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웃어요? 그래요? 저는 이걸 들으니까 기분이 아주 좋아요. 좋다고 시집가드니 잘됐다. 이런 얘기를 들을 때마다 혼자 사는 사람의 기쁨을 ** 그런데 이것은 결혼한 사람, 즉 부모와 자식 간에만 있는 일은 아니죠. 부모 자식 간에 심하다고 할 수 있는지는 모르는데. 두 번째 부부간에도 마찬가지라고 볼 수 있는 일들도 많고, 저도 여기 살면서 대중과 그냥 가만히 내버려 둘라고 그래도 그렇고. 잔소리를 해봐야 소귀에 경 읽기고. 이런 일은 누구나 다 어디에서든 다 발생하는 일이다. 그런데 이때 수행자다 할 때 수행을 하는 사람이다 할 때는 이런 일을 어떻게 바라 봐야 되느냐? 이런 얘기에요.
보통사람은 애를 나무랐다가, 내 자신을 나무랐다가, 또 왔다 갔다 하고 고민하는 게 보통 세상 사람들의 태도인데. 수행을 한다 라고 할 때는 이런 문제를 어떻게 봐야 되느냐? 첫째가 잔소리를 하는 것도, 잔소리를 안 하는 것도 내 문제다. 아이 문제가 아니고. 수행자는 이렇게 봐야 된다. 이렇게 보면 수행적 태도라고 할 수 있고, 이렇게 안보면 세간적 태도라고 할 수 있다. 잔소리를 하는 것도 내 문제고 잔소리를 안 하는 것도 내 문제다. 이것은 아이를 위해서가 아니다 이거야.
잔소리를 할 때는 내 원하는 대로 안 되기 때문에 내 원하는 대로 되라고 잔소리를 하는 거고, 잔소리를 안 할 때는 내 말을 안 들어 주니까 성질이 나가지고 “에라 모르겠다. 니 맘대로 해라.” 이렇게 해서 또 잔소리를 안 하게 된다. 잔소리를 할까? 잔소리를 안 할까? 하는 이것은 아이를 위해서 하는 게 좋을까? 안 하는 게 좋을까가 아니고, 안 하려니 답답하고, 하려니 애하고 또 갈등을 일으키는 게 싫고, 그래서 그 둘 중에 내가 어느 게 더 이로울까? 를 재는 거에 불과하다. 아이를 위해서 지금 고민하는 게 아니고. 어떻게 하면 나한테 더 이로울까를 보필하는 것에 불과하다. 잘 안 받아 들여지죠?
백화점 앞을 지나가는데 아이가 ‘엄마 나 권총 하나 사줘.’ ‘안 돼.’ ‘사줘’ ‘안 돼.’ 이럴 때 우리는 권총을 총 장난감 하나 사달라는 아이에게 안 된다 할 때는 아이를 위해서 안 된다. 이렇게 내가 지금 하고 있는 것 같아. 이것이 너를 위해서 안 사준다. 그러다 거기서 아이가 울고, 땅바닥에 앉아 발을 동동 구르고, 고함을 지대고, 가자 그래도 안가고, 펄쩍펄쩍 뛰고 이러면 “그래 그래 알았다.” 그러면서 사준다. 이럴 때도 너를 위해서 사준다. 우린 이렇게 생각해.
안 사주는 것도 너를 위해서 안 사주고, 이 사주는 것도 누구를 위해서? 너를 위해서 사준다. 이렇게 보면 세속적이다. 안사줄때도 나를 위해서 안 사주고 사줄 때도 나를 위해서 사준다. 이렇게 봐야 돼. 사달라 할 때 안 사주는 거는 내가 보기에 안 좋아서 안 사주는 거요. 그런데 아이는 막 울고불고 하니까 그래 그래하고 사주는 거는 그 달래려니 귀찮아서 사주는 거요. 그러니까 정말 아이를 위해서 안 사주기로 했으면 아이가 아무리 울고불고 팔짝 뛰어도 사줘야 되어 안 사줘야 되요? 안 사줘야 되요. 아이를 위해서 사준다면 처음에 사줘야지 왜 그렇게 괴롭히고 사줘.
