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륜스님/즉문즉설(2013)

[즉문즉설] 제438회 선입견을 가질 때 불편한 마음

Buddhastudy 2013. 6. 10. 22:09

출처 YouTube

  

잘 보세요. ‘저는 활동을 하면서 내 마음과 내 의도와 다르게 내 자신이 남으로부터 평가되고 결론이 내려질 때 억울한 마음이 올라오면서 가슴이 뛰고 얼굴이 달아올라 잠시 힘이 들었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래서 내가 어제 사건 얘기도 했는데, 내가 여기 계시는 다른 사람에 대해서 저 분은 이런 사람이다. 저 분은 저런 사람이다. 이 분은 이런 사람이다. 라고 하는 것은 그 사람 자체가 그런 게 아니고 내 눈에 비친, 내 생각에 그렇게 드는 거요. 이해하시겠습니까?

 

여러분이 아이고 법륜스님 훌륭하다.” 하는 것은 법륜스님이 훌륭하다 안 하다와는 아무 상관이 없고, 여러분 속에 그린 법륜스님이 그렇게 훌륭하게 그려진 거요. 그러면 법륜스님 자체가 훌륭하다하면 모든 사람에게 똑같이 그려져야 되는데, 법륜스님이라고 하는 이 물건은 그냥 한 물건인데, 이게 여기 있는 100명이면 천명이면 천명일 때 그려질 때 같이 그려집니까? 달리 그려집니까? 달리 그려져. 아주 나쁜 인간으로 그려지는 사람부터 아주 좋은 사람으로 그려지는 거 까지 그 폭이 굉장히 넓습니다.

 

이거는 이 세상에서 제일 훌륭한 사람으로 평가되는 사람하고 제일 악독한 사람이라고 평가되는 사람의 폭만큼이나 넓다 이 말이오. 다시 말씀드리면 제가 내가 제일 훌륭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누구냐? 제일 나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누구냐? 그 사이에 천명을 줄을 세워서 스펙트럼이 있듯이, 나를 아는 천명의 사람이 나에 대해서 법륜스님을 그리면 그 천명 속에 있는 법륜스님은 마치 내가 다른 천명에 대해서 그리고 있는 것만큼이나 좋은 사람에서 나쁜 사람의 도표가 나오는 겁니다.

 

그러니까 여러분 각자 속에 있는 법륜스님은 같은 법륜스님이 아니고 다른 사람이에요. 다른 사람. 같은 사람 아니에요. 그러니까 나는 당신에 대해서 이렇게 생각합니다.” 라고 말해야지, “당신은 이런 사람이다.” 이렇게 말하면 안 돼요. 제가 생각하기에 법륜스님은 참 훌륭한 사람이다.” 이건 말이 됩니다. “법륜 스님은 참 훌륭한 사람이다.” 이렇게 말하면 말은 이렇게 하지만 사실에 안 맞아. “당신 나쁜 사람이야.” 이건 사실에 안 맞아. “내가 생각할 때는 당신 나쁜 사람이야.” 이렇게 말해야 돼.

 

내가 생각할 때 내 생각에는 당신이 나쁜 사람으로 생각되어 진다.” 이렇게 말해야 돼. 그런데 어떤 사람이 나보고 법륜스님 너 나쁜 인간이야.” 이렇게 말하면 내가 뭔가 변명을 하던 항의를 할지 몰라도. “스님요, 제가 생각할 땐요, 제 생각에는 스님이 자꾸 나쁜 사람처럼 생각이 되는데요.” 이러면 내가 상관할 바가? 아니가? 그건 그 사람문제지. 그러니까 그래요? 그래요?” 이렇게 나온단 말이오. 자기가 그렇다는데 내가 뭐라고 그럴 거야. 그래서 내가 생각하는 내 자신과 실제의 나도 일치하지 않습니다.

 

내가 생각하는 내 자신과 실제의 나 사이에도 갭이 간격이 굉장히 큽니다. 자살하는 사람은 이 간격이 크면 클수록 자기 자신에 대해서 실망해서 자살하게 되는 거요. 그런데 하물며 다른 사람에 대해서 말할 것도 없어요. 그래서 다른 사람들의 평가에 대해서 구애받을 필요가 없다. 즉 내가 생각하는 내 자신과 다른 사람이 나를 보는 것과 다른 게 너무 당연하다. 이 말이오. 그건 일치 될 수가 없는 거요.

