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륜스님/즉문즉설(2013)

[즉문즉설] 제389회 갈등하는 마음

Buddhastudy 2013. 5. 3. 21:52

출처 YouTube

       

이럴 때 제일 좋은 방법이 있습니다. 이럴 때는 동전을 딱 던져가지고 동전이 한쪽으로 정해, 가면 되고, 손바닥에 침을 붙여 딱 때려가지고 튀는 데로 정해놓고, 가면 된다. 쉽긴 이런 게 제일 쉬워요. 이런 거는 생각할 필요가 없이, 그냥 하는 게 제일 나아요. 그럼 여기 갈까? 저기 갈까? 할 때는 이것은 욕심이오. 그럼 침을 딱 때려가지고, 동전을 딱 던져서 그냥 가버려라. 이 말은 욕심을 버려라 이런 얘기요.

 

그러니까 두 개를 다 갖고 싶은 데서 일어나는 거다, 이 말이오. 두 개를 다 갖고 싶은 것에서 일어나는 거다. 그 망설인다는 것은 두 개를 다 갖고 싶어 해요. 그런데 현실이 두 개를 다 가질 수 없는 조건이 되어 있어. 그러니까 현실에 깨어 있어야 되요. 그럴 때는 선택을 해야 된다. 선택을 할 때, 또 망설여지죠. 어느 게 더 나을까? 그게 욕심이란 말이오. 어느 게 더 나을까? 좋게 말하면 어느 게 더 나을까? 하는 효율을 따지는 것 같지만은, 그 어느 게 더 나을까? 하는 속에는 두 개를 다 갖고 싶은 마음이 밑에 있기 때문에 그래요.

 

그러니까 이런 것은 한 시간을 생각해도 결론이 안 납니다. 왜냐하면 학회가 별로 중요한 게 아니고, 법문이 훨씬 중요하다고, 비중이 법문이 높아 졌으면 이거는 고민거리가 안 되고, 법문이 아무리 좋은 법문이라 하더라도, 학회에 자기가 발표자로서 선정이 되어 있어도 별로 고민거리가 아니고. 그러니까 이게 양쪽 다 가면 좋고, 양쪽 다 빠져도 될 상황이에요. 뭐 법문 안 들으러 왔다고 스님이 뭐라 그럴 일도 아니고, 학회에 가면 좋지만 안 간다 해서, 거기서 뭐 당장 경제적으로 손실을 보거나, 개망신을 싸거나 그런 일은 아니다 이거야.

 

그러기 때문에 여기에 망설임이라는 게 생기는 거다. 이럴까? 저럴까? 이럴까? 저럴까? 이렇게 망설임이 생기는 거다. 망설임이 생긴다는 것은 이것과 저것의 비중이 어떻다? 비슷하다. 비슷하기 때문에 어느 걸 선택해도 어때요? 큰 문제가 없다. 그러기 때문에 그거는 시간을 끌 필요가 없이 동전을 딱 던져 가지고 그냥 가버리면 돼. 이게 동전을 던진다 하니까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지만은, 그 말은 그건 아무거나 선택을 해 버려라, 이런 얘기요. 망설이지 말고.

 

결혼을 할까? 말까? 이 남자하고 할까? 저 남자하고 할까? 이럴 때도 마찬가지요. 이럴 때도 동전 딱 던져 가지고, 동전 나오는 데로 가면 되요. 그거 신중을 기한다고 신중에 신중을 기대한다는 게 욕심을 못 넘는다는 얘기요. 동전을 던져, 딱 던져 가버린다는 얘기는 탁~ 놔버린다는 거요. 그래서 결정을 못하면 스님이 결정해 주기를 원하죠. 나는 기도 하세요이래. 기도문을 주고 한 100일만 기도해 봐라. 100만 기도해 봐라 하는 것은? 욕심을 버려라 이런 얘기요. 욕심을 버리면 완연하게 길이 열린다.

