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 알면서 묻기는 뭐 하러 묻노? 큰스님한테 오늘 가서 얘기 들으니까 몰라서 묻는 거는 알라고 묻는 거고, 알면서 묻는 거는 예의라 그래요. 이 사람 스님한테 예의를 지키나 봐요. 다 알면서 자기 의견을 질문 식으로 대답하지 않았나, 이렇게 생각하구요, 경허스님 얘기가 나오니까 경허스님은 역행을 하신 분이에요. 우리가 쉬 껍데기만 보면 본받으면 크게 그르칠 소지가 있어요. 역행이라는 건 뭐냐 하면, 삶을 거스르는 거요. 그래 어느 날 논길을 가는데, 옛날에는 스님이 7천중에 하나였어요. 7가지 천민 중에, 쌍놈 중에 하나란 말이오.
그래서 ‘백정아!’ 이래 부르듯이 ‘중놈아!’ 이래 불러요. ‘이리 오너라.’ 이러면 ‘예이.’ 하고 가야 된단 말이오. 그래서 성 쌓을 때도 동원해 가서 쌓고 이러잖아요. 그래 불교를 탄압했단 말이오. 그러니까 스님이 가니까 양반이 논길에서 “이리 오너라.” 그러는 거요. 그래서 예. 하고 갔더니, 이 사람이 논둑에 미끄러져 가지고, 짚신이 물에 빠졌어. 양반이 건지려니 발을 벗고 내려가야 되잖아. 신발을 주우러, 버선을 벗고. 그러니까 상놈이 지나가니 시킨 거요. 짚신 저거 좀 주워 올려라. 그러니까 경허스님 내려가 짚신을 주워서 논 한가운데다가 탁 던져버렸어.
그러니까 양반이 얼마나 화가 나겠어요. 그러니까 발로차고 멱살을 잡고 두드려 팼어. 우리가 생각할 때는 짚신을 던질 정도면 때리면 한 대 쳐버릴 거 아니오. 그죠? “야, 임마, 니는 손이 없나 발이 없나. 니가 집어라.” 이럴 거 아니야, 나 같으면, 그런데 두드려 팼단 말이오. 그러니까 두드려 맞는데 피가 나고 코피가 나고 이랬어. 그래서 지나가는 사람이 보니까, 아니 스님을 때려 병신 만들 거 같애. 말렸어, 양반을. 말리니까 양반이 뭐라고 하는 게 아니라 경허스님이 뭐라 그러냐 하면, “거 사람 싱겁네. 자기 갈 길이나 가지. 왜 그래?” 이러는 거요.
그러니 말리든 사람이 멍 쪄가지고, “아, 때려가지고 사람 죽이겠다.” 이랬어. 이랬더니 경허스님이 아니 그럼 남의 신발을 논 가운데 집어 던졌는데, 그 정도도 안 맞고 어떻게? 이걸 역행이라고 해. 그러니까 오늘 날 우리가 이 경허스님을 본받아 한다면 사회 운동을 어떻게 해야 된다? 이렇게 해야 돼. 아시겠어요? 다시 말하면 그게 잘못됐으면 어떻게? 시정을 하되, 거기에 대한 저항을 어떻게 한다? 기꺼이 받아 들여야 돼. 기꺼이.
그런데 어제는 노무현 대통령 얘기하는 거 보니 잘 얘기 하던데, 수행차원에서 보니 조금 모 지라더라. 아직도 변명이 많아. 기꺼이 기꺼이 받아 들여야 돼. 반대를 반대하는 거를 이해하고 받아 들여야 돼. 충분히 이해한다고. 그러나 이렇게 가야 돼서 할 수 없이 간다. 그런데 약간 싸우듯이 한단 말이에요. 약간 대응을 한단 말이에요. 그러면 저항감을 주죠. 그래서 정치인으로서는 그 정도면 싱글싱글 웃어가면서 제법 하는데, 역시 수행차원에서 볼 때는 조금 더 되면 국민들에 대한 설득력이 있죠.
