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선택을 할 거냐? 먼저 한번 생각해 보세요. 으흠. 따로 살고 싶다. 이게 일단 제가 제일 첫 번째 선택할 수 있는 거 아닙니까? 그죠? 그래서 남편에게 저는 이렇게 부모 모시고 시동생 식구하고 같이 살기는 힘듭니다. 따로 삽시다. 이렇게 먼저 얘기를 해보면 되겠죠. 남편이 뭐라고 그럴까요? 그렇게 하자. 하면 따로 살면 되는 거고.
그런데 나는 시동생이니까 쫓아낼 수 있는데 시부모입장에서 볼 때 손자 둘하고 아들인데 자기 자식을 어떻게 쫓아내겠어요.
그러니까 물어보는 거요. 그러니까 내가 부모자식을 내가 갈라놓으려면 안 되지. 그건 나쁜 짓이죠. 나하고 시동생만 생각하면 갈라서자. 하는 게 가능한데. 나하고 남편하고 연결이 되어 있고, 남편은 부모하고 연결이 되어 있고, 부모는 시동생하고 연결이 되어 있기 때문에 끊기가 어려워요. 길은 두 가지요. 다 같이 어울려 살든지, 연결연결연결연결 되어 있으니까 어디도 끊기가 어렵다. 그래서 한 가족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살든지. 아니면 이혼을 하든지. 복잡하게 생각할 필요가 없어요.
이혼하고 싶은 마음이 없으면 그러면 나는 부모하고 떨어져 살고 싶지만 남편은 제 부모하고 떨어져 못살 거 아니오. 그럼 부모님은 또 자기 아들하고 못 떨어져 살 거 아니오. 시동생하고. 또 시동생은 제 아이들 하고 못 떨어져 살 거 아니오. 그런데 길거리에 내 쫓을 수가 없잖아요. 눈이 사과를 봤다. “야~ 저기 사과 있구나.” 하고 탁 발견했는데 집어가기는 손이 집어 가버렸어. 눈이 볼 때 짜증날 일 아니오. 손이 사과를 깨끗하게 씻어놓으니까 먹기는 입이 확 먹어버렸단 말이오. 손이 볼 때 얼마나 짜증나겠어.
입이 죽어라고 씹어놨더니 다 위가 가져가 버렸어. 위장이 소화를 시켰더니 진국은 다 혈관에서 다 빼가 버렸어. 이렇게 이게 연결되어 있다. 이 말이오. 나하고 남편이 연결되어 있고, 남편하고 부모하고 연결되어 있고, 부모하고 자식하고 연결되어 있고, 자식하고 또 그 자식하고 연결 되어 있고. 나하고 그 조카하고 보면 거리가 멀지만 그렇게 보면 이게 끊을 수 있을 거 같지만 이렇게 연결이 되어 있기 때문에 어디에도 끊을 수가 없어. 끊는다면 나하고 남편을 끊어야 돼.
그러니까 어차피 같이 살아야 되잖아요. 부모입장에서 볼 때는 이것도 내 자식이고 저것도 내 자식 아닙니까? 그죠? 이쪽 내 자식은 그래도 며느리가 있고 애들 엄마가 있잖아요. 저쪽 내 자식은 아내도 없고 엄마도 없잖아. 그죠? 그러면 시부모 입장에서는 이집이 누구 집이냐? 이런 게 중요한 게 아니라. 누구한테 더 마음이 쓰이겠어요? 그거는 내가 시어머니가 되도 똑같은 입장이오. 이거는 인간의 인지상정이니까. 그러니까 이거는 한 집에 살 수 밖에 없다. 이 말이오. 달리 방법이 없다.
그러면 한집에 살 수 밖에 없다면 이렇게 화내고 짜증내고 미워하면서 사는 게 나한테 좋은지, 하나의 가족으로 대 가족으로. 옛날 같으면 다 한 가족이잖아요. 그죠? 옛날 같으면 팔촌까지 한 가족을 이루고 살았으니까 하나의 가족으로 생각하면서 사는 게 좋으냐. 안 살려면 내가 “안녕히 계십시오.” 하고 나오면 되고, 살려면 이왕지 살려면 껴안고 사는 게 좋다. 애기 몇 명이오? 예. 옛날 같으면 8명 낳아서 키워야 되잖아. 그죠? 합해봐야 몇 명이오? 4명밖에 아니잖아. 별거 아니잖아요.
