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아하고 싫어하는 게 누구나 다 있습니다. 이 세상 사람은. 그 좋아하고 싫어하는 걸 바깥으로 드러 안내는 훌륭한 사람 있습니까? 바깥으로 자연스럽게 드러나면 좋은 거요. 그런데 싫어하면서도 좋아하는 척 해가지고 남을 속여 먹고 싶거나. 그러면 그럴 때는 아프겠죠. 솔직하게 살려고 생각하면 문제가 없어요. 그냥 감정표현을 하고 사세요.
그런 애는 안 받으면 되잖아. 거기다 그럼 써 붙여보면 놓으면 되잖아. 예를 들면 돈을 안내는 사람은 안 받는다. 뭐 어린애는 안 받는다. 이런 조건이 있잖아. 그죠? 내가 면접을 해서 싫은 사람은 안 받는다. 써 붙여 놓으면 되지. 미리 그렇게 딱 표시하면 사람들이 재미있어 하죠. 저 선생님은 돈 보다는 감정을 더 중요시 한다. 이렇게. 왜? 그렇게 좀 이상해요? 그렇게 하면은. 싫어하고 좋아하는 것은 누구에게나 다 있다. 사람은 좋아하는 걸 하고 싶고 싫어하는 건 안하려고 한다. 그것도 마찬가지에요.
그런데 이렇게 살 때는 우리가 좋아하고 싫어한다고 하는 자기감정에 속박 받고 있다. 만약에 기차를 탔거나 어떤 상황에 같이 있어야 될 상황인데 그 사람이 싫다. 그러면 괴로워지죠. 싫어서 안 만날 수 있는 상황이라면 싫으면 안 만나면 되요. 법문은 여기 와서 듣고 싶은데 옆에 앉은 사람은 꼴 보기 싫다. 이러면 모순이 생긴다 이 말이오. 자~ 그럴 때 괴로워진다. 그래서 상황이 싫어하지만은 함께 있어야 될 상황일 때는 싫어함에 속박 받지 않는다. 싫다는 걸 놔 버린다. 좋아하지만은 그렇게 행하게 되면 나한테 손해가 온다. 그러면 좋아하는 감정에 속박을 받지 않는다.
즉 싫어하고 좋아하는 것에 구애를 받지 않는다. 그러면 더 자유로워진다. 이해는 되죠? 그 얼마나 좋은 일이오. 이게까지는 좋아하면 하고 싫어하면 안하고 이것만 좋은 건줄 알았는데. 그런데 살다보면 좋아한다고 할 수가 없고, 싫어한다고 안할 수가 없는 상황이 처하다보니까 인생이 늘 괴로워지고 불평불만이 쌓였는데. 그럴 때 싫어함에 구애받지 않고 좋아함에 구애 받지 않으면 얼마나 자유롭겠는가.
나는 김치를 좋아한다. 나는 밥을 좋아한다. 나는 뭘 좋아한다. 그럼 좋아하는 것 드세요. 좋아하는 거 안 먹는 게 수행인줄 알았어요? 좋아하는 거드세요. 싫어하는 거 안 먹으면 되. 그런데 외국에 가서 밥도 없고 김치도 없다. 내 좋아하는 거 없으니까 안 먹는다. 그러면 건강을 해친다 이거야. 굶어서. 그럴 때 싫어함에 구애받지 마라 이거야. 뭐든지 먹어라. 좋아한다고 많이 먹어가지고 위가 확장이 되거나 배탈이 난다. 그럴 때는 내 건강을 해친다 이거야. 그럴 때는 좋아하지만은 먹지마라 이거요.
그게 어려운 얘기요? 싫은데 어떻게 먹어요? 먹지마라. 싫은데 누가 먹으라 그래. 그 싫은 거 보다는 지금 배고픈 게 더 중요하고, 그 좋은 거 보다는 배 아픈 게 더 중요하니까. 좋아하지만 먹지마라. 싫어하지만 먹어라. 이거 아니오. 그게 뭐 어려운 일이에요? 어~ 그걸 어떻게 합니까? 하지마라 그럼. 내가 볼 때는 너무나 쉽고 너무나 당연하고 지혜가 바늘 끝만 이라도 있으면 누구나 다 그렇게 할 수 밖에 없는 일인데. 그걸 가지고 어떻게 하느냐? 어떻게 하느냐? 이래.
