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일어나야 되겠다. 아침 일찍 일어나야 되겠다. 하는 것은 결심 아닙니까? 그죠? 결심. 그런데 잘 안 일어나 지잖아 그죠? 그래서 노력을 한단 말이오. 그럼 요거는 세속에서 참 좋은 일이지만은 요 본질을 딱 꿰뚫으면 일어나기 싫다는 얘기에요. 그런데 싫다는 생각을 놔 버리면 일어나겠다고 결심할 것도 없고, 일어나려고 노력할 것도 없다. 이 말이오. 그러니까 내 말은 문제의 근본을 딱 꿰뚫어서 처리를 해라 이 말이오.
문제의 근원을 밑에 놔 놓고 그 위에서 자꾸 하면 풀을 뿌리를 딱 안 뽑아내고 위에 베면, 좀 있으면 또 자라고, 좀 있으면 또 자라고, 좀 있으면 또 자라고. 그래서 한 십 년을 벴는데도 이게 뿌리가 안 뽑힌다. 이런 얘기 하는 거와 똑같다 이거요. 노력한다. 애쓴다는 게 나쁘다는 게 아니라. 노력하고 애쓰는 수준은 그건 해탈은 안 된다. 이 말이오. 그건 임시방편이지. 그럼 관세음보살님께서 일체 중생을 구제한다.
고통 받는 중생을 구제한다 할 때, 그 분은 자기 고통을 느끼면서 내가 이렇게 괴로워서 살려달라고 아우성을 칠 때 아무도 이 소리를 세상 사람이 다 못들을 뿐만 아니라 내 부모도 못 듣는다 이거야. 나를 이 소리를 듣고 내 심정을 알아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 이거야. 그래도 얼마나 억울하고 분하겠냐 이거야. 우리 생각에는. 억울하고 분하다는 거는 의지심이거든. 누구 보고 해 달라는데 안 해주니까 억울하고 분한 거 아니오.
그러다가 그가 한 생각이 이런 생각이 딱 들었단 말이오. 나뿐만 아니라 딴 사람도 나처럼 또 누가 이런 사람이 있을 텐데. 나도 그 사람 말을 못들을 거 아니냐 이거야. 내 부모도 내가 이런 상황을 듣지 못하고 보지 못하는 것처럼. 나도 이제까지 살면서 누군가가 그런 사람이 없는 줄 알았는데. 그건 없는 게 아니라 내 눈에 안보이고, 내 귀에 안 들렸기 때문에 그랬던 거 아니냐.
하~ 그런데 이 간절한 이 상황을 누가 좀 보고 누가 좀 구해 줬으면 좋겠다. 그 간절함이 그걸 누가 나를 해 줬으면 좋겠다. 하는 데서 자기가 바뀌었단 말이오. 그런 사람한테 내가 해 주자. 이렇게 생각이 바뀐 거란 말이오. 그래서 원을 세우기를 앞으로 누구든지 내 이름을 부르고, 누군가 나를 부르고. 내가 마치 엄마를 부르듯이 누군가 나를 부를 때, 나는 그걸 다 보고 다 행하는 사람이 되겠다. 이렇게 원을 세운 거요.
그러니까 이 사람은 그렇게 마음을 딱 먹으니까 이 사람 가슴속에 미움이 있겠어? 없겠어? 없어졌지. 자기가 해탈이 된 거 아니오. 동시에 그 자기 해탈과 동시에 그는 그 힘이 타인에게 미쳤단 말이오. 그러니까 우리는 지금 “관세음보살님 나 좀 도와주세요.” “관세음보살님 나 좀 도와주세요.” 하는 이런 의식을 갖고 있고. 관세음보살은 뭐든지 힘닿는 데로 남을 도와주는데. 관세음보살이 우리한테 와서 “나 힘들어서 일 못하겠다.” 이런 일은 없잖아.
