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대자대비한 보살심으로 충만하다.
지방 어느 사찰의 스님 한 분이
남몰래 자신의 신장을 떼어 보시한 일이 있었다.
나중에 이 사실이 몇몇 스님에게 알려졌다.
그러자 스님들이 이구동성으로
보시한 스님이야말로 진정한 각자이며 보살이라고 추앙하였다.
대자대비한 마음을 깨달음으로 연결한 것이다.
세존의 전생담에 보면
눈을 떼어 보시하고, 굶주린 사자에게 몸을 보시하는 이야기가 나오는데
같은 맥락이다.
대승불교의 보시바라밀을 보면
하급으로 자신의 전 재산을 보시하고
중급으로 자신의 몸의 일부를 떼어 보시하고
상급으로 자신의 생명을 거리낌 없이 보시한다.
이쯤 되어야 보살이며 깨달음을 얻게 된다는 얘기이다.
그런데 과연 중생을 위해 목숨을 초개처럼 버릴 마음이 있으면
저절로 깨닫게 될까?
보시행이 거룩하고 존주하고 찬양할 만한 것은 맞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깨달음으로 직결되는 건 아니다.
대자대비한 성인이 되고 청렴결백한 군자가 되는 길은
기독교나 유교에도 있다.
종교인이 아니어도 효녀 심청이 같은 범인들도 적잖게 있다.
그럼에도 불교에서는 인격의 수양 정도를 가지고
깨달음의 척도로 삼고 있다.
가령 수다함은 어리석음이 줄어들고
사다함은 탐욕과 분노가 큰 폭으로 낮아지고
아나함은 탐욕이 거의 잦아들면서 분노가 뿌리째 뽑히고
아라한은 탐욕이 완전히 사라지고 일체의 번뇌망상이 소멸된 상태라고 한다.
그래서 누군가 깨달았다고 하면
탐진치를 가지고 번뇌의 상태를 따지곤 한다.
탐진치가 조금이라도 있으면 아라한에도 미치지 못한 것이 된다.
더군다나 대자대비한 보살의 마음엔 턱도 없이 부족하니
깨달음은 물 건너가게 된다.
어느 스님이 깨달음을 얻었다는 생각이 들자
곧바로 스승을 찾아가서 이를 알렸다.
그러자 스승은
“아직은 깨달은 게 아니니 좀 더 공부하여라” 하였다.
제자는 일정 기간을 수행하고 다시 스승을 찾아 조심스럽게 말했다.
“스승님, 이번엔 확실히 깨달았습니다”
그러자 스승이 답하기를
“아니다, 조금 더 정진해야 한다”하였다.
제자는 다시금 수행에 몰두했고 몇 해 뒤 스승을 찾았다.
그리고 기쁨에 가득한 표정으로
“스승님, 이번이야말로 틀림없습니다.
누가 뭐래도 이번만은 분명히 깨달았습니다” 하였다.
그러자 스승이 고개를 가로저으며
“아니다, 아직 멀었다.
더욱 정진한 뒤에 다시 오거라” 하였다.
이쯤 되자 제자는 스승이 막무가내로
자신의 깨달음을 폄하하는 것으로 생각되었다.
화가 치민 제자는 목소리를 높였다.
“이번엔 진짜라니까요, 진짜라고요!”
그러자 스승이 말했다.
“그것 보아라, 그렇게 화를 내는 걸 보니 깨달은 게 아니잖느냐”
이상의 일화처럼 깨달음과 인성을 결부시키려는 시도는 흔하다.
제1원인에 대한 부재에다가
팔정도와 계율, 그리고 깨달음에 대한 탐진치의 잣대 같은 것 때문에
불교를 한낱 도덕철학으로 폄하하는 학자들이 생기는 것이다.
물론 인성이 수행의 근간이라는 사실을 부정할 사람은 거의 없다.
다만 불교의 무상정등각을 형이하로 재단하는 우를 경계하는 것이다.
아무튼 깨달음이 뭔지 모르다 보니
자꾸 위의 일화처럼 인성 쪽으로 파고들게 된다.