 

자기가 욕심이 탁~ 버려져서 지혜롭게, 스스로 완연하게 판단이 되든지, 그렇지 않으면 두 남자 중에 100일 기도 중간에 한 남자가 결혼을 해 버렸어요. 그러면 선택은 저절로 되요? 안 돼요? 선택은 저절로 되요. 선택이 이렇게, 내가 고민을 안 해도 100일 기도 하는 동안에 선택이 저절로 되게 돼 있어. 그래서 그런 거 별로 신경 쓸 거 없는 거요, 사실은. 이거는 노하운데 오래 좀 살아봐요. 자기 인생을 선택할 때도 아주 가볍게 선택하는 거고.

 

그러기 때문에 상담할 때 아주 쉬워요. 굉장한 걸 가지고 와서 상담을 해도 딱~ 들어보면 이 사람하고 결혼할까? 말까? 이럴 때 이 사람하고 결혼하는 게 90% 비중이 높은 사람은 나한테 물으러 오나? 안 오나? 안 와. 이 사람하고 결혼 안하는게 좋다고 90% 결론 난 사람도 물으러 안 와. 할까? 말까? 이거 할까? 저거 할까? 할 때는 거의 반반이기 때문에. 물으러 오는 거요. 그런데 내가 이 사람하고 해라. 하고 누르면 이 사람은 돈이 없는데요.’ ‘저 사람하고 해라.’ 하면 '그 사람은 성질이 나쁜데요. 키가 작은데요.’ 나오든지 그러죠.

 

이쪽으로 한번 눌러보고, 그럼 이렇게 하지. 이쪽을 딱 눌러서 아 부정적으로 나오면, 그럼 이쪽으로 하면 어때요? ~ 그쪽은 그거대로 문제요. 그런데 이렇게 딱 눌릴 때 그게 낫겠죠?’ 이렇게 나와. 그러면 실제로는 이거는 내가 선택해 준 게 아니고, 거기에 자기가 사실 한 6, 70% 비중이 있었는데 약간의 위험 부담이 있었어요. 그래서 물으러 왔기 때문에 딱 해주면, 그냥 받아 들여 버려. 그러니까 위험부담을 좀 분산하자는 얘기거든요. 스님도 책임을 좀 져라. 책임을 져주면 되요. 나중에 원망을 좀 들어주면 돼.

 

그 다음에 이렇게 하면 저렇게 얘기하고, 저렇게 하면 이렇게 얘기하고. 다섯 번을 물어도 다섯 번 결론이 안나요. 그러면 이거는 5050이에요. 그러니까 자기 결론이 안나 있기 때문에 스님이 아무리 조언을 해도 즉시 결론이 안 납니다. 스님이 이렇게 딱 얘기하면 스님 말을 탁 받아들이고, 탁 결론이 날 때, 내가 잘 선택해주기 때문에 결론이 나는 게 아니오. 본인도 거기 무의식적 비중이 높아있기 때문에 그냥 받아들이는 거요.

 

그러니 여러분들 이게 내가 결정해 주는 게 아니에요. 결정은 자기가 하는 거요. 그러니까 이걸 듣고, 내가 이걸 어이 결정해 줘야 되나? 고민하는 상담자를 많이 보는데, 그건 경계에 끄달린 거요. 왜 그 사람 복잡한데 내가 뭐 하러 거기 끼어들어? 와 머리를 뭐 하러 거기 쓰노? 그냥 얘기할 때, 나는 부처님하고 그냥 노는 거요. 다 듣고, 다 자기 얘기하고, ‘아이고, 오늘 스님하고 얘기하니 시원하다’, 하고 가버리는 사람도 있어. 결론을 내 줄 필요가 없어.

