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륜스님/즉문즉설(2013)

[즉문즉설] 제365회 일과 수행이 같은 도리

Buddhastudy 2013. 4. 19. 22:08

출처 YouTube

 

중생이라는 말은 보통사람들은 세상에서 일에 빠져있어요. 일에 빠져있는데 그러니까 괴로워요. 그저 돈 뭐, , , 하니 인생이 괴롭잖아. 괴로우면 일이 효율적으로 되겠어요? 효율적으로 안 되겠어요? 효율적으로 안 돼요. 여러분들이 자식에 집착하고 있기 때문에 자식을 제대로 교육을 못 시키고. 부부관계도 자기의 요구가 너무 많기 때문에 부부관계가 금이 가고, 금이 가니까 결국은 자기에게 괴로움이 돌아오는 거요.

 

그러니까 잘 살라고 결혼도 하고, 잘살라고 애기도 낳고, 잘살라고 사업도 하고, 잘살라고. 직장도 구하고, 잘살라고 뭣도 했는데. 또 그 애기 때문에, 또 그 남편 때문에, 그 직장 때문에, 그 사업 때문에, 그 일 때문에 괴롭다 이거요. 지금 괴로운 게 다 그런 일 아니오. 그러니 이 괴로움에서 어떻게 하면 벗어나느냐? 그 괴로운 현실만 보니까 남편만 없으면 괴로울 일이 뭐가 있나? 자식만 없으면 괴로울 일이 뭐가 있나? 아내만 없으면 괴로울 일이 뭐가 있나? 사업 딱 치워버리면 괴로울 일이 뭐가 있나? 직장 고만둬버리면 괴로울 일이 뭐가 있나?

 

이런 생각이 우리가 든다 이거야. 그래서 그거 다 집어 치워버려라. 보통 사람도 다 한두 가지는 다 집어 치웁니다. 아시겠어요? 한두 가지 집어 치웠다가, 직장을 집어 치웠다가 또 직장 구하고, 부인도 남편도 집어 치웠다가 또 딴 남자 구하고, 그게 재혼 아니에요. 또 구하고. 이런단 말이오. 그러니까 애가 왜 고통이 커요? 이 인생 중에 빼도 박도 못하는 게 자식인데 남편까지도 갈아치울 수가 있는데 자식은 갈아치울 수가 없기 때문에 그래서 그게 참 불행해요. 애 또 갈아치울 수 있으면 여러분들 스트레스가 좀 덜 할 거요. 말 되게 안 들으면 버려버리고 딴 걸 데려오면 되는데. 그런데 자식은 그게 안 돼. 남편은 그건 된단 말이오.

 

그래서 이거를 다 때 버려. 그래 산속에 들어가 가지고 가만히, 아내가 없으니 바가지 긁을 사람도 없어. 남편이 없으니 심부름 시킬 사람도 없어. 애가 없으니 걱정거리도 없어. 회사가 없으니 신경 쓸 일도 없고, 좋죠. 그저 뭐 이렇게 나무를 벗 삼고, 새를 벗 삼고, 구름을 벗 삼고, 참 좋아. 그것도 하나의 해결책이오. 해결책. 그런데 이렇게 가서 그렇게 해결 된 사람도 있어요. 그런데 거기 가면 그렇게 못 가가지고, 탁 치워야 되는데, 탁 치워야 되는데, 못 치워서 사는 게 보통 중생이고, 그렇게 용기 내서 치워도 가서 다 정리해 놓고 가가 있으면 어떠냐? 허전해. 외로워. 그래서 또 고민이 생겨.

 

전에 고민하고 종류가 틀리는 또 새로운 고민이 생겨. 여자 남자가 생각이 나가지고 고민이 생겨, 애들 고민이 생겨, 뭐 그냥 사업을 안 하는 대신 돈이 없어. 사람들 하고 있으면 귀찮은데 이렇게 산속에 와 있으니 외로워. 그러다 그 좋은 거는 잠시고 또 살면 어떠냐? 온갖 상상의 번뇌가 생겨. 그래서 산에 있는 중들 가만히 앉아 있어서 여러분들 보기에는 걱정이 없을 거 같지. 머리통 속에 들어가 보면 더 복잡해. 사람은 그렇습니다.

 

이를테면 여자나 남자는 없는 데서 산속에서 살면 이 여자 생각이 남자 생각이 더 날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들이 와서 눈에 선한 데서, 온갖 사람들을 보면 이게 집착이 생길 수가 있고, 돈이 없는데 살면 돈에 대한 집착이 적은데. 돈 있는 데서 보면 집착이 더 생길 수도 있고. 또 반대의 현상도 있습니다. 사람들하고 이렇게 여자남자 저그끼리 살면 남자여자 생각이 오히려 없어져 버리는데. 혼자 있으면 거꾸로 머릿속에서 여자생각 남자생각이 더 날 수도 있다.