화엄경에서 52위로 깨닫는 단계를 나누고
입지보살을 내세운 것도 같은 맥락이다.
심지어 대지도론에 나오는 붓다의 32상에 대한 주장은
가히 왜곡의 절정에 이르고 있다.
이 모든 것들의 뿌리는 단연코 싯다르타의 성불 과정에 있다.
익히 알듯이 싯다르타가 대각을 이루기 직전 마왕 파순이 나타나
권욕, 물욕, 색욕을 가지고 탐진치를 부추기는 장면이 나온다.
하지만 싯다르타는 이것을 능히 극복하고
곧바로 깨닫게 된다.
이런 내용 대문에
더욱 신성을 깨달음에 접목시키려는 풍토가 조성되었다.
하지만 인성을 이런 식으로 따지고
의식을 갈라 수준별로 나누다 보면 오히려 깨달음에서 멀어지는 법이다.
깨달음은 상태보다 전지全知에 있는 까닭이다.
깨닫게 되면 탐진치를 비롯해
그에 반대되는 진선미 같은 온갖 덕목들이 성립하지 않는다.
모든 것이 공이 되기에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다.
필요에 따라 가져다 쓰기도 하고
혹은 범부처럼 필요치 않은 데도 불쑥 튀어나오기도 한다.
세존을 보라.
세존은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이 없다고 하셨고
역으로 그것들이 모두 있다고도 하셨다.
이 말은 깨달아 해탈함으로써
우리가 그렇게 따졌던 인성과 덕목들이 죄다 성립하지 않게 됐다는 의미이다.
거꾸로 따져보자.
어떤 수행자가 깨달은 뒤에 탐진치가 완전히 사라졌다.
일체의 욕망이 꺼져 공, 그 자체가 되었다.
이 모습이 과연 이상적인 존재의 모습일까?
길거리에 뒹구는 돌멩이나 혹은 인공지능 로봇에 딱 어울리는 모습이 아니랴.
원효나 경허의 기행과 임제나 덕산의 할방(고함과 몽둥이)은
그냥 그분들이 이생기심하는 모습일 뿐이다.
그런 것들로 깨달음을 평할 수 없다.
노자의 말을 빌리면
세상에서 말하는 선은 선이 아니게 된다.
선은 다다익선이다.
그런데 선을 지나치게 강조하면 불선이 동시에 생겨나
괴상망측한 것이 된다는 얘기이다.
누군가 선을 주야장천 외치는 사람이 있다면
노자의 관점에선
그 사람이 가장 선하지 못한 사람일 가능성이 높다.
양의 탈을 뒤집어쓴 늑대라고나 할까.
가령 기독교만 보아도
적당히 주님을 찾는 분들이 신앙생활을 순탄하게 잘한다.
하지만 밤낮없이 ‘주여, 주여~’를 외치는 이들은
맹신으로 얼룩지게 된다.
사회적 봉사 단체가 아닌 이상
선이나 양심 같은 것을 대놓고 내세우는 순간
그건 어떤 목적을 위한 도구로 전락하기 쉽다.
진짜 선이나 양심은
도가에서 말하는 ‘갓 베어낸 통나무’처럼 투박하고 담백한 법이다.
아무튼 깨닫지를 못했으니
깨달음의 여부를 알 수 없고
그러니 자신이 속한 차원의 이런저런 굴레들을 척도로 삼아
깨달음을 재단하게 된다.
깨달음은 깨달음으로만 판단해야 한다.
이런 이유로 옛 조사들은 이타를 지나치게 강조하는 보살행에 대해
‘육도만행을 닦아 성불하려는 것은
마치 송장을 타고 바다를 건너가는 것과 같다’라고 경고하고 있다.
꽤 극단적인 포현이자만 그렇다고 크게 잘못된 주장도 아니다.
요컨대 인격을 닦고 보살행을 실천하는 건
깨달음으로 나아가는 여러 갈래의 길 가운데 하나이다.
길과 목적지가 궁극엔 연결되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항상 같은 것은 아니다.
