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륜스님/즉문즉설(2013)

[즉문즉설] 제439회 윤회에 대하여

Buddhastudy 2013. 6. 11. 22:16

출처 YouTube

  

여기서 전생이라는 거를 지금의 이전이라고만 해석하면 아무문제가 없습니다. 우리가 풀이 한포기 나고 죽고 나고 죽는 거는 그렇게 중요한 게 아니죠? 10번 났느냐? 20번 나고 죽었냐? 이게 중요합니까? 1020번 나고 죽고 해도 그 안에 들어있는 유전인자에 변화가 없는 한은 어때요? 결국은 똑같은 것이 반복이 됩니다. 땅이 좀 좋은데 가면 어떻게 될까요? 키가 좀 더 크거나 꽃이 좀 더 크거나 이럴 수 있고, 열매가 좀 많이 달릴 수가 있고, 땅이 좀 박한데 가면 키가 제대로 못 큰다든지 요런 차이는 있지만 종자가 바뀌는 거는 아니에요.

 

여러분이 가진 이런 인연을 가지고 여러분이 어떻게 하다보니까 좋은 날에 태어났다든지. 즉 지금부터 50년 전에 태어났던 사람은 다 전생에 죄가 많아서 이 땅에 태어났겠어요? 지금 태어난 사람들은 다 전생에 복이 많아 이 땅에 태어났겠어요? 그렇지 않습니다. 기본씨앗은 비슷해요. 떨어진 환경이 50년 전보다 지금이 좀 좋다면 여러분들의 삶이 조금 더 나을 뿐이에요. 그렇다고 해서 여러분의 기본업식이 바뀌는 건 아니에요. 우리는 이것만 갖고도 잘되고 못되고를 굉장히 논할 수는 있죠.

 

그러나 해탈이라는 것은 어떤데 떨어지든지 도무지 구애받지 않는 게 해탈이에요. 여러분이 바로 좋은데 떨어지면 좋고, 나쁜데 떨어지면 싫고 하는 이 마음이 뭐다? 윤회의 세계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마음이다. 좋고 싫고 가 있는 한은 윤회를 하게 되는 거요. 좋고 싫고 가 있는 한은 지옥과 천상이 있는 거요. 여러분이 좋고 싫고를 떠나버리면 어떠냐? 지옥과 천상에서 사라져버려요. 도무지 어떤 게 지옥이고 어떤 게 천상이고 없어져버려요. 좋고 싫고 가 있으면 인도의 둥게스리 마을은 나쁜 마을이고, 여기 한국은 좋은 마을이 되겠죠.

 

그러나 수행하는 입장에서 좋고 싫고를 떠나버리면 인도의 둥게스리 마을은 우리가 보살행을 할 수 있는 좋은 터전이에요. 그러기 때문에 오늘 우리는 그곳에 가서 봉사를 하고 수행을 하지 않습니까. 그렇지 않으면 거기 뭐 하러 갑니까? 지장보살은 좋고 싫고를 떠나버렸으니까 어디로 갑니까? 지옥에 가서 고통 받는 중생을 구하고 관세음보살은 이 사바세계에 와서 중생을 구하지 않습니까. 좋고 싫고 가 있으면 뭐 하러 여기 옵니까? 천상으로 가거가 극락으로 가지.

 

좋고 싫고를 논하는 것은 경계를 논하는 거요. 좋고 싫고를 떠나버리는 거는 좋고 싫고 가 다 내 마음에 있다는 거다. 이걸 알았기 때문이에요. 그렇게 되면 여러분은 어디를 가나 다 그것대로 좋은 거요. 차가 없으면 걸어갈 수 있어서 좋은 일이고, 차가 있으면 빨리 갈 수 있어서 좋은 일이고, 돈이 있으면 보시 할 수 있어서 좋은 일이고, 돈이 없으면 정진하기에 좋은 형편이고, 지위가 높으면 교화하기에 좋은 일이고, 지위가 낮으면 인욕하기에 좋은 조건이 된다. 도무지 어떤 형편이든 그것은 나에게 늘 다 좋은 일이에요.