내가 여기 한국에 와서 라면만 먹고 국수만 먹고 그럽디까? 입에도 안데 그런 건. 그런데 인도가면 그게 최고급이야. 딴 거 보다 그게 제일 좋아. 맨 그것만 먹고 있어. 지난 한 달 동안 맨 국수 삶아가지고, 아무것도 안 넣고 맨 국수 삶아, 물에 건져 그냥 먹었어. 점심때. 그걸 왜 먹나? 이러지. 상황이 그런데 그거라도 먹지 어떡할 거야. 그것도 맛있다니까. 그럼 여기와도 그거 맛있다고 자꾸 먹더나? 안 먹지. 그러니까 좋고 싫고 에 구애받지 마라는 거는 좋아하는 건 무조건 안하고 싫어하는 건 무조건 하라는 뜻이 아니다 이거야.
내 좋고, 내 싫고 에 감정보다는 주어진 상황을 더 중요시 하면 인생이 자유로워지는 거요. 그러니까 아이들이 부족하면 미운 애라도 가르쳐야 될 거 아니야. 그런데 자기가 제자로 가르치면서 미워하면 누구손해다? 내 손해잖아 그지? 그러니까 그런 감정에 너무 구애를 받지마라. 그런데 애들이 넘쳐나. 누굴 잘라도 잘라야 되. 그럴 땐 미운 놈 잘라. 아무 문제도 없어. 그렇다고 수입이 주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잘못되는 것도 없잖아. 남자친구도 하나 없어서 내~ 엄한 남자 찾아다니는 주제에는 적당한 거 하나 잡아서 하면 되 그냥. 그런데 열 남자가 나를 따라 다닌다. 그럼 제일 좋은 거 골라. 아무 문제가 없어. 그거 뭐 어려운 일이라고 그래?
그런데 해결이 안됐어요? 좋고 싫고를 무조건 버려라가 아니라가 좋고 싫고 에 구애받지 마라. 이 말 이해가 되요? 담배 피우고 싶으면 피우세요. 그런데 건강을 해치거나, 다른 사람이 항의를 하거나, 이렇게 되면 그러면 자기 건강을 헤쳐가면서 남이 싫다는 거 우겨가면서 담배를 피울만한 가치가 있느냐는 거요. 친구가 다 떨어져도, 마누라가 도망을 가도, 애가 죽어도 나는 피우겠다. 그럼 피우세요. 그냥 피워서 가족이 암이 걸렸다. 가족이 아프다 하면 후회를 할 거 아니오. 그 혀끝에 스치는, 목구멍의 갈증. 거기에 집착해가지고 그렇게까지 나의 건강을 해치고 남을 괴롭힐 이유가 없잖아요.
그런데 그 사람이 담배를 피워도 건강에 아무 지장이 없다. 등소평 이처럼. 그죠? 90도 산다. 피우세요. 그러니까 연애하고 싶으면 하시고. 그런데 후회는 마라 이 말이오. 어떤 우리들의 욕구, 하고 싶다, 하기 싫다. 이 욕구를 따르면 뭐가 있다? 과보가 있다. 이건 아셔야 됩니다. 아시겠어요? 하고 싶다, 하기 싫다 하는 이 욕은 반드시 과보가 따른다. 인연의 과보가 있다. 그 과보를 기꺼이 받아들여라. 그리고 그 과보가 싫거들랑 욕구를 놔라. 버려라. 부처님 가르침이 그런 얘기에요.
욕구가 나쁘다. 이런 얘기가 아니라. 과보가 따르니까. 우리는 어떠냐? 심리가. 하고는 싶고 과보는 싫고, 하기 싫은 건 하기는 싫고 그 과보는 뭐하다? 받고 싶고, 일어나긴 싫고 돈은 벌고 싶고, 공부는 하기 싫고 대학은 가고 싶고. 그죠? 담배는 피우고 싶고 건강은 안 해치고 싶고. 이렇게 안 된다는 거요. 그러니까 자기에게 손해가 날 때는 하고 싶더라도 멈춰야 되고. 자기에게 이익이 될 때는 하기 싫더라도 어떻게 해야 된다? 행해야 된다. 인생살이 실제로 욕구가 모든 게 아니다 이거야.