이런 걸 보면 불교는
너무나 차갑도록 이성적이고
논리적인 가르침임을 짐작게 한다.
그래서 과학과 궁합이 잘 맞지 않던가.
3. 신심으로 생사를 초월하다.
이슬람교의 신비주의를 수피라 하는데
그들의 수행법을 보면 종교인치고 놀랄 만하다.
서기 922년 할라지라 불리는 한 페르시아인 수피가 그런 사례이다.
그가 주장하는 수행법은 단순하면서도 강력했다.
할라지는 기존처럼 신을 믿으면서 뭔가를 바라는 마음을 갖는 것을 부정했다.
대가를 바라고 신을 믿어서는 구원받지 못한다는 얘기이다.
그럼 어떻게 신을 믿어야 하는가?
할라지는 자신을 구성하는 모든 것
재물을 비롯한 외부적 요인은 물론이고
내면의 의식까지 몽땅 신에게 바치라고 하였다.
상념 하나하나까지 모조리 신에게 바치다 보면
자신은 텅 비어 없게 된다.
무아가 되는데
이렇게 되면 비어 있는 자리에 신(성령)이 깃들게 된다고 한다.
부지불식중 자신이 신과 같아진다는 얘기이다.
할라지는 자신의 이론대로 수행했고
그는 정말로 자신이 신이 되었다고 믿었다.
그는 바그다드 곳곳을 다니며
“내가 곧 진리요, 신이다”라고 외쳤다.
그리고 마주치는 사람에게
“신에게 모든 걸 바침으로써 자신처럼 신이 될 수 있다”는 말도 빠트리지 않았다.
신과 인간을 주종관계로 놓고 있는 수니파와 시아파는
할라지의 이런 혁신을 참을 수 없었다.
집단으로 칼리프에게 항의를 하고 그를 처형시킬 것을 끈질기게 종용했다.
소동이 일 것을 우려한 칼리프는 할라지를 감옥에 넣었다.
하지만 할라지는 감옥 속에서도 같은 주장을 되풀이 했다.
그래서 결국 그럴 십자가에 매달아 처형시키기로 했다.
이 같은 사실이 할라지에게 알려지자
그는 무슨 이유에서인지 배꼽을 움켜쥐고 미친 듯이 웃어댔다.
처형되기 직전까지 그의 웃음은 멈추지 않았다.
참다못한 간수들이 그에게 따지듯 물었다.
“이보시오, 곧 죽는단 말이오.
그것도 끔직하게.
그런데 이 판국에 웃음이 나오는 거요?”
그러자 할라지가 웃음을 참으며 답했다.
“그러니까 웃는 게 아니오”
“당신은 죽는 게 우습단 말이오?”
“있지도 않은 나를 죽여 없앤다고 이렇게 난리를 피우니
이 얼마나 우습지 않소!”
할라지는 웃음기를 잔뜩 먹은 표정으로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무아의 경지에서 신으로 화해 생사를 초월한 할라지.
그는 과연 깨달은 것인가?
가톨릭의 성자인 성 프란치스코의 수행법도 할라지와 다르지 않다.
그의 기도는 시종일관 자신의 모든 것을 신에게 바침으로써 신이 된 것이다.
성 프란치스코는 늘상
“오, 주여!
저는 제 모든 것을 당신께 바치옵니다.
저를 주님의 일에 도구로 써 주십옵소서”라고 기도를 했고
어느 날 자신이 텅 비어 사라진 자리에서 신을 보았다.
그런데 그 신이 다름 아닌 자기 자신이었다.
성 프란치스코 역시 할라지처럼
모든 것을 신에게 바침으로써 신이 된 것이다.
대개 종교라 하면
신과의 주종 관계를 근간으로 깔고 있다.
하지만 할라지나 성 프란치스코 같은 경우엔
그런 불편한 관계를 끊어냈다.
그리고 신에게 바싹 다가가 합일을 시도하였다.
이렇게 신과의 차별을 거부하며 신과 동등한 지혜를 나누려는 사조를 일러
신지학이라 한다.
