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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범스님_ 형상이 있는 복은 복이 아니다 [큰 스님께 듣는 깨달음의 길40]

Buddhastudy 2021. 7. 12. 19:16

 

수보리야, 어의운하오_ 수보리야, 네 생각은 어떠하냐?

약유인이_ 만약 어떤 사람이

만삼천대천세계칠보로_ 삼천대천세계의 가득찬 칠보로

이용보시하면_ 보시를 한다면

시인이_ 이 사람이

이시인연으로_ 이 인연으로

득복이 다부아_ 복을 얻은 것이 많겠느냐?

여시니이다 세존하_ 그렇습니다, 세존이시여

차인은_ 이 사람은

이시인연으로_ 이 인연으로

득복이 심다니이다_ 복을 얻는 것이 심히 많습니다.

수보리야 약복덕이 유실하면_ 수보리야, 만약 복덕이 실이 있으면

여래불설득복덕다니라_ 여리가 복덕을 얻음이 많다고 말하지 아니하느니라

이복덕이 무고로_ 이 복덕이 없는 것이므로써

여래설득복덕다니라_ 여래가 복덕을 얻음이 많다고 하느니라.

 

법계통화분 제 19, 이제 전부입니다.

전부인데, 내용은 어떤 거냐 하면 이런 겁니다.

삼천세계에 가득찬 세상에서 제일 좋은 칠보로 보시를 하면

그 칠보로 보시한 그 인연으로

복덕을 많이 얻겠느냐?

이렇게 수보리에게 묻습니다, 부처님이.

 

그러니까 수보리가 대답하기를

그렇습니다, 부처님이시여.

이 사람은 이 인연으로 삼천세계에 가득찬 칠보를 보시한 그 일로

인연이라는 건 일이거든요. .

인연이 뭐냐? 일입니다, .

그 일로 복을 얻음이 심히 많습니다.

 

그러니까 부처님이 거기서 중요한 설명을 하시는데

오늘 법문의 핵심이

심다니이다 하니까 거기서 부처님의 얘기입니다.

수보리야, 그 두 마디 말씀이 오늘 법계통화분 핵심입니다.

수보리야, 만약 약복덕이 유실하면_ 실이 있으면

여래설 불설득복덕다니라_ 실이 있으면 여래가 복덕을 얻음이 많다고 하지 아니하나니라.

그럼 어째서 복덕이 많으냐?

이 복덕이 무고로, 복덕이 없음을 쓰는 고로, 복덕이 없는 까닭으로,

여래가 복덕을 얻음이 많다고 하였나니라.

 

이것이 복덕이 실히 있다고 하는 말하고

복덕이 없다고 하는 말하고 두 가지인데

복덕이 실히 있다라고 하면, 복덕이 많다고 안 하고요.

복덕이 없는 까닭으로 복덕이 많다, 이 말인데요

이것을 어떻게 해석을 하느냐?

 

금강경에는 무착보살이 지은 논이 있고, 천친보살이 지은 논이 있는데

그 두 논에서 그렇게 설명을 해요.

유실이라는 건 뭔가?

복덕이 자성이 있다고 실이라는 건 자성이라는 소리예요.

자성이 있다고, 변하지 않는 것이 있다고, 오래오래 가는 것이라고 생각을 해서

그 복덕상에 집착을 하면, 이걸 취상이라고 그럽니다. 상을 취한다.

복덕이 자성이 있다고 생각해서 그 복덕의 보이는 모습에 집착을 하면

그것은 허망한 것이 되어서 복덕이 많다고 말하지 않는다.

 

그러면 복덕이 무고로, 이건 뭐냐?

복덕이 자성이 없다, 변하지 않는 영원한 것이 없다라고 생각을 해서

그 복덕에 집착을 하지 않아요.

그럼 집착을 하지 아니하면 어떻게 되는가?

복덕을 지혜를 닦는 쪽으로 돌려요. 그게 회향입니다.

지혜를 닦는 쪽으로 돌리면, 그것이 복덕을 얻음이 많다고 말하나니라.

 

그래서 복덕이 무다, 복무라고 하는 것은

어상에 이상이라, 형상을 보되 지혜심을 일으켜서 형상에서 떠나요.

