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건 나도 대답할 수가 없는 게, 그때 용을 쓸 때마다, 어떤 때는 이렇게 쓰여지고, 어떤 때는 저렇게 쓰여지고 하기 때문에, 심이라고 하는 것은 이런 뜻이다, 하는 정의가 없어요. 어떤 때는 느낌을 말했다가, 어떤 때는 의지를 말했다가, 어떤 때는 생각을 말했다가, 어떤 때는 알음알이를 말했다가. 이렇게 바뀌는 거요. 다만 불교에서는 우리들의 육신과 몸과 마음. 보통 이렇게 나누죠. 정신과 육체, 이렇게 나누는데. 다른 철학이나 다른 종교에서는 육신을 떠난 정신, 육체와 분리된 정신. 이런 개념으로 많이 씁니다. 그런데 불교에서는 원래 불교는 그런 개념을 안 씁니다.
마치 N극과 S극이 그 작용의 면에서 보면 한쪽은 N이고 한쪽은 S극이지만은 그건 분리할 수가 없다. 그것처럼 우리들의 육신이라는 것과 또는 정신, 마음과 몸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의 결합되어진 상태에요. 그런데 이것을 불교에서는 마음과 몸, 이렇게 둘로 나누지 않습니다. 이것을 다섯으로 봅니다. 그래서 이것을 색-수-상-행-식. 이렇게 말해요. 이걸 오온이라 그러죠. 다섯 가지의 모임이다. 그러니까 이 다섯 가지가 모여서 작용하고 있는 상태가 오늘 우리들의 삶이고, 이 다섯 가지 작용이 흩어져버리면 어떠냐? 삶이라고 하는 것이 사라지는 거요.
그러니까 우리가 말하는 이 필링이라고 하는 것은 몸에선 감각이죠. 여기선 몸을 기초로 하고 있어요. 우리들의 생각이라고 하는 것도 그 정보가 뇌에 저장이 되 있다 나오는 거죠. 이것도 몸을 기초로 하고 있어요. 그리고 우리가 어떤 의지를 불러일으키면 그 의지는 그 결과가 몸에 저축이 되요. 축적이 된다 이 말이오. 그러니까 이것을 분리해서 보지 않는다, 이 말이오. 그러면 이것을 어떻게 보는 게 진실하게 보는 거냐? 하나의 쌓임으로 보고, 하나의 흐름으로 보는 거요.
마치 우리가 강을 보면 강물이 흐릅니다. 오늘도 가 봐도 그 강이 있고, 내일 가 봐도 그 강이 있지만은, 그 물은 같은 물은 아니에요. 흘러갑니다. 그것처럼 우리의 몸도 있는 그대로 여실히 관찰하면 몸은 흐르는 강물처럼 계속 흘러갑니다. 모양은 어제거나 오늘 거나 똑같은 거 같은데, 그 안에 있는 원소의 구조는 어때요? 세포가 때나 소변으로 나가고, 새로 먹은 게 쌓이고. 계속 흘러가는 거요. 마찬가지로 우리의 의식도 계속 흘러가는 거요. 우리 감각도 일어났다가 사라지는 거요. 우리 생각도 계속 바뀌는 거요.
이렇게 흐름으로 본다. 흘러가는 건데, 그것이 항상 하는 것처럼, 흐르지 않고 항상 있는 것처럼 착각하기 때문에 집착을 하게 된다. 이렇게 감각은 일어났다가 사라지는 건데, 그것이 항상 있는 것으로 착각하고 집착하고 있기 때문에 실제는 그렇지 않는데 잘못 알고 있으니까 뭐가 생긴다? 고가 생기는 거요. 이렇게 흘러가는데, 흐르게 하는 어떤 주체가 있다고 우리가 지금 착각하고 있어. 강물을 흐르게 하는 어떤 주체가 있다.