그러니까 내가 낳으려면 힘드는데 애가 4명이 생겼으니까 서로 돌보며 좋지. 거기에 내 자식 네 자식 구분할 필요가 없다 이거야. 내가 엄마가 돼서 넷을 다 돌보면 되고. 으음. 한방에 자는 것만 아니지 시동생도 내가 남편처럼 돌봐야 되고, 부모가 볼 때는 며느리가 어떻게 하면 좋겠어요? 이걸 다 한 가족으로 생각하고 따뜻이 돌보기를 원하겠어요? 내 살림 네 살림 구분하기를 원하겠어요? 그러니까 본인이 지금 제 정신 아니게 지금 나쁜 마음을 먹고 있다 이거야.
헤어져서 엄마 없이 사는 애들은 길가는 아이들이라도 집에 데려다가 돌봐야 되는데 그것도 남도 아니고 내 조카들인데. 따뜻이 돌보는 게 좋다. 그러니 생각을 바꾸셔야 된다. 엄마 마음을 내는 게 기도지 뭐. 엄마 마음을 내는 게. 괜찮아요. 이미 지나간 거고. 지나간 거 자꾸 얘기해서 뭐해요? 지금이라도 참회하고 내가 어리석어서 나니 너니 구분하고 살아서 미워하고 원망하고 상처를 줬는데 “죄송합니다. 제가 어리석었습니다.”
이렇게 참회하고 “부처님, 저는 참~ 복도 많습니다. 애들 4명에 남자 둘에 부모 그늘이고 야~ 얼마나 복 받았어요.” 돈이 이렇게 들어온다면 갖다 버릴까? 이게 다 돈이라고 생각하고 기쁜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살면, 오히려 다 복이 됩니다. 그런데 수녀님들이나 스님들 보면 제 조카도 아니고 제 자식도 아니고 사돈의 팔촌도 아닌데 길거리에 버린 아이들 제 나라 아이도 아닌데, 남의 나라에 가서 모아가지고 수십 명씩 돌보잖아요. 그렇게 생각하면 4명 돌보는 게 뭐가 어려워요. 그것도 내 조카들인데. 엄마 없는 애들은 얼마나 마음 아프겠어요?
그러니까 내 아이보다도 더 걔들한테 정성을 더 쏟고 더 보살펴 줘야 될 거 아니오. 그 입장에서 보면. 똑같이 해줘도 아이들이 섭섭할 거요. 우리 엄마 아니라고 저러구나. 이렇게 똑같이 해줘도. 왜냐하면 애를 똑같이 키워도 동생은 동생이라고 섭섭해 하고 형은 형이라고 섭섭해 하잖아요. 엄마가 말할 때, 때에 따라서 뭐 특별히 좋아하고 미워하는 거 아니죠. 그냥 야단칠 때 어떤 때는 어떻게 말합니까? “형이 참아라. 조그마한 애하고 뭐 싸우노?” 이렇게 말하고.
또 어떤 때는 “동생이 참아라. 왜 조만한 게 형한테 대드노?” 이럴 때 무슨 구분해서 그렇게 합니까? 그냥 그때그때 상황 봐서 그렇게 말하는데 동생은 기억에 뭐만 남습니까? “늘 형만 두둔하고 엄마는 나만 야단쳤다.” 이러고. 형은 나중에 또 크면 뭐라고 그래요? “늘 엄마는 동생만 감싸고 무슨 일만 생기면 알아보지도 안하고 형이라고 무조건 야단쳤다.” 이렇게 상처를 입는다. 이 말이오. 같은 형제를 두고 엄마가 얘기를 해도. 그러니까 똑같이 대해도 조카들이 상처를 입어요. 우리 엄마가 아니라서 우리를 저렇게 괄시하구나.