그런데 우리는 모두 다 욕구에 매어있다. 그래서 욕망의 노예라 한다는 거요. 그래서 자기를 헤치는 행위도 한다 이거야. 노예 짓을 할 때는. 그래서 욕망의 노예가 되지 마라 이러죠. 그게 어려운 일이오. *** 화가 낮다. 얼마나 당연한 얘기다. 그렇게 하면 나한테 좋겠구나. 옳거니 이렇게 되든데. 욕구를 어떻게 절제하라는 얘기입니까? 스님은 욕구가 없습니까? 이래. 도대체 무슨 소린지 모르겠어.
그 다음 또 뭐라고? 보시는 하기 쉬운데 뭐는 하기 어렵다고요?
싫은데 뭣 때문에 잘해줘? 희한한 고민 다 가지고 있어. 좋은 사람한테 잘 해줄 것도 다 못해주는데. 뭐 싫은 사람까지 골라서 잘해줄려고 그래? 싫은 사람한텐 잘해주지 마라. 그런데 그 싫은 사람이 중요한 나하고 이해관계가 걸렸으면 어떻게 해야 될까? 싫어도 해야 되겠지. 안 그래요?
예를 들면 정토회에 행자가 됐다고 한 번 해 보자. 내 그 상황은 모르니까. 사무실에 3명이 근무한다. 그런데 한사람은 싫고 한사람은 좋다. 그러면 좋은 사람한텐 잘해주고 싫은 사람한텐 못해줬다. 그 정도야 별 문제가 없으면 괜찮은데. 이게 잘 안 해주는 사람이 그것으로 인해가지고 불평이 많다. 그래서 스님한테까지 얘기했다. 한 사무실에서 셋이 근무하면서 쟤는 자꾸 사람을 차별해 내부에 단합을 해칩니다. 이러고 문제가 된다. 그러면 내가 싫은 감정에 치우침으로 인해서 우리가 이루고자하는 목표달성에 장애가 된다 이 말이오. 그럴 때는 싫은 감정이 지나치게 치우쳐서는 안 된다.
왜? 그 싫어함이 나를 헤치기 때문에. 그럴 때는 공평하게 대해야 된다. 그러면 이렇게 얘기하겠죠. 어떻게 좋은 사람하고 싫은 사람하고 공평하게 대해 집니까? 잘 안돼지겠지. 팔은 안으로 굽는다고 뭔가 이쪽은 잘해주고 이쪽은 못해주겠죠. 그죠? 그래서 더 근본적으로 공부를 해 들어가면 이 좋다거나 싫다거나 하는 것이 내 감정인데. 내가 어쩔 수 없는 내 감정이에요. 자꾸 첫눈에 좋아 보이고, 자꾸 뭐 해준 것도 없이 미워 보이는데 내가 어떡하란 말이냐? 맞아요. 그런데 내 감정이라는 것이 형성되어진 거예요. 형성되어진 거.
즉 내가 된장찌개 맛을 탁 맡으면 흡~ 하면서 군침이 탁 놀고, 카레냄새를 맡으면 구역질이 탁 나면 이거는 어쩔 수 없는 거 아니냐 하지만. 이것은 내가 어릴 때 이게 길들여져 있고 이것은 경험이 없기 때문에 형성된 거요. 그 맛, 그 냄새가 본질적으로 그런 거는 아니다. 그런데 우리는 된장찌개는 아주 구수한 냄새고 카레는 냄새는? 무슨 냄새는 나쁜 냄새다 하는 거는 나로부터 일어난 건데도 불구하고. 뒤집어서 그 바깥에 있는 그거에 좋고 나쁨이 있다고 내가 생각한다. 이것이 전도 몽상이다. 이게 잘못 알고 있다 이거야. 이것이 나로부터 형성되어, 나의 업식에서 그렇게 반응하는 거다 이거야.