 

그래서 상담은 사실은 굉장히 쉬운 거요. 상담이 왜 어려우냐 하면 여러분들은 내가 뭔가 해 줄 수 있다고 믿기 때문에 이게 문제인 거요. 그래서 힘든 거요. 남의 인생에서 해줄게 아무것도 없어. 해 줄 수 있는 유일한 건 들어주는 거요, 그냥. 귀담아 들어 주는 거요. ~ 그러냐? 그래서? 그래서? 이렇게 들어주면 끝나는 게 50%. 그 다음에 위험부담을 조금 같이 좀 책임지자하고 찾아온 사람 그래,’ 책임 좀 져주면 되는 거요. 그 다음에 이러면 저게 문제고, 저러면 이게 문제고. 그런 사람은 동전 하나 줘서 결정하세요. 그러면 돼.

 

그런 사람은 그게 밖에 있는 게 문제가 아니라, 자꾸 질문을 이렇게 저렇게, 이렇게 저렇게 하는 거는 그게 누구 문제라는 거를 알게 하기 위해서, 자기 문제라는 거요. 상대편 문제가 아니고, 지금 내 문제라는 거를 알아차리게만 해 주면 돼. 그러니 자기 문제니까 중요한과제가 뭐다? 수행을 하는 거요. 이 마음을 닦는 게 중요한 거요. 그러면 뭐 어려운 일이 있어? 그러니까 갈등이 탁 일어나면, 아이고 내가 두 개 다 먹고 싶어 하는구나. 이렇게 봐도 되요. 아시겠어요?

 

저도 그런 생각이 딱 일어나면 그래. 그땐 하나를 딱 정해버리고, 다른 하나를 놔 버려야 돼. 나도 지금 머리에 편두통이 아주 심해요. 눈살이 어때요? 지금 눈을 제대로 못 뜨잖아. 자꾸 이렇게 팍팍 찌르니까요. 눈이 나도 모르게 감긴단 말이오. 그러면 법문시간이 다 되가는데 편두통이 심하니까 어때요? 하지 말까? 이런 생각이 든다 이 말이오. 그만 둘까? 이런 생각이 든다, 이 말이오. 그럴 때 그만 둘까? 이런 생각이 드는 거는 아직도 법문 할만 할만하다는 거요? 못할 만큼 아프다는 거요? 그렇죠.

 

되게 아프면 그만 둘까? 안 둘까? 이런 건 고민도 안 돼. 그냥 못하는 거지. 아시겠어요? 병원에 가버리는 거지. 그런데 벌써 그만 둘까? 이런 생각이 드는 거는 아직도 견딜 만 하다 이 얘기에요. 그러니까 딱 생각을 바꿔가지고 그냥 와서 해버리죠. 그럼 그런 번뇌가 왜 일어나느냐? 통증이 심하니까 순간적으로 아이고, 도저히 안 되겠다.’ 이런 생각이 드는 거요.

그런데 마음이 중요하다는 게 뭐냐? 아무리 여러분들 피곤하고 아프다 해도 옆에서 폭탄이 떨어지면 아이고, 나 아파 도저히 못 가겠다.’ 이럽니까? 언제 어팠드냐 합니까?

 

마음이라는 건 어느 정도는 다 잡을 수가 있잖아. 그죠? 그러니까 그 상황이 다잡을 수 있는 거요. 그런데 만약에 어떤 사람하고 상담약속을 했거나, 그냥 일대일로 약속을 했다, 이랬으면 망설임이 조금 더 크겠죠. ? 그쪽을 취소해도 되니까. 그럴 때는 아이고, 약속을 해놓고 지키긴 지켜야 되는데 몸은 아프고이렇게 번뇌가 일어난다 이 말이오. 그런데 이렇게 대중을 많이 약속을 해 놨을 때는 어때요? 좀 아파도 그런 생각을 안 한다 이 말이오. 해야 된다. 결론이 나있으니까.