그러니까 이것이 나의 문제라고 바라봐야 번뇌가 사라진다. 해결책이 금방 나오는 거요. 이것이 아이를 위해서 아이문제라고 보는 한은 해결책이 이래도 문제고 저래도 문제고. 남편이 어쩌고 저쩌고 해서 살까 말까? 이것도 누구 문제다? 내 문제지 남편 문제가 아니다. 아이의 이런 문제도 내 문제지 아이의 문제가 아니다. 이렇게 분명하게 입장이 정리 될 때 수행자적 태도, 수행자적 자세라고 볼 수 있고, 이것이 아이로 인해서 문제라고 보는 한은 이것은 세간의 문제다. 그럼 우리는 머리 깎고 중이 되도 세간에 살고 있고, 절에 다녀도 세간에 살고 있지. 세간을 벗어난 출세간적 태도가 아니다.
그러기 때문에 다 인생살이가 혼란하고 괴롭고. 그렇게 입장이 정리 된다면 아이를 어떻게 볼 수 있을까? 아이가 공부를 안 하거나, 컴퓨터게임을 하거나, 이럴 때 그걸 보는 내가 속이 타죠. 이럴 때 우리는 뭘 봐야 되느냐? 제법이 공함을 봐야 돼. 그 아이는 다만 그럴 뿐인데, 컴퓨터게임을 할 뿐이고, 놀 뿐이고, 할 뿐인데. 그걸 보는 나의 생각, 나의 기준에 의해서 나에게 뭐가 일어난다? 분별이 일어나고 화가 난다. 이걸 내가 못 참아가지고 얘기를 하기 때문에 이것은 나의 화를, 스트레스를 푸는 거에 불과하다.
그러기 때문에 아이에게는 잔소리가 된다. 이럴 때는 잔소리를 안 해야 된다 가 핵심이 아니에요. 이렇게 잔소리를 하고 싶은데 잔소리를 안 한다. 이러면 뭐요? 참는 거요. 참는 거는 세속에서는 좋은 사람이라 하지만은 수행에서는 참는 거는 수행이 아니다. 이건 제가 누누이 말씀을 드렸습니다. 참는 거는 수행이 아니다. 이 말이오. 나쁘다는 게 아니라. 그건 수행이 아니다. 수행이 아니다는 말은 그것은 문제를 본질적으로 해결할 수가 없다. 이런 얘기요.
그 때는 누구를 봐야 된다? 자디를 봐야 된다. 아이가 저러는데 내가 왜 화가 날까? 아이가 저러는데 내가 왜 괴로울까? 아이가 저러는데 왜 내가 답답할까? 나의 문제로 받아들인다. 나의 문제로. 여기 바로 내 의견을, 내 취향을, 내 생각을 고집하고 있기 때문에 답답하고, 화가 나고, 괴롭고, 슬프고 이렇게 된다. 그러니까 내가 뭔가를 잡고 있는 거요. 잡고 있는 걸 놔야 한다. 이게 상이라고 보면 상을 내려놔야 된다. 이게 아집이라 그러면 아집을 내려놔야 된다. 이게 분별이라면 분별을 놔야 된다. 이게 집착이라면 집착을 놔야 되는 거요.
그러면 아이가 무슨 짓을 하든지 편안해 진다. 이거를 잔소리를 하지 마라. 하라의 개념이 아닌데도 여러분들은 아이를 위해서 잔소리를 한다? 또 그래서 부작용이 나니까 잔소리를 안 한다? 자꾸 이렇게 본다. 이미 화가 났는데 그것을 바깥으로 내느냐? 바깥으로 안 내느냐? 하는
거는 세속적인 선악이다. 바깥으로 화를 내면 악이고 바깥으로 참고 화를 안내면 선이다. 이 세속적인 선악이란 말이오. 그럼 이미 화가 났을 때 일이란 말이오.
