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륜스님/즉문즉설(2013)

[즉문즉설] 제427회 특별기도에 대해서

Buddhastudy 2013. 6. 4. 22:05

출처 YouTube

 

스님이 앞에 떡~ 서서 가사삼장**하고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하고 축원도 읽어주면 기분 좋겠죠. 나고 기분 좋겠어. 안 그러겠어요? 기분 좋은 건 이해가 되요. 이렇게 기분이 좋다고 애가 시험에 걸리느냐? 이거하고는 별게라니까. 이거하고는. 기분 좋은 거를 제가 이해 못 하는 게 아니에요. 기분 좋은 거야 맛있는 음식을 봐도 기분이 좋고 맛없는 음식이고 맛있는 음식하고 어느 게 더 기분이 좋으냐? 하면 맛있는 음식이 더 기분이 좋지.

 

그런데 어느 게 더 몸에 좋으냐? 이거는 맛있는 거 하고 일치합니까? 안합니까? 안 해. 스님이 여러분께 가르치는 거는 어떻게 하면 기분이 좋으냐를 얘기하는 거 아니란 말이오. 어떻게 하면 건강에 좋으냐를 지금 얘기하려고 그런단 말이오. ? 여러분이 기분 좋은 거에 너무 빠져들어서 건강에 나쁜 거를 자꾸 먹기 때문에 너무 기분 따라 먹지마라. 기분 같은 것 좀 버려라. 어떤 게 정말 건강에 좋으냐? 이걸 생각해서 먹어라. 지금 이 얘기하는 거란 말이오. 법문이라는 게.

 

저도 정토법당에 와서 기도하는 거 하고, 불상도 없는 골방에서 기도하는 거 하고, 석굴암 같은데 떡 들어가서면 마음이 저절로 경건해 집니까? 안 경건해 집니까? 경건해 지잖아. 그런 거를 내가 부정하는 게 아니오. 그렇다고 석굴암 가서 석굴암가면 나도 호주머니에서 만 원짜리가 나온단 말이오. 천 원짜리가 안 나오고. 그건 어떤 여자가 나한테 서비스를 세속에 있을 때 잘해가지고 이발소든 식당에 가서 서비스를 너무너무 잘해주면 기분이 좋으면 팁을 만원자리 줄 수 있는 것처럼, 거기도 가면 기분이 너무너무 좋으니까 만 원짜리 꺼내 보시할 수도 있는 거요.

 

그런데 석굴암 가서 기도하면 우리 아들이 대학시험에 거리고 정토 법당에서 기도하면 우리 아들이 대학시험에 안 걸리느냐? 이거하고는 별게 문제라니까. 제가 여러분께 말씀드리는 거는 어떻게 기도해야 다만 1% 5% 10%라도 아들이 공부를 잘하는데 도움이 되겠냐하는 거를 우리가 도와줄 수는 있어. 어떻게 하면 기분이 좋으냐? 이거는 내가 안 가르쳐도 여러분이 잘 알잖아. ? 태어나서 여태까지 기분 따라 살아왔잖아.

 

어디가면 음식이 맛있느냐? 내가 가르쳐줄 수 없어. ? 각자 입맛이 틀리니까. 어떤 음식이 이런 병에 이런 데 건강에 좋으냐? 이거는 의사가 가르쳐줄 수 있다는 거요. 그러니까 첫째 눈으로 보는데 그럴듯해야 되니 불상이나 뒤 배경이 어때요? ~ 좀 보기 좋아야 되고. 스님의 입은 옷이나 머리를 깎고 이런 게 다 보기가 좋아야 돼. 그런데 불교신자는 스님의 복장이나 모습이 앞에 떡 서있으면 보기 좋지마는 기독교 신자는 별로 보기가 좋으나? 안 좋으나? 안 좋지. 될 기도도 안 돼.

 

그거는 목사가 이렇게 떡~ 있어야 보기가 좋은 거요. 이게 다 자기 업, 취향 따라 생기는 거요. 그러니까 이런 모습은 기분이 좋은 거 맞아. 그리고 이왕지 목소리가 나오는데 목소리가 턱~ 부드럽고 웅장하고 우렁차고 이러면 노래도 똑같이 듣는데 노래 잘하는 사람 노래 들으면 좋아요? 안 좋아요? 기분이 좋지. 기분 좋은 거는 충분히 안다니까. 내가 기분이 좋다고 우리 딸이 공부 잘한다. 이거하고 일치가 안 되는 얘기요.