 

그러니까 이것은 다 그거 따라가지고, 상황 따라서 번뇌가 일어나는 거요. 아마 개인적인 약속을 내가 해 놨으면 오늘 좀 머리가 왔다 갔다 했을 거요. 요럴까? 저럴까? 전화해서 오지 마라 그럴까? 어쩔까? 이렇게 번뇌를 일으킨단 말이오. 그러니까 그런걸 아셔서, 이게 딱 갈등이 일어나면 , 내가 이런 상태에 놓여있구나.’ 그래서 일상적으로는 가법 게 하나를 선택하고 하나를 놔야 된다. 학술모임이야 맨날 하는데 스님 법문을 들어야지 이렇게 딱 정리하든지.

 

이제까지 스님법문 안 듣고도 살았는데, 한 번 안 듣는다고 뭐 일이 생기겠냐? 이러고 딱 정리하고, 학술모임에 가든지. 이렇게 해야 되는데. 우리 중생은 어떤 거냐 하면, 이게 망설이고, 여기 와서도 ~ 학술모임에 갈 걸하는 생각이 들거나, 학술모임에 가선 또 어때요? 아이고 뭐 별거 아닌데, 여기 법문이나 들으러 갈 걸. 이렇게 후회가 되는 거요. 이 법문이 신통치 않으면 온 게 후회가 되고, 거기 가 봐도 딱 가보면 이 세상에 없어서 안 될 일이 어디 있어요. ‘아이고, 이 정도 일줄 알았으면, 법문이나 들으러 갈걸이렇게 일어나는 거요.

 

그래서 두 개를 다 움켜쥐려고 하면 어느 걸 선택을 해도 후회가 됩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놔버려야 되요. 왔었을 때는 여기서 법회가 없더라도 후회를 하면 안 돼. 선택을 가볍게 해라 이 말이오. 가볍게 해라하는 말하고, 함부로 해라 라는 말하곤 틀리는 거요. 가볍게 해라. 인생이 그렇게 입 다물고, 각오 하고 할 만한 일이 있을까? 글쎄. 여러분들은 그런 일이 있다고 생각하는데. 그런 일 많아요? 인생에 그런 일 없어요. 침 튀겨 결정하는 게 제일 좋아.

 

내가 굉장히 일을 신중하기 때문에. 옛날에 특히 학생운동을 지도하고 할 때는 머리가 조직적으로 계획적으로 일을 하기 때문에. 그런 걸 주위에서 다 알잖아, 그죠? 내가 머리를 깎아 놓으니까, 내가 엄청나게 머리를 기르고 하다가 안 돼가지고, 엄청나게 머리를 생각해 서 깎았구나. 이렇게 다 생각을 해. 그래서 오해가 많아요. 그런데 내가 머리를 깎을 때는 진짜 이발소 가서 머리 깎는 것 보다 더 쉽게 깎았어요.

 

그러니까 인생에 이게 정말 중요한 거 아니냐? 하등 중요한 거 아니에요. 뭐 옷을 이래 걸치고 스님이라고 불리고 사나, 내가 안 그렇다고 사나, 여러분들은 스님이 되고 안 되고, 인생이 180도 틀리는 인생을 생각하니 그러지. 저로서는 그것은 내 인생에 아무런 왔다 갔다 할 일이 없어요. 지금 내 머리 길렀다 해도 이 길을 갈 거고, 결혼을 했다 해도 이 길을 갈 거고, 여기에서 한발도 다른 길로 갈 생각이 없단 말이오. 그러기 때문에 이 외모는 그렇게 중요한 게 아니란 말이오.

 

그러니까 스님과의 문답을 통해서 딱 인도 간다고 인사하러 갔더니, “너 나가서 활동한지 몇 년이나 됐지?” “20년째네요. 올해.” “그때 20년 복 지으라고 얘기 안 했나?” “~ , 스님. 그때 그런 말씀하신 거 같네요.” “밖에서 그만 활동하고 안에 와서 활동을 해라.” 그러니까 분별 심이 딱 생기죠. 밖에서도 활동 잘하고 있습니다. “굳이 안에 와서 활동할게 뭐가 있습니까? 이게.” 여러분들도 출가해라 이러면 뭐라 그래요? “전 출가 했습니다.” 이런 사람 있어. ‘마음으로 다 출가 했습니다.’ 그러니까 밖에서 그만 활동하고, 안에서 활동을 해라. 안에 들어와라. 이 말은 머리를 다시 깎아라. 이 말 아니오. 그죠?