 

마치 그것은 내가 죽을 때 늙지 않고 죽기를 원하는 것과 아이고, 난 딴 거는 몰라도 돈이나 많았으면 좋겠다.”라든지 나는 권력도 싫고 돈도 싫고 내 주위에 귀찮게만 안하는 사람이 있으면 좋겠다.”든지. 이런 얘기와 다 똑같은 얘기요. 똑같은 얘기. 자긴 욕심이 없는 거 같지만 말하는 그게 더 큰 욕심이에요. 그러기 때문에 욕심으로 얘기 하는 거요. 바로 이렇게 해서 억울하고 분해하는 것은 바로 자기가 지금 잘못된 생각을 하고 있기 때문에 억울하고 분한 생각이 드는 거요. 그 사람이 나에 대해서 얘기하는 거는 그 사람의 생각이 그렇다는 건데.

 

이렇게 법문을 했는데 여러분이 법문을 듣고 ~ 오늘 법문 좋았다.”는 사람도 있고, “무슨 소리인제 모르겠다.”는 사람도 있고, “그걸 법문이라고 하느냐?” 이렇게 비난 하는 사람도 있단 말이오. 이 자리에. 법문은 좋았는데 너무 오래하더라.” 이런 사람도 있고. 법문은 좋았는데 밥이 형편없더라.” 이런 사람도 있고. “사람이 너무 많더라.” 이런 사람도 있고. 다 각자 생각이 다르다. 이 말이오. 그럼 그 사람들의 생각, 이건 남의 생각을 우리가 컨트롤 할 수가 없습니다. 이건 헌법에도 보장이 되어 있어요.

 

그런데 이 분은 헌법을 지금 거부하고 있는 거요. 헌법을. 그러니까 질문한 자신의 사고방식이 독재형이에요. 그런데 이 분은 지금 남이 나를 단죄한다. 그래서 독재적이다. 이렇게 말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자신이 지금 독재형이에요. 사람들은 다양하게 평가하고 다양하게 생각할 자유도 있고, 현상이 그렇습니다. 그래서 이런 일에 구애받을 필요가 없다. 좋게 평가되면 좋지만, 나쁘게 평가된다 해도 어쩔 수가 없는 거요. ? 사람이라는 특성이 그렇기 때문에.

 

내가 추석날 차를 타고 부산가기로 했는데 길이 막힐 거라고 예상하고 갔는데 팍 뚫릴 때도 있습니까? 없습니까? 있고. 빨리 갈 거라고 생각했는데 막혀서 못간 경우도 있고, 막힐 거라고 예상했는데 막힐 때도 있고, 안막힐거라고 예상했는데 안 막힐 때도 있고. 이렇게 다양하게 벌어져있어요. 그런데 막힐 거라고 생각했는데 막혔다고 봐라. 내 얘기 맞지. 내 점쟁이야.” 이렇게 말하든지. “너 막힌다고 했는데 봐라. 안 막히잖아.” 이렇게 말할 필요가 없어.

 

내 자신에게 봐도 원하는 데로 될 때도 있고, 원하는 데로 안 될 때도 있고, 안 원하는 게 될 때도 있고, 안 원하는 게 될 때도 있고. 그냥 그 중에 한 개에요. 그런데 여기에 의미부여를 자꾸 하기 때문에 문제가 복잡해진다. 이 말이오. 오늘 집에 가셔가지고 예를 들어서 남편이 집에 들어오는 시간을 여러분이 7시라고 딱 정해놓고 또는 8시라고 정해놓고 말이에요. “일찍 들어와. 일찍 들어와. 일찍 들어와. 일찍 들어와. 일찍 들어와. 일찍 들어와.”

 

요렇게 계속 암시를 한번 줘 봐요. 그래서 하루만 하지 말고 하루만 하면 되더라. 안되더라.” 이거 밖에 안 나오거든. 한 달을 도표를 한번 그려봐. 암시를 주기 암시를 안줄 때 어떤 차이가 나는지. 이렇게 도표를 그려보면 결국은 들어오라그래도 안 들어온 날도 있고. “들오라 그러니딱 들어오는 날도 있고, 기도를 안했는데도 어때요? 들어오는 날도 있고, 기도 안하니까 안 들어 온 날도 있고. 그런 거요. 그러니 내가 뭘 원하면 뭘 된다 하는 게 이게 얼마나 에너지 낭비고 어리석은 짓이냐?