똑같은 빛깔인데 내가 어떤 안경을 끼고 있느냐에 따라서 그것이 내 눈에 달리 보인다. 그래서 나한테 있다 이거야. 좋고 싫음이, 옳고 그름이, 선과 악이. 다 나로부터 빚어지는 거다. 바깥으로부터 빚어지는 게 아니다 이거야. 바깥으로부터 빚어진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좋아하고 싫어하게 되는데 그것이 나로부터 빚어진다. 하면 이 좋고 싫고 가 나로부터 일어난 거지 바깥 그 사람의 문제가 아니다. 그 사람은 좋은 것도 아니고 싫은 것도 아니고, 옳은 것도 아니고 그른 것도 아니다.
이것을 의식교리로는 뭐라고 그런다? 제법무아. 금강경에서는 범소유상이 개시허망. 반야심경에서는 오온개공. 보편적으로 대승불교에서는 일체개공. 이렇게 말한다. 그것이 나로부터 있다. 바깥에서는 좋고 싫음이, 더럽고 깨끗함이 없다. 이게 공. 그런데 좋고 싫음이 있다 이거야. 그 있는 것은 나로부터 있다. 이걸 뭐라 한다? 일체유심조. 이런 뜻이에요. 얼마나 쉬워? 그죠? 너무나 확실하고 분명하잖아.
그러니까 이 좋고 싫고 에 끄달리면 나한테 손해가 오니까. 이 좋고 싫고 가 바깥에 있는게 아니라 나로부터 일어나니까. 이게 내 업식으로부터 일어나는 거란 말이야. 이것이 본질적으로 있는 게 아니라 어떤 내 환경에 성장하면서 형성된 습관에 의해서 이루어진 거란 말이야. 어떤 사람은 담배 냄새만 맡으면 콱~콱~ 구역질이 나고. 어떤 사람은 맡으면 그냥 휴욱~ 해서 좋아하고. 그것이 담배에 있는 것도 아니고 이게 나의 본래 있었던 것이 아니라. 그런 습관이 들어서 반응하는 거다.
그러니까 이 감정은 업식, 업에 의해서 형성된 거야. 이걸 업력이라 그래. 여기 매달려서 끌려 살면 인생이 마치 남에게 끌려 사는 노예나, 돈에 끌려 사는 노예나, 자기 업식에 늘 우리는 끌려 산다. 이 욕망의 노예고, 감정의 노예로. 감정 자체가 나쁜 게 아니라 거기 묶여 있으면 그 감정에 노예가 된다 이 말이오. 그러니까 그걸 통제를 해야 된다. 억누르면 억누르면 자꾸 작용을 한단 말이야. 그래서 이게 본래 공한 줄을 깨닫는다. 거 왜 그럴까? 왜 화가 날까? 왜 괴로울까? 왜 저건 예쁘게 보일까? 저 사람한테 있을까? 아니다. 나에게 왜 그런 감정이 더 날까?
그래서 자기를 깊이 관조하고, 관조하고, 관조하고, 관조해보면 그것이 자신의 습이란 말이오. 그 업이 그렇게 감정표현이 되고, 그렇게 언어표현이 되고, 그렇게 행동을 하는 거란 말이오. 이게 근본적인 밑바닥에 있는 덩어리를 뭐라고 한다? 아뢰야식이라 그러고. 그것이 무의식적으로 드러나는 거를 말라야식이라 그러고. 그것이 말로, 생각으로, 자기가 인식할 수 있는 식으로 나타나는 게 이게 6식이란 말이오.
나도 그래요. 예쁜 놈 잘해주고 싶고, 미운 놈 못해주고 싶고. 그런데 그렇게 하면 내가 하고자하는 성취를 못하잖아. 내가 이루고자하는 목표를 달성하려면 그런 식으로 대응을 하면 누가 보시를 하겠어? 돈은 그 미운 놈이 많이 가지고 있는데. 일은 그 미운 놈이 일을 잘하는데. 내가 좋아하는 거는 착하기는 하지만은 능력도 없고 재주도 없는데. 그래서 자기감정을 깊이 관조하고, 거기에 노예가 되지 않으려고, 그걸 억압하는 게 아니라 그것을 깊이 관해서 거기로부터 자기가 자유로워지는 거요. 그래서 수행을 한다 이 말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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