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륜스님/즉문즉설(정토회)

즉문즉설_법륜스님***제 3편 분별심이 강합니다

Buddhastudy 2011. 7. 27. 17:18
  방송 보기: 정토TV

법에는 본래 옳다, 그르다가 없다는데 제가 아집이 세서 나 자신을 내세우고 상대를 비판적으로 보고 그러는데 너무 강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요즘에는 나와 다르더라도 일단 몇 단계 들어보고 반응을 늦추기는 하는데 어느 순간 어느 단계를 지나면 내 생각을 확 주장해 버립니다. 지나고 나면 또 어리석은 짓을 했구나 하며, 두통 소화불량 이런 육체적 현상이 일어납니다. 어느 정도 자기수행이 진행되는 걸 느끼겠는데 어느 순간 강하게 반발이 일어납니다.

* * *

예. 뭐 그냥 가는 과정이에요. 과정에서 나타나는 하나의 현상이니까. 뭐 크게 걱정할거 없어요. 아까도 얘기했지만은 뭔가를 바꾸려면 거기에는 시행착오가 걸리게 되는 거거든요. 그러니까 문제가 없는 줄을 알아버리면 고칠게 없다고 아까 얘기 했잖아. 그죠? 내가 문제가 있다고 지금 내가 좀 고치려고 하잖아. 고치려고 하면 힘이 좀 들고, 시간이 좀 걸리고. 과정상에 시행착오가 나타나게 된다. 그런 과정에서 나타나는 건데.

두 가지 현상을 말씀드리면 처음부터 주장하는 것보다 두세 번 기다렸다가 주장할 때가 더 세게 나온다. 이렇게 말 할 수가 있잖아. 그죠? 두세 번 기다려서 두세 번 까지 기다린 거는 좋은 측면이 있는데. 그때 다시 주장할 때는 옛날보다 더 세게 주장하니까. 판이 깨지는 거 아니오. 그거는 내가 두세 번 점검까지 했다라는 무의식적인 그 힘이 작용하는 거요. 옛날에는 처음에 팍 주장을 하는 것보다 내가 두세 번까지 고려했기 때문에 이 의견은 뭐다? 확실히 옳다. 이런 게 잠재돼서 나타나는 거요.

그러니까 남편이 뭐라고, 뭐라고 그럴 때 똑같은 현상이오. 예를 들어 만약에 길 가다가 옷이 한 벌 필요해. ‘여보, 옷 한 벌 사줘.’ 이렇게 가볍게 생각을 해 얘기했는데 남편이 ‘안 돼!’ 하면 덜 섭섭한데. 그거를 할까? 할까? 말까 한 열 번쯤 망설이다 했을 때는 ‘안 돼!’ 하면 심리적 타격이 훨씬 크다. 왜? 그런 거를, ‘내가 요새 돈이 어딨노?’ 그런 거까지 나는 다 고려해서 얘기했다 이거야. 아시겠어요? 이런 거 저런 거 다 열 번이나 고려해서 얘기했다. 그러기 때문에 내가 열 번 거절당한 거와 같은 심리적 충격이 온단 말이오.

그건 내가 그만큼 또 옳다는 얘기요. 한 번 탁 바로 반응한 거는 상대가 딱 거절하면 사람이 주장을 하더라도 내가 좀 생각을 덜했나? 이런 양보할 가능성이 있는데. 바로 두세 번 내가 고려를 했기 때문에 거긴 더 이상 고려할 여지가 없다는 게 잠재 돼 있단 말이오. 그래서 더 세게 나온다. 그러니까 이것을 알아서 내가 두세 번 고려한 거는 중요한 게 아니다. 이 말이오. 그러니까 그런걸 알아서 이제 한 발 지금 하는 건데. 어쨌든 그건 과정이에요. 과정상 이런 현상을 거치면서 깨달아 가는 거니까. 왜 그러냐고 물으니까 지금 제가 얘기하는 거고.

