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하는 거는 어떻게 하면 잘 하나? 하는 방법이 있지만, 들어주는 거는 방법이 없어요. 그냥 들으면 되요. 듣는데 무슨 방법이 필요해요? 담배를 피우는 데는 여러 가지 방법이 있지만, 담배를 끊는 데는 방법이 없어요. 그냥 안 피우기만하면 되요. 술을 마시는 데는 여러 가지 기술이 필요하지만 술을 끊는 데는 기술이 필요 없어요. 그냥 안 먹기만 하면 되요. 끊는 거는 뭐요? 자기 할 말이 있다는 얘기 아니오. 자기 할 말을 하지 말고, 들어준다면. 그러니까 그거는 선생님 질문이 이렇게 되어야 되요.
“어떻게 대화를 상대하고 원활한 대화를 할 수 있습니까?” 이렇게 나한테 물으면 내가 “내 할 말 먼저 하지 말고 상대 말 먼저 들어주세요.” 이거는 그 질문에 대한 답이 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들어줍니까?” 하면 답은 “그냥 들어줍니다.” 이래요. “그런데 안 들어줘지고 자꾸 나서서 끊게 되지 않습니까?” 그러니까네, 그거는 들어주는 자세가 아니라는 거죠. 그러니까 내가 지금 들어주는 자세가 안 되는 거요. 듣고 싶지가 않은 거요. 말하고 싶은 거요. 말하고 싶어서 듣기 싫어서 안 듣는 거지, 내가 들어줘야 되는데 무슨 방법이 있는 거는 아니다. 이 말이오. 그냥 들으면 되니까.
이 세상 사람은 지금 말한 데로 다 자기를 중심에 놓고 세상을 봅니다. 이건 나빠서 그런 거 아니에요. 제가 볼 때는 저 뒤에 방송실은 앞에 있습니까? 뒤에 있습니까? 제가 볼 때는? 앞에 있죠. 여러분들 입장에서는 앞에 있어요? 뒤에 있어요? 뒤에 있지. 그럼 제가 저 앞에 있는 방송실 말이야. 그러면 여러분들이 “그게 어디 앞에 있노? 뒤에 있지.” 이래. 그럼 제가 “아니 내 눈앞에서 딱 보이는데 그게 어떻게 뒤고? 앞이지.” 그러면 “스님은 눈이 뒤통수에 달렸나? 우린 분명히 뒤쪽에 있는데 왜 앞이라 그러냐?” 이렇게 논쟁이 된다. 이런 얘기요. 이게 현실이란 말이오.
그러니까 우리 서해도 한번 보세요. 중국에서 보면 동해요? 서해요? 동해고. 우리가 보면 뭐다? 서해죠. 우리가 볼 때는 우리 동해가 동해지만 일본이 볼 때는 뭐다? 서해가 되죠. 이렇게 다르다는 거요. 이게 무슨 특별히 그 사람이 모자라서 그런 거 아니오. 인간이 사물을 인식할 때 그 인식의 기초가 자기를 기준으로 해서 사물을 인식한다. 이런 얘기요. 그건 위치적인 기준만이 아니라, 자기가 성장해 온 어떤 배경에 기준을 두고 인식을 하는 거요. 그래서 우리가 한국을 기준으로 해서 인식을 하면 안중근 의사는 뭐가 되고? 애국자가 되고, 일본사람의 기준에서 보면 뭐가 된다? 테러리스트가 되는 거요.
우리가 기준으로 볼 때는 논개는 애국자죠. 그런데 일본 기준으로 일본군인 기준으로 보면 뭐다? 자살특공대요. 껴안고 같이 물에 빠져 죽으니까. 그런데 이런 걸 갖고 누가 옳으냐고 밤새도록 논쟁해봐야 해결이 안 돼. 다수라고 이건 해결이 안 된다는 거요. 한국에서는 애국자라는 인식이 다수죠. 여기서 소수 한두 명, 반대가 있을까? 말까요. 그런데 일본사람까지 포함해서 다수로 잡으면 인구가 일본이 많으니까 누가 다수다? 일본이 다수가 된다. 이런 얘기요. 그러니까 이런 논쟁은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라는 거요. 그런데 인식하는 나는 옳고 그름의 문제요. 분명히 저것은 앞에 있지 이게 어떻게 뒤에 있을 수 있냐? 그건 말장난이다. 이렇게 되요.