그러면 국회의원 다수냐? 아니냐? 이거 신경 쓸 거 없어. 그냥 밀고 나가도 돼. 밀고 나갈 때 반대를 용인해 줘야 돼. 반대를 용인한다는 거는 반대하는 대로 따라 가란 애기가 아니에요. 반대를 용인해야 돼. 어제 울산에서 지난 월요일 날 물은 질문인데, 참 질문이 좋아서 내가 또 얘기 하는데. 자기는 여지까지 자기 자식, 자기 남편, 자기 집밖에 몰랐다는 거요. 그런데 어떻게 하다 정토회에 나와 가지고 스님 법문 듣고 보살행을 배웠다는 거요. 보살행을. 자기 집 말고, 남의 집도, 남의 애도 생각하는 거를 배웠다 이거요. 아 그래 기뻤다는 거요. 나도 보살행을 해야지.
그런데 마침 지난주에 절에 나온 지 며칠 안 되는데, 지난주에 옆집 아줌마가 자기 부부 어디 간다고 애 둘을 봐 달라 라더라는 거요. 전에 같으면 안 된다고 그랬을 텐데, 아 보살행을 한다고, 해 주겠다 이렇게 했다는 거요, 그런데 자기 하고 남편하고 원래는 어떤 계획이 있었냐 하면 차를 타고 주말에 봄날에 좋잖아, 그죠? 그래서 경주 쪽으로 드라이브, 놀러 가기로 했다는 거요. 그런데 자기가 생각할 때는 애들 둘이니까 자기가 앞에 타고, 뒤에 애들 둘이 타니까 4명이라도 어때요? 애들이니까 괜찮잖아요. 그죠? 가는 길에 애들 태워 가면 되겠다. 이렇게 생각을 했다는 거요.
그래서 아침에 가는데 남편한테 얘기도 안 한 거지. 그거 뭐 좋은 일이니까 당연히 찬성할거라고 자기는 생각한 거요. 그래 아침에 차를 탔는데, 이웃집 애가 둘이 와 있단 말이오. 타라 타라, 이러고 있는데 남편이 “웬 애야?” 아이 옆집 앤데. “옆집애가 왜 타나?” “아, 엄마가 어디 간다고 나보고 봐 달라고 그랬다”는 거요. 그러니까 남편이 “아니 나한테 얘기도 안하고 왜 혼자서 결정해?” 그러니까, “아니 좋은 일인데, 뭐 그러냐? 애 좀 봐 주면 어때?” 이렇게 했다. 그러니까 남편이 “애 봐주는 거 좋지만 봐 주면 니 혼자 봐주지, 내 가는 데까지 복잡하게 하냐?” 그러니까 “아이, 보살행도 몰라? 보살행도?” 그러니까 남편이 열쇠를 탁 집어 던지면서, “니나 보살행 실컷 해라.” 이러면서 가버렸다는 거요.
삐져가지고, 가버리고 안 온다는 거요. 그래 자기가 차 몰고 갔다 왔는데, 이틀이 지났는데도 아직도 말을 안 한다는 거야. 남편이. 그래 이럴 때 어떻게 했으면 좋겠냐? 스님 가르침대로 보살행을 하려니, 남편하고 갈등이 생기고, 남편 말을 따르자니 보살행을 못하겠고. 이게 현실적인 질문이죠. 그래 우리 생각엔 모순 같은데 조금만 잘 생각해 보면 모순이 아니야. 그러니까 이 남편이 성질이 난건 애 둘이 데러 가는 거 때문에 성질이 난 게 아니라는 거요. 이거는 자기한테 허락을 안 맞고 했다. 이게 핵심이오.
그러니까 자기 고집대로 했다. 이거는 어이 보면 별거 아닌 거 같지만, 평소에 이 분이 늘 지 고집대로 한다는 거요? 안 한다는 거요? 한다는 거요. 남편얘긴 별로 신경 안 쓰고 그냥 지 하고 싶은 대로 해 버리니까 이런 문제가, 선입관에서 이런 문제가 생긴 거 아니오. 그죠? 이게 불교를 제대로 공부를 했으면, 만약에 이런 일이 벌어져 남편이 짜증을 낼 때 보살행을 해야지. 이래 해야 되겠어? 이게 잘못된 거요. 그러면 안 그래도 지 고집대로 하는 게, 니 고집 아니냐? 이게 어떻게 내 고집이냐? 부처님 가르침이지. 이래 나온다 이거야.