 

옛날에 어떤 유명한 의사에 대해서 그런 얘기 있죠? 스승이 밖에 가서 약초를 캐어 오너라.” 이랬어요. 아마 원래 얘기는 약초 아닌 걸 찾아오너라.” 했나 봐요. 하루 종일 있다가 빈손으로 왔어. “왜 빈손으로 왔냐?” “약초 아닌 것은 한 가지도 없었습니다.” 그게 바로 명의요. 이 세상에 있는 풀 중에 약초가 아닌 건 하나도 없어. 다 약입니다. 모든 것들이 다 그대로 쓸만한 거요. 다 돌이켜보면 좋은 일이오. 그렇게 돼야 여러분이 윤회로부터 벗어날 수 있어. 윤회라고 하는 것은 나고 죽는다 하는 것은 마음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걸 말해.

 

마음이 일어나고 사라지고 일어나고 사라지는 이 번뇌로부터 벗어날 수가 있는 거요. 그런데 여러분이 좋고 싫고를 논하는 한은 이 윤회에서 벗어 날 수가 없는 거요. 그러면 오늘 우리들의 마음은 늘 자기의 까르마, 즉 자기의 업, 좀 더 쉽게 말하면 자기 습관에 집착되어 있기 때문에. 그 습관을 기준으로 해서 늘 바깥세계에 대해서 좋고 싫고 좋고 싫고를 구분 짓고 좋은 것에 집착하고 나쁜 것에 혐오감을 일으키고. 이렇게 살기 때문에 윤회전생을 거듭하게 된다.

 

그러니까 지금 내가 사물을 보고 좋다 싫다 옳다 그르다 이것은 현재 이전의 과거에 나에게 지금까지 오면서 지어진 나의 업이 반응을 하는 거요. 그러니까 현재의 나는 과거의 결과물이에요. 이것은 다른 말로 하면 현생은 전생의 결과물이다. 이렇게 말할 수가 있어요. 또한 앞으로 일은 어떠냐? 내가 비록 이렇게 지어져왔다 하더라도 내가 이렇게 해서 꼭두각시처럼 이 업에 끌려 다니는 인생이라는 걸 지금 내가 알고, 이런 마음이 일어나더라도 내가 반응을 안 할 수가 있어요.

 

이러한 마음이 일어나는 거 까지는 과거의 결과물이지만 그것에 대해서 내가 반응을 안 하는 거는 행동을 안 하는 거는 내가 얼마든지 지금 가능한 일이죠. 그렇게 되면 벌써 운명이 바뀌는 거요. 당연한 고리로 이렇게 되면 이렇게 되고, 이렇게 되면 이렇게 되어야 되는데 여기서 내가 딱 멈추니까. 그래서 미래는 수행하지 않는 자에게는 운명이 정해져있다고 말할 수 있지만, 수행자에게는 어떤 운명도 정해진 게 없습니다. 그런데서 윤회 고에서 벗어나는 길이 있다. 이 말이오.

 

그런데 윤회의 행위, 이 윤회의 행위 중에 불변하는 주체가 있다. 그렇지 않습니다. 자동차가 움직이는데 자동차가 빵빵 소리를 내는데 불변하는 주체가 있습니까? 그런 인연들이 모여서 그런 작용이 있을 뿐이지. 어떤 것이 불변하는 주체인가? 해서 그 부속을 하나하나 떼어내 보세요. 모든 부속을 다 뽑아 놔놓고 남는 게 하나도 없어요. 오늘 우리들은 이런 작용이 있지. 작용의 주체가 있는 건 아니라는 거요. 작용의 주체가 있다는 건 뭘 말합니까? 운명을 못 바꾼다는 얘기에요. 그건 못 바꾼다 이런 얘기 아니오.

 

그렇게 때문에 주체가 없다는 얘기는 어떤 것이든지 다 바뀌는 거요. 그래서 우리 불법을 해탈지도다. 모든 번뇌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이다. 어떤 사람이 살인을 저질렀다. 그런데 불법을 믿었다. 살인을 저지르고 감옥에 가서 사형선고를 받았는데 그건 불법을 믿으면 사형선고를 안 받고 감옥에서 나오는 게 운명을 바꾼 거냐? 이렇게 생각하는 거는 백년도 못살 육신을 기준으로 해서 해탈지도를 논하는 사람들이오. 이건 세속적인 관점이오. 이 사물의 본질, 존재의 본질을 깨쳐버리면 죽고 사는 두려움이 없어져버려.