그럼 수행이라는 건 뭐냐? 화가 왜 일어났느냐? 이걸 연구하는 거란 말이오. 왜 애가 저런데 내가 화가 날까? 이거를 돌이켜 보는 거란 말이오. 그래서 화가 나지 않는 것이 수행이란 말이오. 화를 안내는 게 수행이 아니고, 화가 나지 않는 것이 수행이다. 나지 않으니까 참을게 없는 거요. 그럼 화를 내면 수행이 아니냐? 이런 얘기가 아니란 말이오. 화가 나거나 화를 낼 때 이 화가 왜 일어나는지를 돌이켜 살펴보는 거를 수행이라고 한다. 그걸 돌이켜 살펴보면 번뜩 사라진다 이거야.
우리 대부분이 지금 공부를 어떻게 하느냐? 일어난 화는 놔 놓고. 이거를 낼까? 말까? 낼까? 말까? 확 내버릴까? 참을까? 낼까? 참을까? 이걸 갖고 공부가 됐냐? 안됐냐? 자꾸 이렇게 평가하기 때문에 화를 내면 내는데 대한 부작용이 있고, 참으면 참는데 대한 고통이 있다. 그래서 고통으로부터 벗어나는 해탈로 가지 못한다. 이 화가, 이 고통이 왜 일어날까? 그거의 본질을 봐라 이거야. 왜 일어날까? 다만 일어날 때 일어나서 잘못됐다 잘됐다가 아니라. 이게 왜 일어날까? 를 살펴봐야 한다.
우리가 수련한다는 건 그게 핵심이에요. 그런 상태의 힘을 키우는 게 우리가 깨달음장에서 하는 거 아니오. 갔다 오신 분이라면 그때 살피던 것을 늘 일상생활 속에서 적용해야 되고, 깨달음장에 갔다 오지 않은 사람은 그것이 내가 한두 번 얘기 듣고 안 되니까 가서 그걸 집중적으로 살피는 연습을 해야 된다. 그래서 내가 편안 해져버리면 아무 문제가 없어요. 그런데 여러분들 또 이렇게 묻죠. 그럼 내가 편안하면 됩니다. 아는 어떻게 하고요?
내가 편안하면 아무 문제도 없어. 다 내가 불편하기 때문에 자꾸 문제를 삼는 거요. 내가 편안하면 아무 문제도 없다. 내가 오늘 소풍 가려면 나를 기준해서 오늘 비가 안 와야 된다 이 생각만 하지. 지금 농사에 비가 와야 되는 건 생각 안하고. 내가 농사짓는 거만 생각하면 오늘 비가 와야 된다는 생각만 하지. 오늘 여의도에서 몇 만 명이 모여서 집회하는 사람들의 어려움은 생각을 안 하는 거요.
담배나 술 먹어서가 문제가 아니라. 술 먹는 꼬라지를 내가 보기 싫어서 문제요. 지가 좋을 때는 술 먹는 게 좋잖아. 우리 술자리에 가서 한잔 하자. 할 때는 안 먹겠다고 빼는 게 어때요? 문제가 되잖아. 저 쫓아 내버려라. 저거. 이러잖아. 절에서는 지금 술 먹는 것 쫓아내자 하지만 술자리에서는 안 먹는 거 어때요? 쫓아내잖아. 그러니까 이게 나의 문제다. 그러니까 나를 살펴라. 그걸 화를, 잔소리를 할까? 잔소리를 말까? 이렇게 사물을 보기 때문에 이 문제는 해결이 안 된다. 그 잔소리를 하겠다는 거는 뭔가 불편하다는 거 아니오. 그죠? 왜 불편할까? 이걸 먼저 살펴야 돼.