 

그러기 때문에 그것을 통해서 이게 완전히 자유롭다고 말 할 수가 없고, 특히 그렇게 해서 거기에 만족하고 사는 사람이 있다 하더라도 그는 고 지역에 갇혀 있어요. 마치 우리가 가정에 갇혀 있듯이 사회에 갇혀 있어. 그 사람은 어디에 갇혀 있다? 그 숲에, 그 산에 갇혀 있다. 내려오면 번뇌가 생겨. 그래서 스님들 늘 얘기해요. 도시에 하루만 있어도 못 살겠다 그러죠. 그래 안 그래요? 공기도 나빠, 음식에 냄새가 나, 사람들 하고 외로워 내려와 가지고 사람들하고 며칠 이렇게 온갖 집착하는 사람들하고 있으면 머리가 아파가지고 다 도로 도망가. 그래서 산에 있던 중이 외로워가지고 속세에 와서 2~ 3년 있다가 다 그 쪽으로 도망을 가거든요. 애만 하나 놔 놓고 다 도망을 가버려요.

 

그러니 이게 그 안에서 편안을 누리는 거는 세속보다는 좋아요. 그런데 거기에서 편안을 못 누리는 사람이 사실은 대부분이고. 누린다 하더라도 제한 돼 있다. 어떤 상황이 바뀌어 버리면 도가 끝난다 이거야. 그러니 여기에서 다시 이 문제의 본질을 살폈다 이거야. 이걸 끊어서 없앤다. 이것이 모든 원인이라고 생각했는데. 이걸 떠나 있으면 또 해결이 돼야 되는데 역시 또 해결이 안 된다. 이거야. 이걸 끊어 버리면 해결이 된다는 것은 이것 또한 마치 세속에 살면서 돈 때문에 남편 때문에 자식 때문에 라고 했던 이거의 연장선상에 있어. 아직도 탓을 어디로 하고 있다? 밖을 탓하는 그 연장선상에 있기 때문에. 크게 보면 이것마저도 수행이 아니다. 이것도 아직도 밖을 탓하는 데서 생기는 한 해결 방식이다.

 

그러니 안으로 돌이켜서 살펴본다면 이것은 남편 때문에 오는 것도 아니고, 자식 때문도 오는 것도 아니고, 부모 때문에 오는 것도 아니고, 돈 때문에 오는 것도 아니고, 세상 때문에 오는 것도 아니다 이거야. 내 생각대로, 내 식대로, 내 요구대로 하려고 하는 데서 생긴 문제다. 그걸 놔 버리면 어떠냐? 그걸 놔버리면 같이 있어도 아무 문제가 안 되고 혼자 있어도 아무 문제가 안 된다. 이것이 대승보살의 길이다. 그러니까 대승의 수행은 소승은 이걸 어떻게 떠나가지고 접근을 안 하느냐? 술도 안 먹고, 안보고, 여자도 가까이 안하고, 뭐도 안하고, 뭐도 안하고, 뭐도 안하고. 이 울타리를 어떻게 치느냐? 이 계율 안에. 그 안에서 어떻게 안주를 하느냐? 이게 수행이란 말이오.

 

대승은 이 수많은 부딪침 속에서 돌아보면서 살핀다 자기가. 저게 저러니까 내가 화가 나지 했다가 아이고 아니지, 그냥 그 사람은 그렇게 말하고, 그렇게 행동 했을 뿐인데. 이게 뭐다? 제법은 공할 뿐인데. 내가 옳으니 그르니 분별함으로 해서 내가 지금 짜증이 나는 거다. 그러니까 제법이 공한 이치를 살핀다는 건,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면 명확하게 사라진다. 그러니 이것은 경계 속에서 공부를 한다 이거야. 경계에 부닥쳐서 분별이 일어날 때 뭐가 된다? 자기를 살피는 공부가 된다. 이거요. 소승은 경계를 멀리, 경계에 부닥쳐서 끌려가니까 경계를 멀리한다면 대승은 경계에 부닥쳐서 일어나는 자기를 살핀다. 이거야.

 

그러기 때문에 경계가 공부에 장애로서가 아니라 경계가 때로는 공부를 뭐 한다? 깊게 해주는 요인이 된다. 그러니 이 세상을 떠날 필요가 없다. 이 세상에 집착하는 것도 아니고 이 세상을 떠나는 것도 아니다. 이거야. 이 세상** , 이 세상에 속에서 자유롭다. 그게 진흙탕 속에 한 송이 연꽃이 피듯이 하는 거다. 그래서 대승불교에서는 보살도 이상을 뭐로 표시한다? 연꽃으로 표시한다. 이것을 요즘 말로 정리한 게 뭐다? 일과 수행의 통일이다. 이것이 대승불교에서 정리된 언어가 뭐다? 상구보리하고 하와중생한다. 이렇게 표현이 된단 말이오.