누가 있어서 강물을 흐르게 한다? 이렇게 생각하는 게 있는데, 그런 거 없다는 얘기요. 그냥 강물은 흐른다. 이렇게 오온의 쌓임에 의해서, 모든 것이 다 이렇게 흘러가는 거요. 그 흘러가는 것의 뒤 안길에 별도의 주체가 있지 않다. 있다고 보는 게 아트만 사상이오. 작용만 있지, 작용 뒤 안에 어떤 것이 별도로 있지 않다. 이게 무아설이오. 결론부터 말씀 드리면 오늘날 불교인들은 99%가 힌두이즘적 불교를 하고 있어요. 즉 아설에 기초를 두고 있다. 이렇게 말할 수 있어요. 그래서 해탈이 어렵습니다.
그러니까 이렇게 흘러가요. 흘러가는 줄을 알아야 돼. 무상한 줄을 알고, 고인 줄을 알고, 무아인 줄을 알아야 돼. 이게 깨달음이요. 무상인 줄 알고, 무아인 줄을 아는, 고를 이렇게 듣고 지식으로 아는 게 아니라, 자기 몸을, 마음을 관찰해서, 실제로 그런 것을 체험을 해야 된다 이 말이오. 그래서 증득을 해야 되는 거요. 그러면 집착할래야 집착할 것이 없어집니다. 어느 순간에 딱 집착할 때는 착각을 하기 때문에 집착을 하는 거요.
저도 마찬가지고 여러분도 마찬가지고. 그냥 하나의 흐름만 있어. 그래서 삼법인이 뭐요? 제행무상, 제법무아, 일체개고잖아. 그걸 쉽게 말하면 무상, 고, 무아. 무상, 무아, 고. 이렇게 말해. 이게 근본교설의 가장 핵심이오. 그걸 이론으로가 아니라, 그걸 바로 자기가 몸과 마음을 관찰해서 그런 상태에 있는 걸, 자기가 여실히 몸과 마음에서 그걸 체험을 하는 거요. 그러면 집착할래야 집착할 것이 없어지는 거요. 흐르는 물을 아무도 잡으려고 하지 않는 것과 같다.
그러면 이 흐름이 멈추느냐? 그런 뜻이 아니에요. 그냥 흐르는 거요. 흐름을 흐름으로 보는 거요.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아까 일어나는 생각의 흐름도 잡잖아요. 빠진다는 거는 과거의 기억을 잡는 거고, 미래의 생각을 잡거나, 이 육신에 집착을 하거나, 이 몸에서 일어나는 감각의 좋고 나쁨에 집착을 하거나, 이런 것도 다 흐름을 잡는 거거든요. 그냥 일어났다가 사라지는 것 밖에 안 돼. 일어났다 사라지는 줄 알고 있으면, 그냥 흐름만 있다 이거야. 흐름만.
그럴 때 어디 집착이 붙을 근거가 있겠어요? 그런데도 우리는 순간순간 그런 걸 놓치죠. 그래서 여기 질문에 뭐가 마음이냐? 마음의 실체가 뭐냐? 이런 것은 아트만적 사고방식이오. 이러한 거 뒤에 진아라는 것이 따로 있다. 우리가 그걸 찾거나 그것만 발견하면 영원해 진다. 이런 영원 불멸설에 기초하고 있기 때문에 이런 생각이 나오는 거요. 다만 작용만 있는 거요. 이게 과학적인 태도죠. 이게 어떻게 작용하고 있느냐?
이게 바깥에서 경계가 부딪치면 무엇이 먼저 일어나고, 그 다음에 그것이 어떻게 다음으로 연결이 되고, 그게 어떻게 연결이 돼서 어떤 작용이 일어나느냐? 이게 바로 무명(無明), 행(行), 식(識), 명색(名色), 육입(六入) 또는 육처(六處), 촉(觸), 수(受), 애(愛), 취(取), 유(有), 생(生), 노사(老死)라고 하는 십이연기란 말이오. 이게 어떻게 구성이 되 있느냐? 색수상행식. 오온이란 말이오. 이게 어떻게 형성되는 작용이 일어나느냐? 눈이 있고, 빛이 있고, 보는 작용이 일어난다. 귀가 있고, 소리가 있고, 듣는 작용이 일어난다. 코가 있고, 냄새가 있고, 맡는 작용이 일어난다.