 

그러니까 내가 그럴 필요가 뭐가 있느냐? 이 말이오. 그런데 보통사람 같으면 그게 효과적입니까? 아닙니까?” 이래 얘기하는데, 스승과의 대화니까, 도전적이죠. 서로가. 내 물었어. “도의 안팎이 있습니까?” 자꾸 안에 와서 활동하라니까. “도에 무슨 안팎이 있습니까?” 이랬어. 도에도 안팎이 있습니까? 이 말이오. 그러니까 스님이 없지.” 이래. 그럼 누가 이겼다? 내가 이겼지. 그지? 딱 이 한마디에 내가 스님의 입을 막았다. 더 이상 얘기 못하게. “그런데 왜 자꾸 안에 들어와서 활동 하라 그럽니까?” 이러면 뭐라 그러겠어? 스님이. 도에는 안팎이 없다고 했는데,

 

그러니까 스님 하시는 말씀이 , 이놈아, 니가 밖을 고집하니 안이 생기지 않느냐?” 이러는 거요. 그런데 그때 내가 나를 탁 본거요. 도에 안팎이 없다라는 논리를 가지고, 뭘 내가 고집하고 있다? 밖을 고집하고 있는 거요. 시집 갈 거냐? 안 갈 거냐? “아이고 스님, 뭐 시집가도 후회고 안가도 후회라면요.” “그래.” “그러니까 함 가보죠, . 보통 이러지. 그러니까 이 때 시집가도 후회, 안가도 후회는 그냥 말이고, 그걸 어디다 갔다 붙인다? 시집가고 싶은데다가 이유를 갖다 붙이는 거요. 가도 후회 안가도 후회. 그러니까 안 가죠. . 이래 말하는 사람 없어.

 

바로 내가 그렇게 안팎이 없다고 늘 내가 주장하고 그걸 가지고 무기로 삼고, 안팎이 도에 무슨 안팎이 있냐? 승속이 어디 따로 있느냐? 이런 주장을 할 때는 주로 누가 그런 주장을 해. 밖에 있는 사람들이 그런 주장을 하는 거요, 아시겠어요? 스님이 승속이 따로 없다. 이런 주장 잘 안 해요. 스님이 승속이 따로 없다. 우리 같이 놀자. 이런 말 잘 안 해요. 거사가 스님, 뭐 승속이 따로 있습니까?” 이러지. 그지?

 

그러니 승속이 따로 없다. 안팎이 따로 없다는 그 말의 도를 빌려서 밖에 있는 것을 합리화하는 논리를 딱 세우고 있는 거요. 그걸 딱 찌르니까 !” 금방 탁 놔버리지. 그럼 뭐가 되요? 깎죠 뭐. 이렇게 된 거요. 그래서 깎은 거요. 돌팔이인 거요. 거기에 무슨 인생을 어떻게 계산하고, 뭐 이런 건 계획할 여가가 없어. 그런 분상에서는 무슨 계산이라는 게 없는 거요. 그럼 스님이 되고 안 되는 것도 계산 없이 하는데, 여기 법문 오고 학술회의 가는 거까지 계산할게 뭐가 있어? 그냥 발길 가는 데로 오든지,

 

조금 그래도 안 되거든 동전 하나 호주머니에서 꺼내가지고, 딱 던져서 밟히는 데로 가면 된다. 가볍게 생각을 해라. 가볍게. 어려울 때 일수록 가볍게 받아들이세요. 가볍게. 그런데 그게 함부로라고, 혹시 오해를 해서 받아들이시면 안 돼요. 내가 중 되는 걸 함부로 했다, 이렇게 생각하면 안 돼요. 인생의 선택을 가볍게 할 수 있어야 돼. 별거 아니라니까, 인생이라는 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