 

바로 사람들과 어울려서 그 사람을 도와 줘. 내가 도움을 받으려는 생각을 그 사람을 도와주겠다는 마음을 내니까. 받으려는 생각이 없다. 받아야 된다 가 중생이고 받지 않는다 가 소승이라면 도와준다는 대승이고, 도와주려고 마음을 내니까 내가 그 사람에 대한 미움이 없어진다 이거요. 그러니까 그 사람이 좋은 게 아니라 내가 더 좋아진다. 내가 누구를 좋아하면 내가 좋고, 내가 누구를 도와주려면 내가 어른이 된다 이거야. 내가 그를 이해하면 내 가슴이 후련해진다 이거야. 내가 그를 이해 못하면 내 가슴이 답답해진다.

 

그러니까 남을 이해하고, 남을 도와주고, 남을 사랑하면 누가 더 좋나? 내가 후련해지고, 내가 어른이 되고, 내가 행복해 진다. 이것이 자기를 해탈시키는 길인 동시에 중생을 교화하는 길인데. 한쪽은 자기 수행하고, 한쪽은 중생 교화하는 게 아니라. 중생교화와 자기 수행이라는 게 동시에 일어난다 이거야. 이게 자리이타라고 표현했다. 자리이타. 상구보리 하와중생이라고 표현했다 이거야.

 

이것을 선에 와서는 뭐냐? 선에서 산중에서 스님들이 먹고 살려면 농사를 지어야 되잖아 그죠? 참선 할까? 농사지을까? 농사짓느라고 참선 못해. 그게 아니다 이거야. 농사짓는 속에서 선을 하는 게 뭐다? 선농일치란 말이오. 오늘날 우리는 우리가사는 세상을 좀 더 아름답게 가꾸어 가정을 화목하게 하고, 사회적 환경을 개선하고, 사회를 정의롭게 하고. 그래서 사회를 정의롭게 하려고 보니 어때요? 저놈 못된 놈. 저거 죽여라. 이러다 보니까 세상 속에 빠져들어 간다.

 

그러면 세상하고 멀리 떨어져도 산속에 가니까 세상 죽던지 말든지 외면하는 거라. 바로 우리가 사는 세상을 아름답게 가꾸어 나가는 가정을 화목하게 하고 세상을 평화롭게 하고 자연을 아름답게 가꾸어 나가는 이게 우리는 일이라고 말하는 거란 말이오. 또 운전을 하는 사람의 일은 운전이란 말이오. 그런데 우리는 그 운전을 어떻게 하느냐? 돈 벌려고 운전을 한단 말이오. 그러니까 스님이 안 오면 초조하고, 바가지 씌울 생각이 들고, 돈 적게 주고 가면 성질나고, 장애인이나 할머니가 짐 많이 태워 가면 합승 못해서 짜증이 나고. 하루 종일 그냥 신경질 속에서 산다 이거야.

 

그런데 내가 마음을 돈에 목적에 두지 않고, 내가 이 운전을 통해서 사람을 도와줘야 되겠다. 길 모르는 사람은 길을 가르쳐 주고, 무거운 짐을 든 사람은 짐을 들어다 주고, 꼬마들은 부축해 준다. 그게 복 짓는 거고 보살행 아니냐 이거야. 그래서 나는 오늘처럼 몰고 와서 *** 똑같은 사람이 있는 중에는 장애인 먼저 태워주고, 똑같은 사람 중에 노인을 먼저 태워주고, 똑같은 사람 중에 있다면 짐 많은 사람을 먼저 태워 준다 이거야. 짐 많은 사람도 태워주겠다는데 짐 없는 사람 탔다고 니는 복 안 지으니 빠져라. 이렇게 하면 안 될 거 아니냐 이거요.

 

그러니 누구든지 태워준다 가 된다 이 말이오. 누구만 태운다 가 아니고. 그렇게 운전을 하면 하루 종일 즐거울 거 아니냐. 노인 한 번 태워다 드리고. 장애인 한 번 태워다 드리고, 짐이 태산 같은 사람을 태워다 드리고. 그러면 내가 즐겁잖아. 그런데 그 사람이 타고 가면 돈을 줄 거 아니오. 그냥 고맙습니다. 하고 받지. 그래도 생활이 유지되지. 돈에 집착해서 다만 하루에 십만 원 벌 거 십이만 원 벌었다 해도 속타가지고 약 먹고, 신경질 나 술 먹는데 이만 원 더 쓰여진다 이거야.