혀가 있고, 맛이 있고, 맛보는 작용이 일어난다. 몸이 있고, 대상이 있고, 감촉의 작용이 일어난다. 이게 12처설, 또는 18계설이라고 하죠. 쉽게 얘기하면 어떤 물질을 분석한다면 물질은 어떻게 구성 돼 있냐? 물은 어떻게 구성이 되 있느냐? 이건 구성의 문제요. 아~ 이건 산소하고 수소하고 결합해서 돼 있다. 그럼 이 물은 어떤 작용을 일으키느냐? 이건 높은데서 낮은 데로 흐르는 작용이 있다. 이렇게 물질에 대한 구성을 분석해서 구성에 대해서나 그것의 작용에 대해서 온전하게 이해하므로 해서 물을 우리가 필요한데로 유용하게 쓸 수 있는 것처럼.
이 몸과 마음을 온전하게 이해하는 것. 구성은 어떻게 돼 있고, 작용은 어떻게 하고, 어떻게 일어나고, 어떻게 되느냐? 이걸 온전하게 이해하는 거요. 그래서 이렇게 형성되어진 시기. 바로 여섯 가지 식. 이게 표면의식이고. 그것이 정보가 사라지지 않고 쌓여서, 저 창고에 하나도 빠짐없이 모여 있다. 그게 아뢰야식이오. 그 아뢰야식이 요즘 말하는 잠재의식이다. 무의식이다, 할 수 있겠죠. 바깥의 경계가 올 때, 이 필링이 왜 일어나느냐? 바로 무의식이 바깥경계에 반응을 일으켜.
그러니까 업식이 경계에 부닥치면서 업식에서 일어나는 반응이 필링이오. 쾌 불쾌. 그 쾌 불쾌에 이 행이 거기에 다시 반응을 하는 거요. 쾌는 좋다. 불쾌는 싫다. 그럼 이 좋다 싫다는 다시 또 의지가 거기에 반응을 일으키는 거요. 좋은 건 가지고 싶고 싫은 건 버리고 싶어. 그래서 말과 행위가 일어나는 거요. 일어나면 그 종자가 그 열매가 맺혀서 또 쌓여서, 또 창고에 쌓이게 된다. 그러니까 또 반응을 하니까. 엄격하게 말하면 우리 삶이라는 건 뭐다? 업의 흐름일 뿐이고, 여기 자유는 없어요.
어떻게 하면 이 흐름의, 이 속박된 윤회의 흐름으로부터, 내가 자유로워질 수가 있냐? 이걸 잘 알아야, 아~ 이게 좋다 싫다가 일어나도, 그 결과가 나쁘면 행하지 않는. 여기서 내가 행하지 않는 거요. 담배가 피우고 싶지만은 건강에 나쁘다 하고 알아서 끊어버리는 거요. 안 피우는 거요. 이게 계율이오. 그리고 그러한 반응이 일어날 때, 그러면 이렇게 피우고 싶다 하는 것은, 그 담배의 냄새에 쾌 반응이 몸에서 일어난 거요. 그걸 알아차려서 이 쾌 반응이 일어날 때, 내가 그것을 피우고 싶다로 감정개입을 안 시키는 거요. 그게 위빠사나에요.
그게 바로 소위 말하는 선정을 닦는 거다. 삼매란 말이오. 알아차림. 그렇게 해서 그러한 감각들은 일어났다가 사라져야 피우고 싶은 욕구가 어떻게 됩니까? 사라지죠. 그죠? 좀 있으면 또 욕구가 일어나고, 그걸 해 버리면 다시 사라지는데. 이것을 안 피워도 놔 놓으면 어때요? 한마디로 말하면 지랄을 하다가 상관을 안 해버리면 어때요? 사라져.