 

그러니 해탈을 하려면 그걸 보는 거요. 일찍 들어오면 들어오는 데로 좋고, 늦게 들어오면 늦게 들어오는 데로 좋고, 그런데 내 마음이 일찍 들어왔으면 하면 내 혼자서 일찍 들어왔으면한다고 남편에게 영향을 줍니까? 안줍니까? 안주죠. 그럴 때는 남편에게 어때요? “여보, 일찍 좀 들어오세요.” 이렇게 말을 하는 거요. 말을 하는 건 내 사정이고 안 들어오는 건 누구 사정이다? 남편 사정이고. 이걸 연결을 안 시키면, 영향을 주는데, 연결을 시키면 어떠냐? “당신 말이야 내가 세 번이나 얘기했는데도 안 들어와.” 이렇게 되면 이제 안 된다니까. 그럼 싸움이 되죠.

 

그러니까 들어왔으면 하는 건 누구 마음이고? 내 마음이고, 안 들어오는 거는 자기 인생이오. 나를 좋게 평가해 줬으면 하는 건 내 마음이고, 평가하는 건 누구 마음이다? 자기 마음이다. 내가 이렇게 법문하면 여러분이 다 좋아했으면, 내 법문 듣고 좋아했으면 하는 건 누구 마음이다? 스님 마음이도, 듣고 다 평가는 자기 마음대로 하는 거요. 나하고 아무 상관이 없는 일이오. 그게 독재형이라는 거요. 자기 원하는 데로 자기 뜻대로 세상을 남을 바꾸려고 하는 거요. 자기가 잘못 생각해 놓고 그렇게 안 된다고 상대를 나무란다 이 말이오.

 

그때 제 마음에는 알지도 못하면서 자기식대로 평가하고 말이야 결론을 내고 원칙을 지키지 않는 사람으로 몰아가는가? 원래 인간이 다 자기식대로 하는 거요. 그런데 이 사람은 사람이 자기 식대로 하는 걸 못하게 하고 있어. 지금. 인간이란 원래 자기식대로 하는 거요. 그런데서 내가 나를 안보고 밖을 보고 문제를 삼으니까 얼굴이 붉어지고 화가 나고 했는데. 기도를 하면서 자기에게로 돌이켜 보니, “아이고 내 잘났다는 얘기구나. . 내가 좋게 평가받고 싶다 하는 내 욕심이구나.” 이렇게 뉘우치게 됐다. 그러니까 편안해졌다. 이런 얘기 아니오. 이게 공부요.

 

바로 그림자를 쫒지 말고 근본 뿌리를 보라 하는 이 얘기요. 밖을 보지 말고 돌이켜 안을 봐라 이 말이오. 그렇게 공부해가기 때문에 참회를 하는 거요. 참회라니까 뭐~ 제가 잘못했습니다하면 복 받는다. 그런 뜻이 아니에요. 눈을 밖으로 돌려서 탓하는 마음에서 안으로 돌이켜서 자기를 봐라. 그런 자기를 봐라. 그러면 즉시 편안해 진다. 그래서 우리 수행문에 나와 있지 않습니까? 그렇게 하는 게 공부지. 책을 얼마나 많이 읽었냐? 뭘 얼마나 절을 했냐? 이게 공부가 아니에요. 돌이켜 자기를 보는 게 공부요.

 

보라 하면 이제 보지 않고 이번엔 또 어떻게 한다? 또 병폐가 있죠. 봐야 된다. 이렇게 생각하는 거요. 아시겠어요? 봐야 된다는 거는 보는 게 아니라 뭐요? 생각이에요. 생각은 번뇌에 불과한거요. 그건 꿈속의 얘기다 이 말이오. 집착을 놓아야 됩니까? 집착을 놔야 된다고 생각을 해야 됩니까? 놔야지. 여기 뜨거운 불덩어리가 있다. , 뜨거~ 하고 놓으면 딱 뜨거운 게 없어지잖아. 그런데 쥐고 놓기는 놔야 되는데, 놓기는 놔야 되는데. 그럼 뜨거운 게 안 없어져. 놔야 되는데라는 건 안 놨다는 얘기에요.

 

지금 우리가 다 공부를 이런 식으로 한다. 봐야 된다. 놔야 된다. 깨달아야 된다. 이런단 말이오. 이건 생각을 쥐고 있는 거요. 놔야 되는 거요. 여기 지금 경에 나오는 거는 그냥 놔라 이 말이오. 그냥 보라. 이 말이오. “봐야 된다.” 이렇게 생각 하지 말고. “놔야 된다.” 이렇게 하지 말고 놔라. 이 말이오. 놓으면 바로 해결이 되요. 그런데 놔야 된다는 건 아무리 몇날 며칠을 용을 써도 뜨거운 게 안 없어진다. 이거요. 그렇게 공부를 해가시면 아마 잘 될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