 

내가 과거에 지어온 인연의 이 과보, 내가 얼마나 어리석어서 이런 인연을 지어서 여기까지 있느냐를 확연히 깨쳐버리면 이런 과보를 아주 기꺼이 받는 거요. 도무지 이게 뭐 벌이다 이런 생각도 없어. 그러기 때문에 싹~ 두려움이 사려져 버리는 거요. 세상 사람들이 여러분이 볼 때 아이고, 저래도 죽네. 불교 믿어봐야 죽고 마네.” 이런 기준은 그걸 보는 사람의 눈이 중생의 잣대를 가지고 보는 거다. 이 말이오. “아이고, 저 사람 불교 믿었는데도 뭐~ 암 걸리데.” 그래요.

 

물론 수행을 하면 암에 걸길 확률이 적어지고, 설령 암에 걸렸다하더라도 또 나을 확률이 많아지는 건 사실이요. ? 그것이 다 세포의 돌연변이에 의해서 생성된 것인데 그것이 어떤 먹는 음식하고도 관계가 있지만 그러나 그것은 심리적인 어떤 맺힘, 충격하고 굉장히 관계가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정진을 해서 이런 것을 풀어버리게 되면 굉장한 도움이 됩니다. 그러나 이 수행의 목적이 그 병 낫는데 목적이 있는 게 아니에요. 그건 부산물에 불과한거요. 설령 죽을 사람이 나았다 하더라도 그걸 갖고 기뻐한다면 백년도 못살 육신 갖고 좋아하고 기뻐하고 이런 거 아니오.

 

불법을 그렇게 보면 여러분은 복을 구하는 세속적인 수준을 못 벗어나는 거요. 당연히 수행을 하면 가정이 화목해 지죠. 수행을 하게 되면 아이들이 다 좋아지죠. ? 집안이 화목하고 엄마가 경계에 끄달리지 않고 초연하면 당연히 아이들도 옆에 있다 물이 들죠. 그리고 부모가 아까 여기 질문처럼 서로 싸우고 하면 아이들도 거기에 나쁜 물이 들어서 어때요? 고통이 생기는 거요. 정진을 하게 되면 가정이 화목해지고, 개인이 건강해지고, 하는 일도 잘되고, 그건 맞는 얘기에요.

 

그러나 하는 일이 잘되는 게 목적이 아니에요. 목적은 내가 나고 죽고, 잘되고 못되고. 도무지 이런 것에 구애받지 않는 경지로 가는 게 목적이에요. 나머지는 부산물이에요. 워낙 가르침이 위대하다보니 부산물이 다른 종교의 목적보다 더 좋은 거죠. 부산물만 해도. 찌꺼기만 해도. 엄청난 복이죠. 그러나 불법은 그게 목적은 아니에요. 여러분은 여러분의 눈으로 보면 법륜스님이 몇 살까지 사냐? 해 놓은 일이 사회에서 얼마나 인정을 받느냐? 이런 걸 갖고 평가하겠죠. 그건 세상의 눈이에요.

 

내가 내 자신에 대해서 인생은 내가 내일 죽든 모래 죽든, 일이 이렇게 되던 저렇게 되던, 거기에 덜 구애받는 인생을 가는 게 그것만이 나의 재산이에요. 그 외에는 다 부산물이에요. 그렇게 공부를 해나가셔야 여러분에게 부산물이 커지는 거요. 아시겠어요? 아무리 그게 커도 그건 부산물이지 그건 주목적은 아니에요. 그것이 허공계를 가득 채울 만큼 크다 해도 그것은 유루복이다. 이 말이오. 우리 불법은 무루법. 자기 해탈을 구하는 거요. 그런데서 오늘 질문하신 분은 너무 이렇게 모양에 집착해서 윤회를 이해하거든요.

 

애가 하나 태어났다 죽었다. 요건 전생이고 개구리가 죽어서 새되면 요건 전생이고 요건 후생이고. 요런 거는 불교를 너무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에게 인도당시, 인도 전통사상, 즉 전설 따라 삼천리처럼 어때요? 그걸 인용을 해서 권선징악적으로 이 불법을 좀 쉽게 이해하라고 나온 얘기에요. 으음. 그때는 좋은 얘기꺼리였어. 그러나 지금 해탈지도를 추구할 수 있는 이 부처님의 정법을 바로 이제 받고 수행할 수 있는 시대에 온 거요.