그러나 우리가 전체를 생각하면, 나만이 아니라 너까지 우리를 같이 생각하면, 누구의 생각도 옳은 것도 없고 그른 것도 없어요. 다만 여기서 객관적인 진리를 생각이 서로 다르다. 이것만 객관적인 진리요. 다르다. 그러니 다른 사람의 얘기를 먼저 인정해라. 그러니까 일단은 나와 다른 것을 인정하고, 그쪽에서 청중 쪽에서 내가 앞이다 여러분이 뒤 다하면 뒤라는 걸 첫째 인정하고, 두 번째 저 청중 쪽에서 볼 때는 뒤에 있다고 느낄 수가 있겠구나. 뒤라고 생각할 수가 있겠구나. 이렇게 이해하는 거요. 이걸 갖다가 나와 다른 상대를 인정하고 뭐하는 거다? 이해하는 거요.
그러니까 내가 생각할 때, 얘는 왜 잘려면 불을 끄고 자기 내가 아빠가 공부하라는 것도 아니고. 이렇게 생각해서 불 끄라고 요구를 하는 거고, 애는 잘 생각이 없이 잤기 때문에. 쟤가 불 끌 생각까지 했으면 자나? 안자나? 안자지. 공부하지. 자기는 안 자려고 했는데 자기도 모르게 자버렸기 때문에 불은 못 끄는 거요. 그런데 자꾸 와가지고 “잘려면 불 끄고 자라.” 하는데, 이건 아빠입장에선 “도대체 네가 공부 안하고 자려는 왜 불을 켜놓고 자나?” 이렇게 생각하지만 본인은 자려고 잔 게 아니기 때문에 자기도 모르게 잤기 때문에 불을 끌 수가 없는 거요. 불 끈다고 일어났으면 걔가 자겠어요? 공부를 하지. 이게 서로 다르다는 거요.
그럴 때 누가 나쁜 게 아니라 서로 다르니까 그걸 인정하고 그편에서 이해하는 거요. 딸이 잘했다. 이 얘기가 아니에요. 자는데 불 켜 놓고 자는데 잘한 거요? 잘한 건 아니에요. 여기에 관점이 서로 다르다. 이것을 우리가 이해하게 되면 서로 다름에도 불구하고 다툴 일은 없다는 거요. 다툴 일은. 그러니까 우리가 듣는다 하는 거는 저 사람입장에서는 저렇게 말 할 수도 있겠구나. 이런 게 듣는 태도죠. 그러니까 이해하는 입장에서 듣는 들으면 잘 들리죠. 그런데 저 말도 안 되는 소리 하고 있다. 이렇게 들을 때는 어때요? 안 들리지. 소리만 왔다 갔다 하지 안 들리죠.
백분 토론회 보세요. 결론 납디까? 안 납디까? 안 나지. 거기 상대가 말하는 거를 상대편 토론자가 눈을 쳐다보고 있는데, 듣고 있다고 생각해요? 다음 말 뭐할 거를 생각하고 있다고 생각해요? 다음 말 뭐할 거냐만 생각하지 듣는 거는 아니란 말이오. 자기 얘기할 것만 생각하지. 그러니까 아무리 해도 결론이 안 납니다. 한번이라도 결론 난적이 있어요? 좁혀 지는 거라도 봤어요? 늘어나지. 간격이 더 늘어나지. 그러니까 이해가 필요하다. “아~ 야당입장에서는 저렇게 볼 수도 있겠구나.” “여당입장에서는 저럴 수도 있겠구나.” 이런 게 있어야 들린다는 거요. 그래서 평화로 가는 길은 나와 다른 상대를 인정하고 이해하는데서 출발해야 된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면서 “주여 저들을 용서하소서.” 라는 이 용서. 진짜 큰 사랑은 어디서 왔을까? 이해해서 온 거요. 이해해서. 무슨 이해? 그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그 두 사람은 어떤 사람이에요? 사형집행인이에요. 무슨 말인지 아시겠습니까? 아침에 출근해서 뭐하는 사람이다? 매일 사형수를 십자가에 못 박는 사람이다. 이 말이오. 그럼 그 사람은 자기가 지은 죄를 알까? 모를까? 몰라요. 어부가 물고기 잡듯이, 뭐~ 정육점이 주인이 맨날 고기 썰 듯이, 그 사람은 아침에 출근해서 “사람 못 박아라.” 하는 사람 못 박은 사람 걸고, 또 그것 때문에 월급 받고 살고 이런 사람이란 말이오.
그래서 예수님이 뒤에 뭐라고 그랬어요? “저들을 용서하소서.” 하고 뒷말이 “저들은 자기 지은 죄를 모르옵니다.” 그럼 예수님은 그 자기가 죽는 순간에도 그 사람의 처지를 이해했어요? 못했어요? 이해했기 때문에 이런 용서라고 하는 큰 사랑이 나왔단 말이오. 내가 만약에 그런 걸 이해 못했으면 어땠을까? 딴 건 몰라도 “저 두 인간은 지옥에다 콱 처넣어 버리세요.” 이렇게 얘기해야 된다는 거요. 그러니까 사랑은 이해를 기반으로 해야 된다. 이해야말로 진짜 사랑이다. 이렇게 말 할 수가 있어요.