두 번째 이제 그러면 내가 잘못했구나 하고 느끼는데. 왜 소화불량도 걸리고 머리도 아프냐? 이거는 내가 잘못하면 안 된다는 집착이 강하기 때문에. 내 주장이 강한 것처럼 나는 내 주장을 피우면 안 된다 하는 또 다른. 이쪽에는 내 주장을 피우는 집착이 있다가, 법문 듣고 이게 중도로 온 게 아니고, 오른쪽에 가서 붙었다. 내 주장을 하면 안 된다. 나는 수행하는 사람이니까 주상해서는 안 된다 하는 집착을 하기 때문에 집착을 하면 안 된다. 주장하면 안 된다고 했는데 자꾸 또 주장하는 자기를 보니까. 자기에 대한 학대가 일어난단 말이오.

그러니까 신경이 쓰이는 거요. 마치 남이 내 성질대로 안 되가지고 남이 미워서 신경이 쓰이듯이. 자기에 대해서 지금 신경을 쓰기 때문에 이렇게 소위 소화불량이 생기고, 머리가 아프고 이런 거요. 그럼 그건 누가 잘못했나? 그건 똑같은 거요. 내 주장대로 하려고 하는 거나, 내 주장대로 하면 안 된다 하는 거나, 술을 먹어야 된다는 거나, 술을 먹으면 안 된다는 거나. 내가 몇 번 예를 들어서 하나의 양단에 속한다. 이런 얘기하잖아요.

아~ 내가 주장하고 있구나. 이걸로 끝내야 돼. 아~ 내가 주장했네. 주장하면 안 된다는 주장을 하면 안 된다 이 말이오. 그것도 주장 때문에 생기는 병이다. 아~ 내가 주장을 했네. 후회는 고집하는 거와 동격이란 말이오. 후회는 자기에 대한 또 다른 학대란 말이오. 우리가 대부분 걸리는 병이에요. 그래서 부처님이 중도라는 게 이게 중생이 어렵다. 우리는 늘 양단간의 어느 한쪽의 결정을 해야 되. 그래서 제가 여러분께 늘 하는 질문할 때 대답은 술 먹으면, 술 먹어야 된다. 이건 술에 집착이다. 그러면 술 먹으면 안 된다. 술 먹으면 안 된다는 것도 근본적으로 보면 그것도 술에 대한 집착에서 나온 거다. 둘을 다 놔라.

그러면 여러분 또 질문을 하죠. 그래서 스님은 먹으라는 거예요? 안 먹으라는 거예요? 이런 질문도 하잖아. 그게 우리는 어느 한쪽으로 가야 이게 되는, 그런 사고방식을 갖고 있기 때문에 또 결과가 그런 문제란 말이오. 그럼 결국 그럼 스님, 먹어도 괜찮다는 얘깁니까? 이런 질문을 한단 말이오. 그것처럼 거사는 술을 주장을 하면 안 된다는 데에 지금 집착을 하고 있다 이 말이오. 주장을 안 하면 되는 거고. 했으면 아~ 주장을 했구나. 이걸로 끝내야 되.

그게 다 결벽증이죠. 자기주장이 옳다는 것도 결벽증이지만은, 이제 보니 자기 주장하는 건 좀 문제가 있는 사람이고. 자기주장이 없어야 되는 사람이다. 그게 더 훌륭한 사람이다라고 하는 또 결벽증에 지금 잡혀 있단 말이오. 인간이 주장할 수도 있는 거 아니에요. 그죠? 그죠? 주장할 수도 있는 거 아니오. 주장할 수도 있는 거라는 거. 주장을 꼭 해야 되는 게 아니라. 주장 안할 수도 있는 인간인 동시에 사람이 주장할 수도 있는 인간일 수도 있고. 그걸 그냥 자기를, 주장하는 자기도 자기가 받아들여야 되요. 상대편이 의견을 내가 받아들이듯이. 주장하는 자기도 자기가 용인하고 받아들여 줘야 된다. 상대나, 그 주장하는 자기나 다 중생인데. 그거를 수용해 내야 이런 자기병에 안 걸리는 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