 

그러니까 어떻게 하면 여러분이 기분이 좋으냐? 이걸 얘기하는 게 아니고 10분이 고3생을 가지고 있는데 내가 어떻게 기도하면 우리 딸이 공부하는데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겠냐? 이건 이치로 얘기해줄 수 있다니까. 그래서 우리 딸 공부 잘하게 해주세요. 이런 마음을 내면, 아예 성적이 떨어지거나 아예 공부 않는 모습을 보면 신경질 나는 거요. 나는 이렇게 기도하는데 너는 뭐 하노? 이런 생각이 들기 때문에. 내가 짜증을 내면 아이가 스트레스를 받기 때문에 공부가 더 안 되는 거요.

 

내가 공부 잘하게 해주십시오. 기도를 했기 때문에 이정도 점수면 부산대학교밖에 못 갈 텐데. 그러니까 부산대학을 내든지 조금 낮춰 동아대학을 내야 되는데. 내가 기도를 열심히 해야 됐기 때문에 뭔가 특별한 일이 있을 거다. 그러니까 이번에 서울대쯤 넣어도 안 되겠나? 그러니까 떨어질 확률인 높아지는 거요. 그런데 공부하는 아이의 마음이 되겠습니다.” 이렇게 기도를 하면 애가 조금 헤매도, 애가 TV를 보고 있어도 아이고 저것도 얼마나 공부하기 싫겠나?’ 이러니까 뭐 하노?” 이렇게 하기 보다는 차라도 한잔 끓여주면서 힘들지. 그래도 어쩌노? 올라가 공부해라.” 이렇게 말할 수가 있어.

 

아이의 아픈 마음을 이해하는 그런 기도를 하면, 애가 시험이 부산대 갈 수준의 성적이 된다하면 아이고 그것도 재수 1년 하면 얼마나 힘드노? 그래그래, 부산대를 내든지 조금 낮춰 동아대를 내든지 내라.” 이렇게 엄마가 조언을 해줄 수 있다. 아이가 서울대 간다 그래도. 시험에 떨어져도 자기가 주장해서 그렇기 때문에 애는 또 열심히 할 수 있는데 자긴 부산대 가겠다는데 엄마가 우겨서 서울대 가서 떨어지면 애가 신경질을 내. 내 인생 엄마 때문에 망쳤다. 이렇게 생각해. 그러니까 어떻게 마음을 내는 게 나한테도 자식한테도 이롭냐? 이런 이치는 내가 설명해 줄 수 있다는 거요.

 

그러니까 기도를 할 때 이렇게 남편에 대한 기도 아내에 대한 기도가 바로 그들의 마음을 이해하고 그들의 아픔을 함께하는, 그러지 못한 내 자신을 뉘우치는 기도를 하라 이 말이오. 그건 깨달음으로 나아가는 길이며 복 받는 길이다. 그런데 그런 기도를 하는데, 스님이 앞에 있는 게 뭐가 필요하냐는 거요. 그래서 스님이 안하는 거요. 그래도 스님, 인간이 기분에 사는 거 아닙니까? 스님이 딱 해주면 내 기분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런 분들은 딴 절에 가라고 얘기하잖아.

 

왜 당신들 여기서 입시기도 안하고 정토회에서 법문 듣고 기도는 딴 절에 가서 하느냐? 이런 말 스님이 한적 있나? 없나? 없어. 그 기분을 이해하니까 그래서 그런 기분이 좀 좋아야 자기는 기도하는 맛이 난다 하는 사람은 스님이 집전해주는데 가서 하든지. 또 산에 경치가 좋은데 가서 하든지 하시라니까. 내가 왜 여러분의 인생에 간섭을 하겠어. 뭣 때문에 그런 거 까지 다 간섭을 하겠어. 왜 지 돈 갖고 지 맘 갖고 돈을 어디 내든지 어디가 기도를 하든지 여러분의 자유인데 내가 뭣 때문에 내가 내 인생도 못살아 바쁜데 그런 거 가지 여러분의 인생에 이리와라 저리라가 간섭을 하겠어.

 

여기 와서 이런 좋은 법문 들으라는 얘기는 하지마는, 딴 절에 가지마라 소리 평생 하드나? 여러분은 자기 몸이고, 자기 돈이고, 자기 생각대로 어디 가서 돈을 내든지 보시를 하든지 여러분들 자유에요. 그러니까 딴 절에 가서 기도를 하셔도 되고, 집에서 하셔도 되고 여기 와서 하셔도 된다는 거요. 스님한테 묻는다면 어디 가서 하느냐가 중요한 게 아니고 어떻게 하느냐가 중요한 게 아니라 내용적으로 이런 마음을 하면 더 큰 이익이 있다. 이렇게 말씀을 드리는 거요.