 

옛날엔 이런 얘기, 지금도 시골에 있는 우리 할머니들, 저 있는 사람들 모아놓고 내가 이런 얘기하면 내 말귀 알아듣겠어? 못 알아듣지. 그러면 할머니 요렇게 요래요래하면요, 요렇게 하면 아들이 잘되고요, 요렇게 하면 안 됩니다.” 요렇게 해야 귀에 쏙 들어오고. “~ 그렇구나.” 이것하고. 지금 우리가 정법을 가지고 공부하는 건 다른 차원이에요. 여러분이 기뻐하셔야 될 날이에요. 오늘날 여러분이 정말 이렇게 정법을 가지고 정진할만한 정신적 수준에 이르렀다는 거요.

 

여러분이 있기에 나도 이런 법문을 할 수 있는 게 나의 기쁨이고, 여러분이 이런 법문을 들을 수 있다는 게 기쁨이에요. 지금까지는 이런 법문을 할 대상도 없고 여러분이 듣고 싶어도 이런 법문을 들을 곳도 없는 시대를 흘러온 거요. 그래서 이렇게 전설 따라 삼천리 같은 얘기로 흘러온 거요. 그건 하나의 좋은 문화에요. 과거의 문화. 옛날에는 재미있는 얘기지마는, 지금 같은 시대에 여러분이 아직도 그런 얘기를 갖고 계속 우물딱 주물딱 하는 거는 그건 그러면 다른 종교나 진배없는 종교요.

 

그러니 이제는 여러분이 좀 한 꺼풀 넘어야 돼. 이제 스님이 되느냐? 안되느냐? 결혼을 하느냐? 안하느냐? 이런 거 갖고 논할 시대는 넘어버린 시대야. 그건 문화에요. 문화. 과거에 내려온 문화. 그건 문화니까 존중해야 되요. 그래서 스님도 이런 옷 입고 있잖아요. 이거 입어서 편리한 게 아니죠. 그죠? 전통 문화니까 그냥 입고 있는 거요. 이거 입는다고 깨달아지고 이거 안 입는다고 안 깨달아지겠어요? 이거는 그거하고 아무 상관없는 거요. 내가 이것을 거부할만한 뚜렷한 딴 이유가 없어요.

 

내가 이걸 안 입는 게 더 낫다.” 하는 뚜렷한 이유가 있으면 벗어버리지. 내가 전 세계를 이거 입고 돌아다닌다고 해서 특별히 불편하지는 않습니다. 일할 때는 좀 불편해. 작업복 입으면 되죠. 이건 권위를 나타내기 위해서 입는 게 아니고 그냥 예부터 입어 왔으니까 그냥 입을 뿐이에요. 이거 입는다고 좋은 것은 아니고 이거 입는다고 나쁜 것도 아니에요. 이건 문화에요. 이건 그냥 옷일 뿐이에요. 그래도 여러분 눈에 익숙한데 내가 이거 안 입고 그냥 와가지고 티셔츠 입고 와서 얘기하면 어쨌든 뭔가 마음에. 똑같은 얘기를 해도 어때요?

 

마음에 안다가올 거 아니에요. 그래서 가능하면 분위기를 좋게 만들어서 얘기하는 게 좋겠다. 익숙한 분위기에서 얘기하는 게 좋겠다. 이렇게 하지만, 이렇게 앉았다 해서 법문의 깊이가 더 깊어지고, 우리가 밥상머리에 앉아가지고 둘이서 얘기한다고 해서 법문의 수준이 낮아지는 건 아니에요. 어쩌면 그때가 훨씬 더 법문이 깊어질 때가 있습니다. 소재를 꼭 경전을 갖다놓고 얘기해야 깊어지고, 그냥 인생사. 아들이 죽었다. 남편이 죽었다. 어쨌다고 와서 울고불고 악을 쓰고 얘기한다고. 그건 세속사가 아니라는 거요.