애가 막 장난감 사달라고 아우성을 칠 때 사주면 울음을 뚝 그쳐요. 그런데 안 사주면 한마디로 생강짜를 다 피워. 그런데도 계속 놔놔 버리면 어떠냐? 결국 멈춰. 사 줘서도 해결하는 방법이 있지만, 내버려 둬버리면 되. 그래서 서양에서는 애들 아홉 시 딱 되면 딱 잡아서 자기 방에 침대에 뉘어 버리지. 울던지 말든지 장난감만 던져주고 문 닫아버리는 거요. 우리는 거기에 개입하지만, 일체 개입을 안 하잖아요. 그럼 지가 실컷 울다가. 온갖 짓 하다가. 그러니까 누가 봐야 우는 것도 효과가 있지. 아무도 안보면 효과가 없다는 걸 애가 아나? 모르나? 알아.
그래서 엄마하고 같이 가다가 넘어져서 애가 무릎을 다치면, 죽는다고 난리지만은, 자기 혼자 어디 가서 넘어져 무릎을 다치면 주위에 아무도 없다면 조금 울다가 피가 줄줄 흘러도 그냥 옵니다. 나도 어릴 때 낫 갖고 요렇게 다니다 무릎을 촛대뼈를 꽂아버렸어. 아야 하고 댕겨 버렸더니 이만큼 팍 찢어져 버렸어. 피가 줄줄 나. 아무도 없어. 산에. 울고 있어야 돼? 아니지. 그러니까 쑥을 뜯어가지고 돌로 찢고 사리를 낫으로 쪼아, 껍데기를 벗겨 잡아매가지고 내려오는 수밖에 없단 말이오. 어떻게 할 거요?
그러니까 거기에 냉정이 있단 말이오. 알아차림. 즉 선정을 닦는 이유가 거기 있는 거요. 마음이 거기 뺏기지를 않아야 돼. 그럼 이게 치성했다가 사라지는 거요. 그럼 이 치성했다가 사라지는 걸 한두 번 경험하면 어때요? 이건 꼭 먹이를 줘야 사라지는 게 아니고 어떤다? 그냥 일어났다가 사라지는 거요. 놔 놓으면. 그러니까 다만 지켜보는 거요, 이젠. 전에는 끌려가서 먹이를 줘야 이게 해결이 됐는데, 이제는 안 주는 거요. 가만 보는 거요.
일어났다 사라지고, 일어났다 사라지고, 일어났다 사라지는 거요. 그러니까 여기에 이 한번 체험하게 되면 안 끌려들죠. 설령 끌려들어도 금방 어~ 하고 다시 돌아오죠. 그러면 이게 자꾸 자꾸 세력이 약해지는 거요. 그게 업장소멸이오. 위빠사나에서. 그럴 때 중요한 건 이렇게 소멸하는 건 선정이고, 냉정을 유지하고, 이걸 알아차림은 삼매고. 깨달음이라는 건 뭐냐 하면, 그것의 감각이 결국 원리가 있어. 그건 뭐다? 일어나는 건 다 뭐 한다? 사라지는 거요. 그 이치를 알아차리는 게 무상이오. 그 감각이라는 것은 쾌든 불쾌든 다 뭐다? 고의 뿌리에요. 그러니까 고다. 그것의 일어나고 사라짐에 흐름에 뒤 안에 별도의 주체는 없다. 그냥 작용만 있다. 이게 무아에요. 그거를 체험을 한단 말이오.