 

그런데 내가 해주는 게 도움이 될 만해야지. 이렇게 법문은 도움이 되잖아. 그런데 내가 앞에 서서 목탁 치는 거는 기분 좋게 하는데 도움이 되지마는 깨닫도록 하는 데는 아무 도움이 안 돼. 시간이 조금이라도 나면 이렇게 얘기를 해서 깨닫도록 하는데 도움을 주려고 지금, 아까 2시간 법문하고 또 하잖아. 밥숟가락 떨어지자마자. 내가 돈이 버는 게 목적이고 이게 기분 좋게 해주는 게 목적이다하면 내가 지금 끝나서 오후에는 뭐해야 된다? 목탁을 치고 북을 치고 막~ 열심히 기도를 해줘야 돼. 기도를.

 

그러면 여러분이 기분이 좋으니까 당연히 돈이 들어오는 거요. 나도 기분 좋으면 어디 가서 돈을 준단 말이오. 내가 아직 배가 불러서 그런지 모르겠어. 배고프면 그렇게 할지. 그래서 내가 이렇게 시간이 꼭 없다기보다 시간이 있어도 내 할 역할은 이런 다. 이렇게 생각하잖아요. 두 번째 기분 맞추는 건 내 능력이 부족해. 내입에서 나오는 목소리는 같이 들으면 별로 기분이 안 좋아. 자기가 하는 게 낫지.

 

그래서 절에서 안 해주는 게 아니고, 그건 내용이 이렇기 때문에 굳이 그렇게 할 필요가 없어서 그래요. 그다음에 두 번째는 기분 맞춰주려고 그래도 중이 우리 정토회에는 부족해. 아시겠어요? 우선 스님이 부족해. 또 이렇게 스님이 꼭 필요하다. 이렇게 생각하면 여러분이 자식이 좀 보내서 스님을 만들어. 여러분들이 출가해서 스님이 되든지. 자기는 안하면서 자꾸 남보고 자꾸 내놔라 그래.

 

이 좋은 세상에 이 돈만주면 온갖 거 맛있는 거 먹고 온갖 짓 다하고 하는 세상에 누가 머리 깎고 중 되서 먹는 것도 제대로 못 먹고, 입는 것도 제대로 못 입고, 그 남자여자 울려서 만날 돌아가는 세상에 혼자 살려는 사람이 별로 없어. 그러니까 이렇게 하겠다고 해도 경계가 팔려가지고 자꾸 바깥에 한눈을 파니까 여러분이 욕을 하잖아. 스님은 한눈판다고 별 욕을 안 해. ? 그건 안하니까 한눈파는 거고, 여러분은 하니까 한눈을 팔 필요는 별로 없잖아요. 그런데 여러분도 남편 놔놓고 부인 놔놓고도 한눈팔잖아.

 

집에 밥 놔놓고도 밖에 가서 사 먹잖아. 집에 고기 사다 먹을 수 있는데도 놔놓고 밖에 나가서 사먹는 사람이 고기 못 먹는 사람보고 고기 먹는다고 야단이란 말이오. 왜 그래? a문제제기하는 거 들어보면 얼토당토 안 해. 내가 언젠가 뉴욕 갔는데 어떤 신도님이 와서 이럴 수가 있느냐는 거요. ? 저기 어느 절에 이름은 얘기하면 안 되니까. 어느 절에 스님이 두 분 계시는데 한분은 비구스님 한분은 비구니스님인데. 언제 갔더니 둘이서 그네를 요렇게 타면서 속닥속닥 얘기하고 있는데 이럴 수가 있느냐는 거요. 비구 비구니가.

 

그래서 내가 당신 아들딸이 있어요? . 그럼 당신 아들이 그 비구스님이 당신 아들이라면 어떻겠냐? 중 되지 말라고 그랬는데도 억지로 중이 되가지고 절에 사는데, 어느 날 절에 떡 가니까 어떤 여자하고 속닥속닥 하는 거 보면 됐다. “이제 됐다.” 이런 생각 안들 을까? 뭐가 문제요? 뭐가? 자기인생 자기가 선택할거 아니오. 승려가 된 것도 자기가 선택했고. 그렇게 여자나 남자를 만나보니 세상이 좋아 보이고, 나가는 것도 뭐다? 자기 선택이고. 그래도 그 사람은 3년 살다 나가면서 3년이나 수행생활 했지 않았냐. 당신은 하루도 못 했잖냐.