그걸 떠날 이, 형상이라는 상, 이상이라고 그래요. 이상.

그 이상이 지혜를 말하는 겁니다.

 

복덕이 진실한 것이고, 변하지 않는 것이라고 집착을 해서

그걸 그대로 내가 취하면, 그걸 취상이라고 그래요. 취할 취, 범소유상이라는 상,

취상을 하면, 아무리 많은 복덕이라도 그건 복덕이 아니에요.

왜냐? 허망해서 금방 없어져 버려요.

 

그런데 이상을 하면 복덕은 복덕인데, 거기에 상을 취하지 아니하고 지혜를 닦는 쪽으로 돌린다,

그러면 지혜는 끝이 없어서, 지혜를 닦는 쪽으로 돌리는 복덕은 불가설

영원무궁한 것이다.

 

그래서 형상을 취하는 복을 유루복이라고 그래요. 없어지는 복이라고.

지혜를 닦는 복을 무루복이라고 그래요.

지혜를 어떻게 닦느냐?

복을 내가 다 받지 않고, 그걸 지혜를 닦는 쪽으로 회향을 하는 거예요.

이걸 공양함으로 말미암아, 이걸 보시함으로 말미암아

보살지 여래지 상상지를 얻도록 원하옵니다.

 

그러면 그건 복덕이 없는 거예요.

그게 복덕이 무고로, 그 뜻입니다.

 

복덕상에 집착을 하지 아니하고, 복덕을 지혜를 얻도록 돌리면

그 복덕이 한없이 많은 복덕이 되고

많은 복덕이라도 그 복덕상에 집착을 해서 그것을 내가 취하려고 하면, 취상을 하면

그 복덕은 유루복이 되어서, 없어지는 복이 되어서 금방 사라진다,

이 뜻이에요.

 

그래서 금강경에서는 상이 허망한 줄 알고, 이거거든요.

상은 뭐냐?

우리 몸도 형상이고, 저 하늘도 형상이고, 땅도 형상이고, 일체 색성향미촉법이 전부 형상인데요

이것이 상이 없어요. 영원히 남아 있는 본질이 없어요.

그래서 이걸 본성이 없다고 그래요.

 

형상이 본성이 없는 줄을 턱~ 보고, 거기에 머물지 않는 것을 반야바라밀이다, 이렇게 얘기를 합니다.

형상이 본성이 없는 것이 뭐와 같으냐?

몽환포영, 꿈과 같고, 환은 꼭두각시인데,

꼭두각시가 춤도 추고 재주도 부리고 하는데, 그게 자체적으로 하는 게 아니라, 뒤에서 줄 당기는 사람이 있거든요.

그 줄 당기는 사람 딱 없어지면 꼭두각시는 끝나는 거예요.

그게 환입니다.

꿈도 꿀 때는 아주 분명한데, 꿈 탁 깨면 없어요. 몽환이라고 그럽니다.

자성이 없는 것이 몽환이다.

무자성 여몽환_ 자성이 없는 것은 몽환과 같다.

일체유루복이다, 그런 것에요.

 

포영이라는 건 뭐냐? 물거품이 일어날 때는 부글부글하고 보이는데 사라져버려요.

그림자가 햇빛 날 때는 환희 보이는데, 햇빛 없으면 없어져 버려요.

그래서 자성이 없는 형상이라는 것은 몽환과 같고, 물거품과 같고, 그림자와 같다. 이거죠.

 

그러면 형상에 집착하는 그 복도 그와 같다, 이거예요.

그래서 형상에 집착하는 취상복은 복이 아니고,

그걸 지혜로 닦는 쪽으로 돌리는 회향하는 복은 그건 반야바라밀 지혜복이기 때문에

그것이 복덕이 많다고 말하나니라, 이렇게 돼요.

 

그래서 유실_ 실이 있다고 한다면, 여래는 복덕을 얻음이 많다고 말하지 아니하나니라, 이렇게 돼요.

형상에 집착하는 복은 복이 많은 게 아니에요. 없어져요, 몽환포영과 같아서.

그런데 복덕이 무고로_ 복덕이 없는 것이라고 해서 자성이 없는 것이라고 해서

반야지혜를 닦는 쪽으로 돌리면 그것이 큰 복덕이 되나니라,

이게 반야바라밀에서 말씀하는 법문입니다.