더 객관적 진리다. 이렇게 나온 거란 말이오. 그러니까 그럼 니 혼자 많이 해 먹어라. 가버렸다는 거요. 그러니 이럴 때 상대를 이해하는 게 필요하다. 아~ 남편의 입장에 볼 때는 좀 황당하겠다. 그렇게 이해는 되잖아. 그죠? 황당하겠다. 그러니 “아, 여보 제가 당신한테 말 안 해서 미안해요. 말한다는 걸 깜빡 잊어버렸네.” 일단 사과를 먼저 해야 돼. 그 입장을 생각하면 그 사람 화 내는 게, “왜 화내? 그만한 일에. 애 보자는 게 뭐 잘못됐나?” 이렇게 나갈게 아니라.
말은 맞아. 그런데 이 사람 감정은 안 그렇다니까, 그러니까 “아, 미안해. 당신한테 미리 애기 안 했어.” 이렇게 하고. 다음에 “여보 그런데, 내가 미리 약속을 해 놔버려 가지고 지금 어떻게 하냐? 요번엔 한 번 봐줘, 다음엔 당신한테 완전히 허락 받고 할게.” 이렇게 하면 열에 아홉은 남자들이 어떨까? “‘다음부터 잘해?” “가자.” 이런단 말이오. 다음엔 잘해. 권위를 딱 세워 주면 된단 말이오. 별일 아니니까. 그럼 “알았어요.” 이러고 가면 돼. 그러면 이 보살행 하고 이 남편의 의견을 받아들이는 거하고 아무 모순이 안 되잖아. 그런데 모순이 아닌데 모순이 된다고 생각을 한단 말이야.
이건 뭐냐 하면 자기 의견을 고집하는 거요. 자기 의견을 고집하는 거는 도가 아니란 말이오. 그럼 자기 의견을 내려 놔라. 이 말은 무조건 상대하는 데로 따르라는 얘기가 아니오. 그걸 이해하고 받아들이라는 거요. 그 입장에선 그럴 만도 하겠다. 그러면 다시 돌아와서, 그럼 어떻게 해야 되요? 앞으로. 그러니까 “아이고, 여보, 제가 잘못했어요. 다음부터 안 그럴께요.” 이러면 될까요? 이래. 그럼 될까? 안될까? 그럼 안 돼.
왜? 아내가 잘못했다고 생각을 하면 이틀 동안 말 안 할까? 벌써 불러다가 따졌을까? 불러다 따졌어. “니가 그럴 수가 있냐?” 이래 따졌는데, 암말도 안 하는 거는 자기도 그때 감정은 상했지만 생각해보니 별거요? 별거 아니오. 명분으로는 화낼 일이 못 돼. 아시겠어요? 이웃집 애 좀 봐주자는데 그게 뭐. 그렇다고 기분 나쁜 거는 기분 나빠. 그러니까 말을 안 하고 말을 안 하고 안 따지는 이유는 거기 있는 거요. 그러니까 이럴 때 “여보 내가 잘못했어. 다시는 그 애들 안 데려 갈게.” 이러면 더 자존심 부리는 거요.
제 말 이해하시겠어요? 이거 지는 더 보살이야. 나는 더 좀생이가 되는 거요. 이게. 이럴 때는 이 건을 가지고 또 가가지고 사과하면 안 돼. 이건 버려야 돼. 버려버리고, 딴 걸로 어때요? 그냥 살살살 달래가지고. 이 건으로 말고 딴 거로, “아이고, 여보 피곤하지.” 이런 식으로 가야 돼. 내가 참 잘 알지? 그런데 옆에서 구경하는 사람 이렇게 잘되는데, 직접 사는 사람은 잘 안 돼. 그것도 사실이오. 그래서 구경하는 사람 얘기도 좀 들어봐야 돼.