 

그런데 뭐가 문젠데? 이러니까 아이, 스님도 중이라고 중편 든다는 거요. 그래 내가 그랬어. “그럼 중이 중편 들지 누구편 드노?” 너무나 당연한 소리다. 그러니까 자기인생도 못살면서 왜 그렇게 남의 인생에 간섭하는지 모르겠어. 왜 아까도 질문하는 거 봐라. 아파트 옆집에 사는 사람이 뭐하고 살든지 그 사람이 어려운데 도와줄 생각이나 하면 몰라도, 그 사람이 날 쳐다보든지 안쳐다보든지 그게 무슨 고민거리가 돼?

 

인생이 얼마나 할 일이 없으면 머리가 이렇게 돌아가는지 모르겠어. 나 같으면 보기 좋다고 생각하겠다. 비구 비구니가 안아가지고 그네타면서 속닥속닥하면 얼마나 보기 좋겠어. 딱 보면. “아이고 예쁘다.” 이렇게. 왜 그건 보기가 싫어? 일체중생이 다 부처가 될 수 있다. 그러니까 여러분도 지금 수행해서 부처되려는 거 아니오. 그죠? 맞아요? 여러분들 고기 먹어요? 안 먹어요? 결혼생활하지? 술도 가끔 한 잔 하지. 그래놓고도 여러분들 성불하려고 그러나? 안하려 그러나? 하하하. 말이 안 되는 얘기 아니오?

 

그러면 그렇게 까지 하면서 성불하려고 그러는데, 내가 술 한 잔 먹는다고 성불 못하겠어? 내 못하면 여러분도 못하지. 내가 술 한 잔 먹었다 해서 성불 못하면 여러분은 만날 먹었으니까 하나? 못하나? 못하지. 내가 어떤 여자하고 데이트 좀 했다고 성불 못하면 여러분은 만날 사니까 성불을 못하겠지. 스님 못하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여러분이 못한다는 얘기요. 내가 지켜야할 인생의 율은 내가 지키는 거고. 여러분은 여러분들 각자가 지키는 거요.

 

그러니 기도를 할 때 왜 안 해주냐? 현실적으로는 중이 부족해서 안 해 주고, 나는 목청이 안 좋아서 안 해주고, 세 번째는 이왕지 나는 시간에 깨우치는 쪽으로 시간을 조금이라도 배정하려고 그러기 때문에 안 해주고. 더 근본적으로는 해줄 필요가 없기 때문에 안 해주고, 그래서 안하는 거요. 그러니 기도를 어떤 마음으로 하느냐? 다시 정리하면 상대를 이해하고, 이해하지 못하는 내 자신을 뉘우치는 마음을 내서 기도를 하면 지금 하는 기도보다 훨씬 더 한 좋은 과보가 따른다. 이 말이오.

 

그런데 그런 기도를 하면 별 재미가 없지. 그죠? 여러분들 말로하면 신심이 안나. 그 말은 뒤집어 말하면 뭐가 안 난다? 기분이 안 좋아. 신바람이 안나. 으음. 신바람이 난다고 꼭 좋은 일이 생기는 거는 아니에요. 그때 기분이 좋을 뿐이지. 그래서 여러분이 고3기도든 백중기도든. 여기서는 법의 이치에 맞게 하고, 여러분이 여기 그러면 그렇게 해줬으면 좋겠습니다하는 요구가 틀렸다는 얘기가 아니에요. 그런 심정은 이해하나? 못하나? 한다. 나도 기분 좋은 걸 좋아하는데 왜 여러분 기분 좋은 걸 내가 모르겠어. 그런데 그런 기분을 다 맞출 수준이 못된다.

 

너무 매몰차게 얘기하나? 하하핳. 그래서 각자 열심히 기도하시고, 또 여기서는 신심이 안 난다. 싶으면 가까이 있는 좋은 절에 가서 기도하시고 법당 이거 만든 거는 중생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서 법당을 만든 게 아니고, 어리석음을 깨우치기 위해서 법당이 만들어진 거요. 그럼 여기서는 법문만 해야 되느냐? 아니오. 기도할 사람 와서 해도 좋고, 제사지내고 싶은 사람 제사지내도 좋아. 유교적으로는 다 제사를 누가 지냅니까? 자식이 지내지. 제주가 스님이에요? 자식이에요? 자식이지. 그럼 제사는 원래 불교에서 나온 거요? 유교에서 나온 거요? 그럼 어차피 유교에서 나온 걸 불교에서 지내잖아. 그지?