그래서 부처님의 가르침은 굉장히 논리적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논리에 사로잡히지 않고, 논리를 뛰어넘는다고 말할 수 있지, 비논리적이건 아니에요. 굉장히 분석적입니다. 그러나 분석을 뛰어 넘는 통찰력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렇게 애매모호한 식으로 설명한 건 사실은 없어요. 다만 여러분들이 그런 마치 과학을 연구하듯이, 사물을 분석하고, 원리를 찾고, 그에 맞게 살아가는, 이런 태도들이 대부분 없잖아. 그죠? 막연히 살잖아요. 대는 대로.
그러니까 그런 사람은 그냥 문제 해결이 잘 안 돼요. 그래서 우리가 조금만 정신을 차려서 보면, 불법의 감동을 하는 이유는 거기에 있는 거요. 그리고 그건 다 요렇게 체험 할 수 있는 거요. 한꺼번에 안 돼서 그러지. 막연한 게 아니라는 얘기에요. 그런데 우리는 막연하잖아요. 그래서 여기 질문이 그냥 마음의 정체가 뭐냐? 이렇게 접근하지 말고, 마음을 분석하고 연구를 하세요. 자기 마음이 일어나면, 가만히 연구를 하고, 분석을 하고, 작용을 살펴보세요. 어떻게 이게 작용하는지.
그리고 부처님 교리를 가져와서 보면, 나는 두 개가 붙은걸 하나로 봤는데, 딱 그 12연기에서 그걸 분리해 놨어. 감정으로만 봤는데, 감정이 일어나는 걸로 봤는데, 그것이 느낌이 먼저 일어나고, 감정이 거기에 연계되는. 두 개의 부싯돌이 탁 부딪혀서 불이 일어나고, 거기에 수가 가서 딱 불을 붙여 온단 이 말이오. 그렇게 분석이 됐을 때 자기를 깊이 관찰을 하는 거요. 아~ 이게 거기 한꺼번에 뭉뚱그려서 있던 게 이게 분석이 된단 말이오.
음식을 먹는다. 그러지만은 이걸 분석을 해 보면, 입에 들어가서 씹고, 목구멍으로 넘기고, 위에 가서 소화가 되고, 다시 장에서 소화가 되고, 흡수가 되는. 이런 걸 한꺼번에 뭉뚱그려서 먹는다고 하지만, 그 내부를 분석하면 이렇게 몇 단계로 나눠진단 말이오. 그것처럼 우리들의 마음의 작용이 이렇게 분석해 보면, 성격도 다르고, 작용이 순서가 있다, 이 말이오. 그러니까 거기에서 어디에서 내가 그것을 멈추느냐?
이렇게 우리가 알아서 처음에는 격정이 일어나더라도, 거기에 빠지지 않는다. 두 번째는 격정이 일어나지 않도록 한다. 그 다음에 격정이 일어나지 않는 게 바로 감정이 일어나지 않도록. 그런데 필링 일어나지 않도록. 이건 안 돼요. 필링은 업식이 있어서 일어나니까. 그럼 여기에 감정이 개입이 안 되면 이 업식은 점점 소멸하기 때문에 멸수, 수가 멸한 상태. 이 수가 일어나지 않는다 이 말이오. 그게 아라한이에요.
그러니까 나머지 작용은 노력해서 관찰해서 제어가 되는 게 아니라, 저절로 안 일어나져. 그런데 그것들을 우리가 하나를 놓치면 다음단계에서 알아차리고, 그걸 놓쳐도 그 다음 단계에서 알아차릴 수 있는 거요. 이렇게 공부하는데 있어 대승은 어때요? 직관은 어때요? 그거? 통찰로 그 전체가 있어 어디서 알아차리나? 이게 중요하지 않고. 그냥 놔 버리는 거요. 알아차리는 데로 놔 버린단 말이오. 뒤에 알아차리면 잘못되고, 앞에 알아차리면 좋고. 이런 생각도 놔 버리고, 바로 오는 대로 받아들이는. 이래서 공부법이 조금씩 차이가 있지만, 다 그걸 기초로 하고 다음 공부가 나온 거지. 이 기초가 없이 일어난 건 아니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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