 

거기에서 우리 주고받는 대화도 다 해탈 괴로움에서 벗어나는 길로 가면 어때요? 그건 다 해탈의 가르침입니다. 다만 마약주사처럼 외부에서 주입해서 일시적으로 고통이 없어졌는데 깨고 나니까 또 괴롭다. 이것은 해탈지도는 아니죠. 어떤 괴로움에서 없어지는 효과는 있는데 그것이 근원적 치료는 아니기 때문에. 그래서 내가 여러분을 위로하고, 비위맞추고 하는 거는 일시적인 마약효과, 대게 아프다면 모르핀 주사라도 맞아야 되잖아. 그죠? 그런 효과가 있는 것뿐이지 그것은 해탈지도는 아니에요.

 

해탈지도라는 것은 법문을 듣고 어떤 이치를 자기 스스로 탁 깨쳐야 되요. “~ 인생이 이런 거구나.” 이 사실 재물이 아무것도 아니구나. 옳다고 고집했더니 죽고 나니 아무것도 아니구나. 뭔가 이렇게 어떤 이치를 딱 깨치게 되면 어떠냐? 거기에 고뇌의 덩어리가 사라지는 거요. 그렇게 공부를 해나가야 된다. 그래서 이 질문은 무엇이든 상관없어요. 아파죽는다고 질문을 하든지, 자기 상태를 그냥 드러내면 되는 거요. 그러나 다만 우리가 여기에서 어떤 마음을 가져야 이 번뇌로부터 벗어나느냐? 이게 담마. 법이라고 하는 거요.

 

그래서 전생얘기는 재미있는 얘기는 합니다. 그러나 수행적 차원에서의 전생은 현재 이전을 전생이라고 보고 현재의 이후를 내생이라고 봐라. 그러면 과거전생 얘기들도 다 그냥 수용해도 됩니다. 그러나 애 뱃속에서 나올 때부터 현생이고 이렇게 전생 후생을 따지면 그것은 일체유심조의 도리에 어긋난다. 이 말이오. 애기가 딱 태어나자마자 너의 아버지가 왕이니까 너도 왕자다.

 

이렇게 신분제를 정하나 티베트처럼 한사람이 죽으니까 어느 집에 태어났다. 해서 그 집에 쫓아가가지고 조그마한 애보고 너는 림포체다. 이렇게 하는 거나 크게 보면 신분제 사회라는데 별 차이가 없죠. 그 아이가 왕자가 되는 것은 마치 일벌을 로열 젤리 먹여서 키우면 뭐가 되는 거와 같다? 여왕벌이 되는 것처럼, 그 아이를 그렇게 교육을 시키기 때문에 아예 그렇게 되는 거요. 어릴 때부터 위대하게 되도록 그렇게 자긍심을 주고 키웠잖아요. 크게 보면 신분제에 벗어나는 게 아니에요.

 

그런 문화를 우리가 존중해주는 거 하고 그것이 진리인거하고는 별개다 이 얘기요. 여러분이 인도에 가서 인도사람들이 강가강에 가서 목욕을 하고 기뻐하는 걸 보고 , 임마. 쓸데없는 짓 하지마라. 우리 부처님이 그런다고 하늘나라에 갈 바에야 물고기도 하늘나라에 난다더라.” 이렇게 얘기하면 안 돼요. 아시겠어요? 그건 뭐요? 그들의 문화에요. 그러니까 그건 존중해 줘야 돼. 그들이 목욕하고 그들이 베푼 의식을 존중해 줘야 돼. 그러나 존중하는 거 그게 진리다. 그건 별개다 이 말이오.

 

그래서 문화는 각각 다르기 때문에 존중해야 돼. 티베트 불교를 존중하고, 남방불교는 남방불교를 존중해주고, 선은 선을, 기독교는 기독교를 다 준중 해줘야 돼. 일본사람은 일본사람의 문화를, 장례 치르는 절차고 뭐고 다 존중해 줘야 돼. 그건 문화니까. 그러나 정말 찬송가 부르면 이건 하늘나라에 가고 이거는 뭐 어떻게 하면 지옥에 가고. 그런 건 아니다. 이 거요. 그것이 객관적 사실이냐 하는 건 별개다. 이 말이오. 그러니까 그것이 사실을 논하는 게 담마입니다. 아시겠어요? 담마. 이 옷이 성스러운 거냐? 그건 문화에요.