 

그럼 집에서는 여러분이 제주면서 절에 와서는 스님보고 제주가 되라고 그래? 부처님이 뭐라고 그랬는지 알아요? 부처님 돌아가시면 장례 누가 치릅니까? 장례 어떻게 치릅니까? 하고 아난다가 물으니까 너는 신경 쓰지 마라.” 그랬어. 너흰 신경 쓰지 마라. 재가신자들이 알아서 할 거라 그랬어. 스님 죽으면 스님 장례를 누가 지낸다고? 재가신자들이 알아서 하지. 왜 여러분이 죽었는데 제사를 내가 신경 써야 돼?

 

그러니까 제사를 재내는 거는 세속적인 풍속입니다. 이해하시겠어요? 그거 하지마라는 얘기가 아니에요. 설날을 따지고 추석을 따지고 하는 거는 세속적인 풍속이다. 아시겠습니까? 세속적인 풍속에서 세속적인 데로 지내세요. 그래서 절에 공간을 비워 줄 테니까 여기 와서 지내고 싶으면 지내라 이거야. 여기는 출세간이니까 안 돼. 너희 집에 가서 지내. 이렇게 해도 되는데 그래는 안하잖아요. 여러분들 하고 싶은 데로 해라 이거야. 하는 거 까지는 개방을 해주겠는데 나까지 끌어들이지는 마라. 이 말이오.

 

나까지 자꾸 끌어드리면 내가 해야 할 본분을 자꾸 놓치게 된다. 법문을 하루에 4시간씩 해도 저녁 8시까지 해도 수입이 50만원도 안 들어오는데 재를 한 30분 두두둑 두드리면 한 100만원 들어온다. 그러면 나도 머리가 있는 사람 아니오. 어느 게 더 잘 벌리는지 자꾸 돌아간단 말이오. 그래서 내가 또 여러분과 그 나물의 그 밥이 되면 좋겠어? 으음? 그러니까 제사는 여러분이 지내고, 아시겠어요? 1년에 한번쯤 섭섭하니까 스님 한 번 앞에 좀 앉아주세요. 그러면 그건 중생심에서 이해는 간단 말이오. 아시겠어요? 매일도 아니고 1년에 한번쯤. 없는 시간 내서 한번 해보지. .

 

스님이 앞에서 하면 기분이 좋은 건 이해가 되지만 영가가 천도가 되느냐? 안되느냐? 별문제다, 이시겠어요? 그거는 검증할 수가 없잖아. 스님이 앉으면 꼭 잘된다고 어디 봤어? 확실히 검증했어? 들려오는 소문이 그렇고 기분이 그렇지. 그럼 스님이 안 앉은 유교식 제사는 다 그럼 뭐, 아무도 천도 안됐겠네. 이런 건 문화라 그래. 그러면 될 거 같은 뭐가 든다? 기분이 든다. 이해가 되요. 그래서 여러분이 하세요. 그런 거는. 스님 시간 내서 그것도 같이 하면 더 좋지. 그런데 그거까지 보다는 나도 내 직업에 충실해야 될 거 아니오. 그죠?

 

내 직업이 뭐요? 부처님의 좋은 법을 중생을 깨우치는데 작용될 수 있도록 하는 게 뭐다? 내 본분이오. 그거 하고 시간이 남으면 나도 기분 맞추는 거 좀 할게요. 이것도 지금 시간이 없어. 자꾸 내가 수학선생인데 나보고 자꾸 영어 가르치라고 하지 마라 이 말이오. 나는 수학이나 열심히 가르쳐라. 이렇게 말해. 그래서 기도를 하는 건 좋다. 아시겠습니까? 어떻게 하느냐? 그 내용을 중요시한다. 실제로 결과가 원하는 결과가 나오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되느냐?

 

그런 기도에서는 스님이 해야 할 역할이 별로 없다. 남이 해 줄 수 있는 일이 아니기 때문에. 그래서 여러분이 스스로 하십시오. 스스로 하는 건 좋겠는데 초심자한테는 조금 어렵습니다. 이해합니다. 그런데 초심 때부터 그렇게 해야 돼. 초심 때는 스님이 해주다 나중에 혼자하라면 안 돼. 해운데 법당도 마찬 가지오. 처음부터 비디오 갖고 법문을 들어서 길이 들었으면 아무 문제가 없는데, 만날 생방송하다가 내가 안 나오면 어때요? 잘 안 나와. 비디오 뭐~ 이러고. 딴 절에는 비디오만 갖고도 딴 법당에는 꽉꽉 차. 왜 처음부터 길이 이렇게 들면 앞으로 고치기가 어렵다. 이 말이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