그래서 신지학은
기존의 구복 신앙과 다른 신앙을 활용한 일종의 수행으로 봐도 무방하다.
불교에서도 이와 비슷한 수행법이 있다.
부처님께 모든 것을 바침으로써 무아를 이루고
그렇게 해서 빈자리에 불성이 솟아나 깨달음을 얻는 방법이다.
일명 일심귀의 수행이라 하겠다.
온 마음을 다 바쳐 부처님께 귀의하고
이로써 부처님이 지닌 불성을 공유하는 것이다.
이렇게 얘기하면 혹자는 염불선을 떠올릴 수 있겠다.
일심으로 부처님께 귀의하며 염불을 하면
앞에 말한 수행이 될 것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염불선은 의미가 좀 다르다.
스님들이 염불을 하며 찾는 불보살은
주로 마음에 내재된 불성을 가리키기 때문이다.
아무튼 신앙을 비롯해서 기복적 의식이 전혀 없던 불교에
이와 같은 종교성이 대두된 것은
절대적으로 힌두교의 영향이 크다.
세존의 가르침은 일관되게
신앙과 같은 의지처를 거부하였다.
그러니 불공과 같은 예배 의식 자체가 없었다.
세존은 일관되게 스스로의 자성을 등불로 삼고
불법을 지팡이 삼아 정진할 것을 가르쳤다.
그런데 대승불교가 나타나면서 파사현정의 일책으로
소승불교의 자리 위주의 수행 문화에 대한 과감한 혁신을 시도하게 된다.
세존은 자신이 숭배의 대상이 되는 것을 철저히 거부했기에
그들은 어쩔 수 없이 비로자나불과 아미타불을 대안으로 내세우게 되었다.
여기에 더해 대자대비한 각종 보살들을 덧붙여
서방정토와 극락왕생의 청사진을 펼쳤다.
자연스럽게 예배를 보고 불공을 드리는 문화가 생겨났다.
이와 더불어 불교에서 금기시하던 영혼의 존재를 인정함으로써
윤회와 내세관까지 확립하였다.
세존은 힌두교에 항거하며 불법의 기치를 올렸는데
대승불교는 다시금 힌두교의 문화를 절충 내시 전격 수용함으로써
원점으로 되돌렸다.
이것을 일러 학계에서는 불교의 힌두화라고 한다.
비단 문화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다.
사실 오늘날의 대승불교의 철학을 보면
힌두교의 상카라철학에 비해 크게 다른 점을 찾아보기 어렵다.
이런 일련의 이유로 인도에서의 불교는
그 독자성을 잃고 힌두교의 한 지파로 전락하고 말았다.
이처럼 불교에 힌두교의 신앙 문화가 개입되면서
부처님께 모든 것을 바치는 수행도 자리를 잡았다.
우주 최고의 신인 브라흐마에게 생각의 끝자락까지 바치는
힌두교의 수행이 그대로 전해져
일심귀의 수행으로 이름만 바꾸게 된 것이다.
일심귀의 수행은
신앙을 수반한다는 이유로 인해
종교적 시비에 휘말릴 수 있다.
그럼에도 이론적으로 어느 정도 일리가 있다.
다만 종교적 신념에서 오는 着이 무섭도록 질기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그래서 신에게 모든 것을 바칠 때
무언가에 대한 바람은 물론이고
그 신에 대한 믿음도 같이 바쳐야 한다.
믿는 마음까지 모조리 없애 버린다면
실제로 무아의 경지를 성취할 수 있다.
그리고 할라지처럼 생로병사를 우습게 보는 의식 상태에 이를 수 있다.
하지만 앞으로 상세히 살펴보겠지만
무아가 끝이 아니다.
요컨대 신에게 몸과 마음을 다 바치는 일심귀의 수행은
출가 수행자에게는 다소 미진한 부분이 있지만
그래도 재가의 수행자들에게는
꽤 유력한 방법이 될 수 있다.
세존의 무상정등각까지는 아니지만
그래도 마음을 비우고 번뇌망상을 다스리는 데에는 충분한 효용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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