 

이런 옷은 수행자의 옷은 성스러운 옷이다. 이거는 문화다. “에이 별거 없다.” 이러면 안 돼. 남의 문화는 존중해줘야 돼. 또 내 문화는 계승해야 돼. 그런다 이 문화가 담마, 객관적으로 진실이다. 법이다. 이건 아니에요. 우리가 여기 제사를 차릴 때도 처음에 뭐놓고? 대추 놓고 밤 놓고, 이렇게 이렇게 한다고 바뀌면 난리 나는 줄 알아. 귀신이 오다 가는 줄 알아. 그건 아니에요. 음식을 차리던, 음식을 차리지 않던, 꽃을 놓든, 엎드려 절을 하든, 향을 피우든, 그건 뭐일 뿐이다? 문화에요.

 

그러니까 그것들은 어떻게 하든 존중해라. 이 말이오. 그러나 그 형식을 가지고 그걸 안하면 무슨 큰일 나는 것처럼 생각하면 안 된다. 또 그건 진리가 아니라고 하니까 다 때려 없애버린다. 이래도 안 된다 이 말이오. 그것은 세상사는 사람들의 문화니까 그냥 존중하는 거요. 그래서 전생얘기들은 문화로서 뭐한다? 존중하는 거요. 그리고 문화는 그론 얘기하잖아. 우리도 지금 무슨 일이 생기면 입에서 저저로 나오잖아. “아이고, 하느님도 무심하시지.” 그러든지. 비가 많이 와도 어때요?

 

옛날엔 다 비가 많이 오면 또는 가뭄이 들면 어때요? 어떤 남자있는 여자하고 여자 있는 남자가 만약에 몰래 연애를 하게 되면 하늘이 노해가지고 비를 많이 내리고 벼락을 치고 가뭄을 지고 그러잖아. 그죠? 그러다 찾아내가지고 처벌을 하고 그러잖아. 그래서 비가 많이 오는지 모르겠어. 요새 그런 사람이 하도 많으니까. 아마 다 떠내려가야 될 거요. 그래서 그거는 문화, 그렇게 생각하는 거지, 그것이 객관적 진리와는 별개다. 이걸 여러분이 분명히 알아야 된다. 그래서 우리가 여기서 공부하는 건 담마, 법을 논하는 거예요.

 

그래서 여러분은 문화로서 저에게 질문을 하지마는, 제가 대답하는 건 담마로서의 대답을 하는 거고, 그러면 문화는 필요가 없는 거냐? 아니다. 문화는 옳고 그르고를 따지는 게 아니고, 예부터 사람들이 그렇게 해왔어. 그것이 특별히 현재에 사는 사람에게 큰 해악이 가는 게 아니라면 그것은 존중 돼야 된다. 그러나 여자를 차별한다든지 이런 것들이 사람들에게 너무 괴로움을 주고 피해가 클 때는 문화는 개선될 수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있죠. 개선될 수 있는 거요. 그래서 옛날에 문화에서는 제사를 자시에 지내야 된다. 또 농촌사회니까 가능하죠.

 

그런데 요즘 도시사회에서 그게 잘 안되지 않습니까? 어떻게 보면 더 쉽죠. 옛날엔 불도 없었는데 요샌 전깃불도 있겠다. 옛날에는 여러 가지 불편했는데 차도 있겠다. 더 쉬운데도 따지고 보면 더 쉬운데도 사람들이 직장에 출근해야 된다. 어째야 된다. 저째야 된다 해서 귀찮게 생각하잖아. 그래서 제사 지내는 시간도 바뀌잖아. 그럼 요즘 태어난 애들은 자기 평생에 엄마아빠 제사 지내는 거 만날 저녁 8시에 제사 지내는 거 봤다. 그럼 걔에게는 진리는 뭐에요? 제사는 몇 시에 지내는 거다? 제사는 8시에 지내는 거다.

 

그래서 제사상 차리는 거 이런 것도 어릴 때 자기가 본대로. 자기는 평생을 그렇게 봐왔는데 절에 오니까 바꿔 놨단 말이오. 그러면 틀렸다고 난리를 피우는 거 아니오. 그래서 그가 틀렸다고 말할 때도 그가 잘못했다고 말해도 안 되고 그의 업, 그의 견해, 그의 관습과 다르다는 얘기거든요. 그러니까 우리가 받아들일 때 아~ 당신은 그렇게 했습니까? 우리는 이렇게 했습니다. ~ 그렇게 해도 되겠다. 이렇게 한다. 저렇게 한다. 정해진 건 없으니까. 이렇게 받아드리면 쉽잖아. 그런데 어디 그런 상놈 같은 짓을 하느냐? 그걸 바꾸면 어떻게 하느냐?