반야바라밀 법문이에요.

 

그러면 아무리 내가 좋은 음식을 먹어도,

먹은 음식이 속에 그대로 있으면요 도움이 안 돼요, 몸에,

다시 토하든지 어떻게 되어 버려요.

그런데 소화가 되면, 그 음식이 음식이 아니고 몸이 되어 버려요.

 

그래서 자성이 없이 허망한 복인데

이것이 그냥 허망한 복을 지어서 허망한 복 받으면

음식 먹었다고 그대로 토하는 거와 같고

이것을 반야바라밀 대복으로 쓱~ 회향을 하면

이 몸이 그 음식을 먹어서 소화를 시켜버리거든요.

소화를 떡 시키면 그 밥이 밥이 아니고 몸이 되고요

밥이 몸 되어 버리는 거예요.

 

그래서 물질이 지혜가 되었을 때 그것이 큰 복이지

물질 지어서 물질을 받고, 그거는 밥먹고 그냥 토하는 거와 마찬가지라 도움이 안 된다, 이거거든요.

 

그런데 퇴비나 이런 거를 여러 가지 거름, 인분이나 퇴비나 이런 거를

그냥 놔두면 그게 별 도움이 안 되거든요.

그런데 이걸 사과나무 심는데다 주면, 사과나무가 그걸 다 영양분으로 섭취를 해서 사과가 되어버려요.

그렇게 돌리는 거예요.

배나무 심는데다 주면 배나무가 섭취를 해서 배가 되어버린다는 거죠.

 

그래서 이 몸이 허망한 건데, 이걸 공양하는 데 잘 쓰면

이 몸이 그대로 공양의 도구가 되어서 그게 아뇩다라삼먁삼보리, 대지혜를 얻는게 되는 거거든요.

그와 마찬가지로 금강경에서는 형상 있는 복을 지어서

형상 있는 것으로 집착해서 소모해버리는 것은 복이 아니다.

이걸 형상없는 지혜를 이루는 데로 돌리면 그게 큰 복이다.

이걸 말하고 있습니다.

뒤에도 또 나와요. 이런 말씀이 계속해서 나옵니다.

 

그래서 금강경에 반야바라밀이라는 것은

이상행시 시진수행이니라, 이렇게 조선시대초에 이 금강경을 해석한 내용이 있는데

이상행시를 해요, 형상에 집착하지 않고 형상을 여여해버려요.

이것은 물질인데, 물질은 자성이 없다, 없어진다.

그래서 자성 없는 물질에 내가 집착을 안하고, 이걸 통해서 지혜를 닦는 쪽으로 돌리는 게

그게 보시이고, 그게 회향입니다.

 

그래서 이걸 그대로 쓰면, 그냥 없어지는데

이걸 보시를 딱~ 하면, 그 공덕이 지혜를 키우는 거예요.

그걸 장양이라고 그럽니다. 지혜를, 장양.

그래서 회향은 장양이라.

회향은 키우는 거예요, 뭘 키우느냐? 지혜를 키우는 거예요.

 

공양을 올리면 그것을 가지고 지혜를 장양시켜요, 키워요.

그래서 그것을 이상행시라, 상을 여의고 보시를 시행하면 이게 이상행시입니다.

시진수행이니라, 이것이 참된 수행이니라,

이렇게 함허스님이 법문을 하셨어요.

 

그 상에 집착하지 말고

, 이게 값이 많이 나가는데, 이게 돈이 얼만인데,

이건 상에 집착하는 거거든요.

이걸 지혜 닦는 쪽으로 돌리면 지혜는 값이 없어요.

지혜가 그게 값이 얼마겠냐? 시장에 내놔도 값을 매길 수 없어요.

값 잘 매기는 중개업자도 거기는 속수무책이에요.

지혜 값은 누구도 매길 수가 없다.

그래서 무가보라고 그런다, 값으로 계산할 수 없는 보배다. 이거죠.

 

그냥 물질로 소모하면 몇 푼 안 되는데, 이걸 지혜로 돌리면 무가보가 되는 거예요.

값없는 보배가 된다, 이거거든요. 그런 거죠.