그러니까 그런 처지에서 우리가 대화를 해야 되는데, 이렇게 말하는 나도 그게 안 될 때가 많죠. 왜? 하다보면 자기 판단이 먼저 서고, “안 된다.” 이런 얘기를 하기 쉽지 않습니까? 그죠? 그러니까 우리가 대화가 하고 싶으면 나와 다른 상대에 대한 뭐? 인정과 이해를 기초로 해야 된다. 그게 안 되는 건 사실인데, 그걸 늘 돌이켜야 된다. 안 되는 이유가 상대 때문에 안 된다는 게 아니에요.
그러면 남북 간에도 똑같아요. 북한하고 교류하려면 “우리가 열 번 쯤 가야 쟤들은 한번 오기 시작할까?” 이렇게 생각해야 하고. “100명이 가야 5명이 올까?” 이렇게 생각을 해야 되는데, “우리가 한번 갔는데 왜 쟤는 안 오나? 뭣 때문에 가냐?” 이렇게 생각하면 교류가 안 돼요.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교류를 갖다가 지금 아빠가 딸한테 “야~ 소통하자.” 했는데 이게 안한다. 이렇게 따질게 아니요. 나는 상처가 없고, 딸은 상처가 있기 때문에 그러면 여기에 열 번이고 스무 번이고 서른 번의 노력을 해야 그게 이제 소통이 된다. 그런데 우린 자꾸. 여러분들 잘못해놓고 용서 빌 때도 “아이고 미안하다.” 이렇게 얘기하잖아요.
그런데 상대가 토라져서 말을 안 하면 성질 버럭 내잖아. “내가 사과 했는데 이게 안 받아 줘?” 이러잖아요. 그건 사과가 아니에요. 사과라면 열 번 스무 번 백번이라도 해야지. 상대가 받아줄 때까지 하는 게 사과지. “내가 사과를 세 번이나 했는데도 이게.” 그건 다 자기식대로 하려는 거란 말이오. 그런 데서 우리 모두가 잘 안되지만, 우리가 평화를 위해서 또는 화합을 위해서 우리의 발전을 생각한다면 우리는 이 세상에 나 혼자 사는 게 아니다. 불교인만 살고 있는 게 아니라 뭐도 살고 있다?
기독교인도 살고 있고 경상도 사람만 사는 게 아니라, 전라도 사람도 충청도 사람도 살고 있고. 진보적인 사람만 사는 게 아니라 보수적인 사람도 살고 있고, 젊은 세대만 사는 게 아니라 늙은 세대도 살고 있고, 남자만 살고 있는 게 아니라 여자도 살고 있다. 그것이 어우러져 있는 게 우리 공동체 사회요. 요즘 여기다가 출신이 다른 나라 다른 민족까지 들어와서 어때요? 같이 살고 있다. 이 국민 안에는 옛날에 빨치산 했던 후손도 대한민국 국민으로 살고 있고, 할아버지가 친일했던 사람 후손도 어때요? 대한민국에 살고 있다. 이런 얘기요. 이게 다 대한민국 국민이에요. 그러니까 그 어느 한 사람을 단죄해서 “너는 나라가.” 이렇게 말할 수가 없어요.
그런데 우리조금만 뭐라고 하면 어때요? “저거 북한 보내버려라.” 이런 얘기하잖아요. 그런 거는 굉장히 독선적이오. ‘자기 뜻에 안 맞으면 다 나쁜 놈이다.’ 이런 생각을 한단 말이오. 그래서 대화가 안 되는 거요. 지금. 그러니까 대화는 어떤 기술의 문제가 아니라는 거요. 듣는 거도 기술이 문제가 아니고, 또 계속 끝까지 들어주는 것만 들어주는 게 아니에요. 그러니까네, 나와 다른 상대를 인정하고 이해하는 바탕위에서야 되고, 못 들어주면 내가 못 들어준다고 얘기하면 되지 끝까지 들어줘야 될 이유는 없어요.
그런데 여기서 끝까지 들어 주느냐? 귀 막고 끝까지 들어주는 게 뭐가 중요해요? 잠시를 들어주더라도 이해하고 들어주는 게 필요하다. 그러고 시간이 없으면 못 들어주는 거죠. 관점을 그래 잡아야지 계속 들어주는 게 중요하다. 이런 뜻은 아니에요. 그리고 상대를 이해한다는 말은 상대가 옳다는 말이 아니에요. 남편이 술 먹고 오는 게 뭐가 옳아요? 그게? 그렇다고도 틀렸다고 할 수가 없다. 그 사람 입장에서는 그럴 처지, 그런 습관이 되어 있다. 그걸 가지고 우리가 이해하고 시작을 하면 소통이 된다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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