 

상놈이나 하는 짓이지. 이러면서 옳고 그른 것을 구분하기 때문에 여기 갈등이 생기게 되는 거다. 그런데서 우리가 과거의 문화적 습관을 우리가 일상적으로 쓰지 않습니까? 그래서 스님도 우리가 늘 절에서 내가 살았기 때문에 문화가 어디 있다? 불교문화, 인도문화에 젖어있단 말이오. 그러기 때문에 우리 입에서 나올 때마다 용어는 만날 어떻게 쓴다? 사람이 조금 말 안 듣고 하면 어때요? “아이고 저게 전생에 저게 뭐였겠는데 저렇게 말을 안 듣노?” 이렇게 문화다. 이 말이오. 아시겠어요?

 

문화적으로 쓰는 말이지. 진짜 그게 전생에 뭐 구렁이였다. 뭐 여유였다. 이런 얘기는 아니란 말이오. 문화, 과거의 그렇게 이해해 왔다. 즉 욕심 많은 거는 돼지 같다고 말해왔고, 미련한 거는 소 같다고 말해왔단 말이오. 그러나 실제로 돼지가 욕심이 많은 게 아니고, 소는 미련한 게 아니에요. 다만 사람들이 그렇게 말해왔지. 여우는 꾀가 많다 그러고. 욕심 많은 건 사람이고 미련한건 사람이지 소가 아니야. 소가 들으면 아마 성질날 거요. 돼지가 들어도 마찬가지고. 그러나 우린 그런 용어를 쓰는 거요.

 

그런 용어를 쓴다고 해서 그것이 객관적 진리다. 이렇게 이해하시면 안 된다. 이거요. 그건 문화에요. 그래서 불교가 인도에서 일어나서 오다가 보니까 거기 인도문화가 같이 섞여가지고 여기까지 오다보니까 이런 전생얘기니 이런 얘긴 다 담마, 부처님의 가르침인 진리, 법이라기보다는 인도의 문화에요. 인도의 문화. 우리나라에선 이 만자. 불교를 상징하지 않습니까? 그죠? 인도가면 불교를 상징하는 게 아닙니다. 이것은 힌두교를 상징하는 거요. 염주, 이거 우리는 우리를 불교를 상징하는 얘기지만, 인도가면 힌두교에서 다 쓰잖아요.

 

그래서 염주를 가졌다고 해서 저 불자구나. 이렇게 도무지 그 사람들은 생각 안 해요. 그래서 염주주면 불교인들은 별로 기뻐 안합니다. 단주를 주면 좋아해요. ? 단주는 안가지고 있으니까. 사람들이. 그럼 단주는 불교 거다. 이렇게 말할 수가 있다. 이건 문화적인 문제요. 우리에게는 불교지만 인도에 가보면 그것은 힌두란 말이오. 그럼 오늘 우리들의 문화로서는 오신채 안 먹는 게 불교문화죠? 그래요? 안 그래요? 그러죠. 그런데 남방불교에 가면 오신채 안 먹는 그런 문화 없어요. 오신채 안 먹는 건 뭐냐? 이것도 힌두교 문화란 말이오.

 

그런데 이미 우리 문화가 되어 버렸어? 안되어 버렸어? 되어버렸어. 그건 절에서 五辛菜오신채 먹으면 사람들이 아이고 절에서 왜 이런 걸 먹노?” 이렇게 시빗거리가 됩니까? 안됩니까? 되니까 안 먹는 거요. 그거 뭐 먹는다고 무슨 일이 생긴다는 건 아니지만. 그래서 우리가 문화를 존중하는 거요. 그러나 그 문화가 담마, 법은 아니에요. 그런데서 여러분 문화를 가지고 자꾸 진리이냐? 아니냐? 이렇게 논쟁을 삼는다. 그것을 뛰어넘으셔야 된다. 그게 바로 상에 집착하는 거다. 이런 얘기요. 그래서 진리는 언어문자에 지나치게 집착하면 언어문자 억매여서 자유로워지지 못한다. ~ 그런데서 전생 얘기를 했기 때문에 에~ 좀 덧붙여서 말씀을 드렸습니다. 여기까지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