그러니까 우리가 어떤 문제를 풀 때 어떻게 접근하느냐 하는 건 굉장히 차이가 있다. 정치도 마찬가지요. 어제 보면서 조금 그 받아주면 될 건데, 그 밀린다, 이긴다, 진다는 쪽으로 자꾸 보면 그렇단 말이오. 그래도 잘했어. 전체적으로는 잘했지마는 그러나 딱 감동을 못 주는 이유가 어디 있다? 감동은 그럴 때 주는 거거든. 그때 딱 한 발 물러나주면 사람들이 마음이 어떻다? 찡하는 게 생겨. 찡하는 게 생기면 백 개 잘못해도 괜찮아. 인간심리 라는 게 그렇다. 아시겠어요? 마음이 찡한 게 생기면 어지간하면 그냥 넘어가버려.
그런데 찡한 걸 탁 못 주고, 그래서 논리로만 하면 논리로 이겨도, 논리로 자기가 생각해도 다 져도 갈 땐 기분 나빠. 그래서 사람이 꼭 논리로, 원칙만 갖고 인간 삶이 안 이루어지는 거다. 그런 데서 우리가 사람에 대해서 조금 더 이해하는 게 필요하지 않느냐? 그렇게 공부라는 건, 불교 공부라는 건 딴 게 아니고, 이렇게 우리가 하나 하나 해 나가는 거요. 그럼 이게 다 되나? 안되나? 안 돼. 딱 부딪치면 또 안 돼. 그때 “아~ 안됐구나. 다시 해봐야지.” “안됐구나. 다시 해봐야지.” 이게 수행이오.
그렇게 한번 해 나가시고요. 결과적으로는 우리가 어떻게 삶 속에서 실천하느냐? 이게 공부고. 이 수많은 과정을 거쳐서 돌아오면 결국은 구체적으로 둘이서 밥 먹고, 똥 누고, 대화하고, 길가고, 오가갈 때 어떻게 자기 마음이 편안하고, 상대하고 관계가 풀리느냐? 이게 결국은 검증의 기준 아닐까? 그죠? 그런데 속으로 꽁하고 바깥으로만 좋으면 이거는 해탈은 아니지. 자기는 좋은데 남이 괴로워도 이건 해탈이 아니야. 그러니까 여기에 우리들의 수행의 결과는 그렇게 된다.
그런데 여러분들이 지금 사는 남편이나 아내, 자식을 데리고, 내 수행하는 거를 테스트, 연습용으로 삼아 봐요. 어 남편이 저러니까 안 되네. 저렇게 나오니까 마음이 일어나네. 애가 저러니까 내 마음이 일어나네. 이렇게 연습게임으로 생각을 해요. 그러면 좋은 뭐가 된다? 내 선생이 되는 거요. 트레이너가 된다 이 말이오. 중은 트레이너 없이 지 혼자 하니까, 실전에 약하고, 여러분들은 늘 트레이너를 두고 하니까 실전에 강하다. 그래서 누가 더 낫다? 여러분들이 더 나아. 겉으로 보면 내가 잘하는 거 같은데, 실전에 딱~ 임하면 여러분들이 낫거든요.
그러니까 그거를 살려야 돼. 빠지면 공부가 아니야. 자기를 합리화하면 안 돼. 늘 인생을 연습하듯이. 오늘까지 한 것은 연습. 내일부터는 실천. 내일은 또 다시 연습. 또 새로운 도전. 이렇게 생각하면서 살아가면 금방 좋아집니다. 금방 좋아져. 다 자신 있죠? 예. 그 정도 남자한테 내가 걸려가 넘어져서 되겠어? 당신 뭐라 그래도 난 끄떡없을 거야. 이렇게 탁 목표를 정해놓고 안 되면, 오 걸렸네. 또 걸렸네. 내가 저 말에는 걸리더라, 몸에 대해서 뭐라고 하면 걸리더라. 지식에 대해서 뭐라고 그러면 걸리더라. 애 갖고 문제 하면 걸리더라.
아~ 다음엔 안 걸려야지. 걸려서 넘어져도 벌떡 일어나면 수다원이고, 다음에 한번만 넘어가고 그 다음엔 안 넘어간다. 하면 벌써 사다함이 되는 거요. 아시겠어요? 한번 안 걸리면 아나함이고. 그걸 딱 갖고 연습을 하면 돼. 그렇게 한번 해 보세요. 그러면 사는 게 그대로 다 수행이야. 사는 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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