만 이렇게 말하는 게 아니라, 우리나라 법률에서도 그렇게 생각하는 모양이더라고요.
얼마전에 인터넷 신문을 보니까
나라를 위해서 근무하다가 목숨을 잃은 그런 병사를 위해서 국가에서 보상을 하는데,
아버지 어머니가 서로 따로따로 살았는데
어머니가 어머니 자격으로 보상금 반을 타갔다고 그래요.
그런데 그 어머니는 2살 때인가 집을 나가서 양육은 안 했다는 겁니다. 출산만 했지.
그러니까 아버지가 이의를 제기했더라고요.
양육도 안 하고 어릴 때 나간 사람이 어째 보상금을 받느냐.
우리나라 법에 부모가 이혼 여부는 관계없이 그 자식에 대한 보상금은
반은 어머니가 가질 수 있는 권리가 있답니다.
반은 아버지가 가질 수 있는 권리가 있다고 그래요.
불교에서 이 몸은 반은 아버지한테서 왔고 반은 어머니한테서 왔다고 그랬는데
법에서도 그렇게 얘기하나 봐요.
키웠든 안 키웠든 법에서는 생모는 어쨌든 자식의 보상금의 반은 타갈 수 있다.
어머니 자격으로 타가는데,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다, 이런 얘기를 해요.
그러니까 이 몸은 반은 아버지한테서 얻고, 반은 어머니한테서 얻었어요.
그런데 문제는 언제 죽을지 모르니까 불안한 거예요.
사람도 그래요. 사람을 얻어서 내 사람으로 만든다 해도 언제 떠날지 모르니까 불안하고.
물질도 자기 걸로 만들어논다 하더라도 언제 날아갈지 모르니까 불안하고.
그런데 이 허공은요,
누가 주고 안 주고 할 수 있는 게 아니에요. 이건.
이래서 허공은 누가 주고 안 주고 할 수가 없습니다.
허공을 떠날래야 떠날 수도 없고, 또 버릴래야 버릴 수도 없고, 이게 허공이니까.
그럼 부처님이 얻을 수 있는 건 몸이나 사람이나 물질이나 이런 건데
그걸 얻었다고 도를 이뤘다고 하겠습니까?
그게 아니거든요.
부처님이 깨달았다는 게
자기 몸을 얻어서 깨달았느냐?
물질을 얻어서 깨달았느냐?
어떤 사람을 얻어서 깨달았느냐?
그거 아니에요.
그게 아니면 얻었어도 얻은 바가 없는 거죠.
사람을 얻은 것도 아니고, 물질을 얻은 것도 아니고, 자기 몸을 얻은 것도 아니고 그러면
이 세상에 다른 것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은 그것뿐이에요.
그런데 깨달음이라고 하는 것은 밖에서 얻는 게 아니거든요.
밖에서 얻는 게 아니면 잃었어도 잃은게 없을 뿐만 아니라, 얻었어도 얻은게 없는 거, 그게 깨달음입니다. 그게.
이 마음이 바뀐 거지 어디서 무엇을 얻어온 게 아니거든요.
그러니까 무소득이다, 이래요.
얻은 바가 없다.
그러면 잃은 바는 있느냐? 잃은 바가 없죠.
그럼 정말로 얻은 게 없느냐?
얻은 게 없이 얻은 거예요.
그게 깨달음이고요.
그러면 미혹한 건 뭐냐?
(잃은 것은 아무것도 없는데 다 잃은 것이다)
잃은 게 없이 잃은 겁니다.
잃은 거 아무것도 없는데 다 잃은 거죠.
예를 들면
자기 집에서 꿈을 꾸었다고 할 때,
그 꿈꾸는 순간에는 내가 누군지, 내가 어디에서 잠을 자는지, 내가 무슨 일을 했는지 아무것도 모릅니다.
그런데 그 잠들어있는 본인은 그냥 자기 집에 누워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꿈꾸는 사람은 잃은 건 하나도 없는데, 사실상으로 몽땅 다 잃었다 이거죠.
깨달은 사람은 얻은 건 하나도 없는데, 사실상 몽땅 다 얻었어요.
이런 것을 반야바라밀이라고 그러고
여기서는 아뇩다라삼먁삼보리라고 그럽니다.
또 부처님이 설법을 했다라고 그러는데
그러면 말이라고 하는 것은 어떤 주장이 있는데, 부처님이 뭘 주장했는가.
무엇이 있다고 주장했나, 없다고 주장했나.
인간은 행복하다고 주장했나 불행하다고 주장했나.
주장이 없으면 말이 아니에요.
그러면 말을 하되, 어떤 핵심 논리가 없으면 저 사람 무슨 소리하는지 모르겠다고 하거든요.
말하고자 하는 의도가 없으면 말이 아니죠.
그런데 부처님의 설법은 깨달음을 얻을 수 있도록 인도하는 말씀이지
이것이다라고 주장을 한다든지, 저것이다라고 주장을 하는 그런 내용은 아닙니다.
뒤에 뭐라고 그랬죠?
여래소설법은 불가취 불가설_ 취할 수 없고 말할 수 없고,
비법 비비법_ 법도 아니고 비법도 아니다.
법이라고 주장한 것도 아니고요, 비법이라고 주장한 것도 아니다.
그래서 말한 바가 없다. 얻은 바가 없다 이거에요.
이걸 우리가 왜 모르는가?
상이 무상인 줄을 몰라서, 제상이 비상인 줄을 몰라서, 그래서 몰라요.
그리고 무주가 머묾이 없는 것이 우리 고향심인데,
우리는 항상 머물러만 있어요.
몸에 머물든지, 사람에 머물든지, 물질에 머물든지
그걸 보통 육진(빛, 소리, 냄새, 맛, 감촉, 의식작용)에 머문다 이렇게 얘기해요.
색성햐미촉법, 보고 듣고 맛보고 생각되는 곳에만 돌아다녀요.
거기에 머물지 아니하면 그게 바로 무소주심이다. 머무는바 없는 마음이다. 이 말이죠.
색성향미촉법에 머물지 아니하면 바로 우리 고향에 머물게 돼요.
약심유주면 즉위비주라_ 마음에 머묾이 없으면 그것은 곧 머무는 것이 아니다.
색성향미촉법에 보이고 들리는데 머물면
우리 본래 고향마음에는 머물지 못한다, 이거죠.
자기 집이 있는데 거기에 머물지 않고 온갖 다른 곳만 헤매고 다니면 자기 집에 못 머물지 않습니까.
우리 마음이 보고 듣고 맛보는데만 머물러 있으니까
그 본래 마음에는 머물지 못한다, 이거죠.
'스님법문 > 종범스님_법문' 카테고리의 다른 글
종범스님_ 생사법과 열반법 [큰 스님께 듣는 깨달음의 길] (0) | 2021.07.19 |
---|---|
종범스님_ 형상이 있는 복은 복이 아니다 [큰 스님께 듣는 깨달음의 길40] (0) | 2021.07.12 |
종범스님_ 모든 법이 진실하다 [큰 스님께 듣는 깨달음의 길] (0) | 2021.06.28 |
종범스님_ 복(福)은 화살과 같다 [큰 스님께 듣는 깨달음의 길] (0) | 2021.06.21 |
종범스님_ 어떻게 하면 진실한 뜻을 말할까? [큰 스님께 듣는 깨달음의 길] (0) | 2021.06.1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