왜 불편할까? 그러면 아이의 행동이 내 맘에 안 들어서 불편하다 하면 아이입장에선 똑같이 어떨까? 엄마의, 어른이 아이한테 불편할까? 안 할까? 불편하겠지. 그러니까 아이가 말을 안 듣는 거요. 그러니 여기서 그 다음에 어떡할까? 그건 생각할 필요가 없어. 왜? 그것이 나의 문제고, 내가 왜 불편할까? 를 살펴야 돼. 그래서 편안해지면 아무 문제가 없어. 감옥가도 문제가 없습니까? 문제가 없고, 놀아도 문제가 없습니까? 문제가 없어. 내가 편한테 무슨 문제가 있겠어? 아무 문제가 없어.
그런데 그래 되는 자연적 아이에게 내가 불편해서가 아니고. 나는 편안한데 아이를 위하는 길은 뭘까? 그때는 내가 지금 미리 얘기 안 해도 저절로 알게 돼. 그러기 때문에 내 의견을 고집하게 문제를 제기하는 게 아니라. 내 의견을 얘기하면 받아들일 확률이 높아. 또 아이가 안 받아 들여도 아무 문제가 없어. 이해가 되요? 그런데 이게 안 되지. 아이가 안 되는 게 아니라 누가 안 된다? 내가 안 되는 거요.
그러니까 수행이론에 나오잖아. 그죠? 그래서 수행문에서는 그러니까 다만 나를 살피고, 내가 깊이 참회를 해야 된다. 내가 잘못했다 하는 잘못은 내가 잔소리를 하는 게 잘못했다 이런 뜻이 아니라. 내가 잘하고 잘못한 것이 없는데 있다고 생각한 이것이 잘못됐다는 개념이에요. 나는 잘하고 니는 잘못했다는 것만 잘못된 게 아니라 니가 잘하고 내가 잘못했다는 것도 잘못된 생각이에요. 잘하고 잘못한 것이 없는데 있다고 착각을 해가지고 남을 미워하니 잘못됐다 이거야. 그 착각에서 벗어나는 게 참회란 말이오.
그러니까 상대가 뭐라고 할 때 애가 뭐라고 할 때 잔소리를 하면 수행이 안 됐고 잔소리를 안 하면 수행이 됐다든지. 잔소리를 하면 애를 위한다든지 이런 개념이 아니다. 이것은 나의 문제고, 나의 문제를 내가 어떻게 대응하느냐? 잔소리를 하는 식으로 자기 답답함을 푸는 사람도 있고. 그 부작용 때문에 참는 걸로 자기가 대응하는 방법도 있고. 그건 다 중생이 대응하는 방법에 속하는 거다. 그건 안 가르쳐 줘도 여러분들이 알아서 잔소리를 했다가 말았다가, 했다가 말았다가. 잔소리를 한다고 이 세상 사람이 다 말하는 사람이 어디 있어.
그 많이 하는 사람도 다 참아가면서 해요? 안 참아가면서 해요? 참아가면서 해요. 내 참는다 하는 사람도 가끔 해요 안 해요? 해. 그러니까 그 비중이 서로 어떤 차이가 있는 거지. 똑같아. 근본적인 해결은. 그러니까 문제는 참을 때도 잔소리를 할 때도 하고 참고 이게 문제가 아니라. 참을 때도, 할 때도, 늘 수행자는 어느 쪽으로 돌아봐야 된다. 하는 자기를 돌아봐야 된다. 참는 자기를 돌아봐야 된다. 하는 건 잘했고 참는 건 잘못됐다고 이렇게 보지 마라. 그런 자기를 돌아봐라. 그런 자기를. 왜 그렇게 할까?
답답하니까. 왜 답답할까? 애가 저러니까? 그건 밖을 탓하는 거다. 애가 그런데 왜 내가 답답할까? 이것이 나의 문제입니다. 거기를 살피면 벌써 내가 뭔가 나를 중심에 놓고 사물을 보는 이 자기라는 것이 도사리고 있다 이거야. 그것이 만병의 원인이다. 이런 얘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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