그런데 하물며 더 차별했다면 지금 심보를 가지고는 아이들한테 안 좋다 이 말이오. 그러니까 내 아이들 보다도 더 정성을 기울여서 돌봐줘야 됩니다. 내 아이들은 조금 소홀해도 상처가 적고 의무적으로 의식 이렇게 하지 말고, 진짜 마음을 내서, ‘아이고 엄마 없이 애들이 얼마나 힘들까. 내가 엄마는 아니지만 너희 엄마 되어 주겠다.’ 이런 마음으로. 그렇게 돌보고 시동생도 아내 없이 남의 집에서 빌붙어 살면 어떻겠어요? 눈치 보일까? 안보일까? 보이겠죠.
그러니까 “아이고 너무 신경 쓰지 마세요. 다 한 엄마 밑에서 사니까 자기 집이라고 생각하고 편안히 사세요.” 이렇게 오히려 형수가 격려해주는 게 좋지. 눈살 찌푸리고, “빨리 나가라. 왜 안 나가노?” 이러고. 그렇게 해서 나도 불편하고 눈치보고. 그러면 어떻게 되느냐? 은혜를 베풀어줘도 나중에 남는 거는 은혜 입었다는 생각은 추호도 없고 괄시받았다는 생각만 있기 때문에 나중에 원한을 사게 됩니다. 그러니까 도와주고 손해보고 이런 두 가지 재앙을 초래한다. 그러니까 어머니보고 “애들 내보냈으면 좋겠다.” 하는 생각이 있다면 어머니가 그 생각하기 보다는 “네가 나가라.” 하는 생각이 더 많을 거 아니겠냐.
내가 나갈 수 없다면 저들도 내보낼 수가 없는 거다. 그러니 이것은 한집에 당분간 살 수밖에 없다. 그러니 한집에 안 살려면 이제 어떻게 해야 될까? 다니면서 이제 예쁜 여자를 하나 구해가지고 시동생, 재혼을 하도록 도와줘서 애들 잘 돌볼 만한 여자가 있으면 그렇게 하면 또 모르겠지. 그러기 전까지는 한집에 같이 살아야 돼. 이거는 무슨 윤리도덕 법률로 따질 일이 아니오. 인륜으로 보면 다 내가 돌봐야 할 인연이다. 그런 인연이 됐을 때 기꺼이 돌보는 게 부처님의 가르침이고 그것이 나에게 큰 복이 된다.
그런데 마음을 넓게 가지고 다 돌보면 먹을 건 생겨요? 안 생겨요? 저절로 생깁니다. 예. 자꾸 나가라. 이렇게 하면 내 보내는 방법이 있습니다. 자기가 저절로 나가게 내가 일러줄까요? 내가 “나가라” 안 해도 나갈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쳐 줄 테니까 해보시겠어요? 아주 쉬운데. 네? 관심 있으면 내 일러줄게요. 첫째 남편이 사업이 망해버리면 되요. 그래가지고 지금 사는 집도 잡혀서 날아가 버리면 나갈까? 안 나갈까? 한번 생각해 보세요. 나갈까? 안 나갈까? 나가겠죠?
그러니까 내 보내려면 내가 망해버리면 되요. 그게 낫겠어요? 안 망하고 데리고 사는 게 낫겠어요? 선택의 문제요. 자꾸 나가라. 나가라 하는데 상대가 나갈 의양이 없는데 자꾸 나가라 나가라 하면 부처님이 나가게 해주셔야 되잖아. 자꾸 기도를 하니까. 그죠? 그러면 망하게 해서 내보내죠. 그러니까 그런 나쁜, 마음을 잘못 먹으면 이런 나쁜 재앙이 와. 기도를 잘못하면 재앙을 자처한다. 이 말이오. 그러니까 어떻게 “부처님 저 삼촌 내 보내주세요.” 이러면, 이런 방법밖에 없다. 이 말이오. 으흠.
그러니까 자꾸 같이 살려는 마음을 내야 자기가 나가는 건 자기일이지만, 나는 살려는 마음을 내야 어때요? 같이 살 수 있는 경제력도 생기고, 살려면 죽을 사람도 명이 길어져야 같이 사니까 이런 일이 생긴다. 그러니까 이것이 그를 위해서 이렇게 하라는 게 아니라 이래야 내가 재앙을 초래하지 않고 내가 복을 받는 법이다. 이 말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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