도움 받는 우리는 내~ 좀 더 도와 달라 그러지. 도움을 주는 그 사람은 괴로워 못살겠다는 소리가 없잖아.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관세음보살을 부르는 것은 바로 그런 관세음보살의 원을 본받겠다는 거요. 그 분의 원을. 간절하게 기도하는 속에. 나는 내 살길만, 내 자식만 생각하고 살았는데 그 관세음보살을 지극하게 염원할 때 북한에서 굶주리는 아이들도 내가, 마치 내 자식이 굶주리는 것처럼 느껴질 수가 있고. 그리고 고통 받는 사람도 그렇게 느껴질 수가 있고.
꼭 음식문제뿐 아니라 여러 가지 보안법이나 이런 그것으로 인해서 분단으로 인해서 헤어진 가족의 아픔도 어때요? 그들의 간절한 원이 있을 거 아니오. 간절하게 기도할 때 그 아픔이 하나하나 다 내 가슴에 다가온다면 그것이 바로 우리가 통일로 가는 길이 아니겠냐? 그것이 우리 속에 모아질 때 우리가 통일 운동한다, 뭐 한다 해도 낮에는 가서 통일 운동하고 저녁에는 술 마시고 자고, 이런 게 아니라. 온통 자기의 삶을 이대로 직장이나 지도자로 활동을 하더라도 모든 방향이 그 고통에 조금이라도 치유하는데 자기 에너지가 쏟아져 나간단 말이오.
그래서 우리가 대비라고 그래. 대비라는 것은 그 아픔을 느낀단 말이오. 그죠? 관세음보살님께서 일체중생의 아픔을 느끼고 있기 때문에. 바로 아파하는 마음이 있다. 연민이 있다 그러죠. 아파하는 마음이 있기 때문에 이것을 부모가 자식 일을 거들을 때 자식이 아픈걸 보고 “아이고~” 이렇게 할 때. 이 자식을 위해서 내가 해주면 나중에 커서 나한테 뭐해 줄래? 이런 아무런 생각이 없잖아. 그냥 자기일 하듯이 하는 거지.
그러니까 관세음보살은 일체중생의 고통이 바로 자신의 일이다. 바로 우리가 민족의 아픔이 나의 일로 돌아가는 것처럼. 유신 후, 정치가, 김영삼, “김대중이 니해라.” “김영삼이 니 해라.” 이런 일이 아니란 말이오. 이것이 바로 나의 일이다. 그렇게 기도를 하세요. 그런 마음으로 늘 기도를 하면서 또 우리가 이것이 왜 가정의 화합에도 좋으냐 하면, 그러면 저 얼굴도 모르고 이름도 모르는 그 사람의 아픔도 내가 느껴지는 사람이 나와 살을 맞대고 사는 내 아내나 내 자식의 아픔을 외면하고 산다면 앞뒤가 안 맞잖아.
내 자식만 알고 남을 외면하는 거고, 남은 알고 내 자식을 외면하는 게 아니라. 바로 그 중생의 아픔 속에 내 부인과, 내 자식도 포함 돼 있는 거 아니오. 그러니까 자연적 이 기도를 통해서 아내를 이해하고 자식을 이해하는 쪽으로 갈 수 있겠죠. 그건 집안의 통일이지. 집안의 화해와 통일이고. 그것은 경상도 사람이라면 전라도 사람의 아픔을, 전라도 사람이라면 경상도 사람의 아픔을. 자본가라면 노동자의 아픔을 노동자라면 자본가의 그 답답함을 우리가 이해한다면 우리사회 내에 계급계층간의 화해와 통일이라고 볼 수 있지.
이것이 민족 간의 화해와 통일로 나아가는 거고. “관세음보살님 통일하게 해 주세요.” 이런 기도는 안 해요. 바로 통일의 주체가 나죠. 그분처럼 그분 같은 마음을 낼 때 우리가 다 통일의 주체가 된다는 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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