 

그러니 일할 때는 괴롭고. 스트레스 푼다고 또 술 먹어야 돼. 그거 갖고 속 끓이니까 또 약 사먹어야 돼. 그거 갖고 또 부인하고 싸워야 돼. 이거 생각하면 십 만원만 벌어도 어때요? 하루 종일 즐겁고 스트레스 받을 일없고, 한 잔 먹는다 하더라도 그냥 숙면하기 위해서 먹고, 집에 가서 부인하고 즐겁게 살고. 그러니까 이 길을 선택하지. 이 길을 사느냐? 이게 어리석다 이거야. 그러니 그는 이런 이치를 알면은 하루를 즐겁고 자유롭게 사는데 도움이 되는 일, 중생을 어여삐 여기고 중생에게 도움이 되고, 자기도 즐거운 길을 간다. 이게 일과 수행의 통일이다 이거야. 뭐가 어려운 문제요. 이게 왜 헷갈리나? 헷갈리래야 헷갈릴 수가 없어. 헷갈리고 싶어도 안 헷갈려지는 게 이거라니까.

 

그래서 정토회에서는 상구보리니 하와중생이니 자리이타니 선농일치 그 시대에 썼던 용어고. 오늘 우리의 새로운 시대의 용어는 뭐로 고쳤다? 일과 수행. 일하느라 수행 못하고 자꾸 이러니까 일과 수행은 분리되는 게 아니다. 그리고 또 수행을 해서 마음이 편안하면 일 머리를 더 잘 푸니까 일에 도움이 되고. 일을 열심히 하면, 자기도 모르게 뭐가 생긴가? 집착이 생긴다. 집착이 생기다 보면 뭐가 일어난다? 분별심이 생긴다. 분별심을 살피니까 어때요? 이 수행이 그냥 아무 경계가 없는 데서 수행하는 사람보다는 이런 경계가 늘 일어나는 속에서 공부하는 사람이 이게 훨씬 더 현장에 강한 거요. 산속에서 차단 되서 점잖게 하는 거는 대가리통 한 대만 때리면 성질이 금방 나.

 

그런데 이런 사람은 산전수전을 다 겪는단 말이오. 연습한단 말이오. 화도 내고, 짜증도 내고, 괴로워도 하면서 그걸 자기가 가만 살펴서 생각하기 때문에 밖에서 보면 똑같이 하는 거 같지만은 이 사람은 현장에 강하다니까. 여기서 수행이라는 말은 선을 말하는 거다. 그래서 그것이 일과 수행의 일치. 이 말은 선농일치. 그것은 자리이타. 그것은 상구보리하와중생. 다른 말로 하면 이렇게 되면 세간과 출세간이 분리되지 않는 세간과 출세간이 같은 거고. 여기서 보리적 번뇌, 세간즉 출세간, 불생불멸 이런 말 하고 다 일치되는 거다. 우리가 이렇게 실수를 하면서 끝없는 실수를 하면서 성공의 길로 나아가기 때문에 실수와 성공이 둘이 아닌 거다.

 

화를 냈는데 화 안 나는 세계로 나아가기 때문에 화내는 일과 화 안내는 일이 일치한다. 그래서 이것을 일과 수행의 일치. 이런 말을 쓰고. 우리는 그런 세계로 나아간다면 여러분들의 가정생활이 화목해 지죠. 스님은 여기서 대중과 살기 위한 과정에서 공동생활을 하는 거고, 여러분들이 가정의 갇히지 말아야 한다 이거야. 가정의 공동생활을 하면서도 가정에 갇히지 말아야 하고, 스님은 절에서 공동생활을 하지만은 승려사회에 갇히지 말아야 한다.

 

그럴 때 우리는 다만 역할이 분담돼서 하는 거고 모양이 다를 뿐이지 우리들의 방향은 같은 거다. 스님은 여기서 하루 종일 이런 일을 한다면 여러분들은 집안에서도 그런 일을 하고 직장에서 그런 일들을 한다 이거야. 그러니까 이것이 동일한 선상으로 움직이는 거다. 여기 와서 일하는 것만 정토일이 아니라. 가정을 그렇게 살면 그것이 뭐다? 정토에 내가 가는 길이고 자기가 운전을 하면서 직장에서 그렇게 약사가 그렇게 약을 팔고 의사가 그렇게 치료를 하면 그것 자체가 다 뭐다? 여기서 정토회 이름으로 하는 거랑 그것도 다 정토회 일이다. 그것이 이 세상을 정토로 만들어가는 일이다. 꼭 여기 와서 뭘 하는 것만 일이 아니다 이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