그래서 이상행시가, 상을 여의고 보시를 실행하는 것이

시진수행이니라, 이것이 참다운 수행이니라, 이렇게 얘기를 하고요,

 

또 그런 말씀이 있는데

단지 작복하고, 오직 복 지을 줄만 알고, 복만 짓는다, 이거죠.

불해성공하면, 복이 자성이 공함을 알지 못해요.

그 복이 뭐냐? 얼굴 잘난 것도 복이에요. 또 몸매 좋은 것도 복이고요,

얼짱되는 게 복이 많은 사람이 얼짱되지, 몸짱도 그렇죠.

또 부자 되고 건강하고 또 유명하고, 또 뭐 자기가 많은 걸 결정할 수 있고, 권리를 가지고

이게 전부 복입니다.

그런데 이게 자성이 없기 때문에 언제 날라갈지 몰라요.

이게 꼭두각시와 같아서, 꼭두각시 뒤에서 줄당기는 사람 없으면 언제 서버릴지 모르는 거구요,

꿈과 같아서 꿈 깨면 끝나는 거거든요.

그래서 단지작복하고, 오직 복 지을 줄 만 알고, 다만 단, 다만은 오직입니다.

불에 성공하면 자성이 공함을 모르면 어떻게 되냐?

과초 .. 내생에 결과를 받는데 뭘 받느냐 하면 코끼리가 되는데요,

복을 많이 지었기 때문에 코끼리 몸에 칠보를 주렁주렁 걸어놓고 사는 그런 코끼리가 돼요.

이걸 상신에 칠보진이라, 칠보에 보배가 있다.

코끼리 몸인데, 칠보의 보배가 따라다녀요.

복만 짓고 성공을 몰라서 그런 거예요.

 

그리고 단관성공하고 불해작복하면, 오직 성공만 딱 보고 자성이 공한 것만 항상 보는 겁니다.

일체가 다 자성이 없다. 근본이 없다. 오래가는 게 없다, 허망하다 이래서 안 짓는 거예요.

몸도 허망하고, 물질도 허망하고, 잘난 것도 허망하고, 일체가 허망한 거다 이래서

성이 공한 것만 딱~ 보고 복짓는 것을 알지 못한다, 이 말이죠.

 

그러면 과초...이라, 과보를 어떤 과보를 받느냐하면

내세에 나한이 되는데, 아라한이 되는데, 성공만 딱 관찰했기 때문에

코끼리가 안되고 아라한이 되요.

코끼리는 아무리 칠보를 몸에 두르고 다녀도 자성이 공함을 볼 수는 없거든요.

아라한이 되는데, 오직 성공, 자성이 공한 것만 봤기 때문에

공양을 거의 못 받아요, 거의 굶다시피해요, 응공이 박하다는 거예요.

공양에 응하는 것이 아주 박해요.

 

그래서 공성만 관공만 하느냐. 작복만 하느냐.

수행에는 작복수행이 있고 관공수행이 있는데

일체 만법이 자성이 공한 것이다. 이렇게 관찰하는 게 관공수행이에요.

그리고 몸에 좋은 거, 물질에 좋은 거, 사람에게 좋은 거, 여러 가지 복만 보면 닦는게 이게 작복수행이에요.

그런데 작복만 작복만, 복만복만 지으면, 코끼리가 되는데, 복이 하도 많아서 칠보를 몸에 두르고 사는 그런 코끼리가 되요.

 

자성이 공한 것만 공한 것만 보면 아라한이 되는데

그 공양을 거의 받을 수 없는 가난하디 가난한 아라한이 된다.

그런데 이 두 가지 중에서 선택을 하라면 그래도 아라한이 나아요. ㅎㅎ

아라한은 생사가 없는 걸 알거든요.

배가 고파도 생사 없는 걸 아는 아라한이 낫지

칠보를 몸에 두르고 살아도 아무것도 모르는 코끼리보다는 낫잖아요.

그런 거예요.

 

그런데 보살은 그렇게 하지 않아요.

보살은 복을 많이 지어요,

짓는데 그 복에 집착을 하지 않고 회향을 해요.

그래서 지혜를 닦는 쪽으로 회향을 해요.

복도 짓고, 지혜도 닦아서 복혜를 다 갖추는 것이 보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