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제 스님 같은 중국의 임제종을 일으킨 스님께서 이런 말을 아주 강조해 놓은 적이 있습니다. 임제록에 그런 내용이 많이 설해져 있거든요. 앞서 말씀드린 데로 수도멸정이란 말이 사성제 도성제 멸성제를 말하는 거에요. 도와 멸은 사성제의 도성제와 멸성제이다. 이래서 마음은 본래 고요하다. 이게 불교는 특히 이 선에서 하는 말은 그 말을 두고두고 음미를 해야 되고 또한 그 한 구절의 말의 뜻을 참구해야 된다. 이렇게도 말합니다. 참해야 된다. 마음은 본래 고요하다. 음의 닦거나 닦지 않거나 이 말이오. 마음의 본체와는 상관이 없다. 우리 마음이 본래 그 모습을 그대로 놓고 말할 때는 닦거나 닦지 않느냐? 관계없다는 겁니다. 도를 닦는 다는 것은 중생의 망념에서 하는 말이에요.
그러니까 생각이 쉬어져버리면 혹은 생각이 끊어진다. 이런 말도 씁니다. 닦을 것도 없다는 거에요. 임제 스님 같은 중국의 임제종을 일으킨 스님께서 이런 말을 아주 강조해 놓은 적이 있습니다. 임제록에 그런 내용이 많이 설해져 있거든요. 앞서 말씀드린 데로 수도멸정이란 말이 사성제 도성제 멸성제를 말하는 거에요. 도와 멸은 사성제의 도성제와 멸성제이다. 이래서 마음은 본래 고요하다. 이게 불교는 특히 이 선에서 하는 말은 그 말을 두고두고 음미를 해야 되고 또한 그 한 구절의 말의 뜻을 참구해야 된다. 이렇게도 말합니다. 참해야 된다. 마음은 본래 고요하다.
그런데 화가 나면은 고요해지지 않죠. 온몸에 노기가 서려. 그래서 스스로 괴로워요. 스스로. 괴로워. 본래 고요한 마음인데 고요해지지가 않아요. 욕심이 내 마음속에 꽉 차면은 그 욕심대로 안 될 때는 너무나 답답해요. 고요한 마음인데 안 고요해져. 사람관계 어떤 감정이 서로 좋지 않은 이런 경우가 생길 때 내 마음은 본래 고요한 건데, 고요하다는 말을 한마디로 말하면 아무렇지도 않은 거에요. 생각이 다 가라앉으면은 그 상태가 아무렇지도 않은 거잖아요. 그런데 어떤 때는 미워죽겠어. 밉기만 하고, 보기도 싫고. 이게 무슨 조화인가? 불교 공부를 하면서 이 마음의 문제를 여러 각도로 생각해 볼 때 참 묘하거든요.
내가 왜 이러는가? 물어보면 내가 뭘 하고자 하고 내가 어떤 감정에 북밭혀 있을 때 그때 내 스스로에게 내가 왜 이러는가? 물어보면은 아무 이유가 없거든요. 대답으로 내놓을 말이 없거든요. 그런데 홀연히 감정이 상해 있고, 비위가 상해 있고. 그렇게 되는 경우가 많이 있죠. 또 다음 장의 내용을 말씀드리겠습니다. 동체대비가 참된 보시다. 서산스님이 마음이 안 생기는 것이 해탈이다. 이런 말씀하고 마음이 고요한 것이 이게 본래 마음이다. 마음, 심법은 고요하다. 이런 말씀을 해 놓으시고, 이어서 동체대비가 참된 보시다 라는 말을 하고 있습니다. 고요한 마음을 가지고 우리가 남에게 자비를 베푼다. 고요한 마음에서 남에게 자비를 베푸는 이게 진정한 보시다. 이런 얘기에요.
여기서는 또 어떻게 설명해 놨느냐 하면은 貧人빈이 來乞래걸커든. 가난한 사람이 와서 구걸을 하거든 뭐 좀 주십시오. 청을 한다. 이 말이오. 그럴 경우 隨分施與수분시여하라. 분을 따라서 베풀어주라. 능력대로 좀 나누어주라. 이 말이죠. 동체대비, 부처님의 대비를 同體大悲동체대비라합니다. 동체란 말은 나와 남을 하나로 생각하는 것. 남의 몸이 내 몸이라는 거에요. 그러니까 같은 몸이다. 이런 뜻 아닙니까? 이 양두사라는 얘기가 있어요. 양두사. 양두사가 글자 한자의 뜻대로 머리가 두 개 달린 뱀이에요. 머리가. 몸은 하나인데 머리가 두 개에요. 그래서 양두사. 머리가 두 개인 뱀이다. 이럽니다.
뱀도 입이 있지 않습니까? 한몸에 실제 양두사라는 뱀이 있습니다. 내가 어디 찾아보니까 인터넷에도 그 양두사 사진이 나와 있는 데가 있고, 책에도 나와 있더라고요. 찾아봤어요. 가다가 먹이가 나타났을 때 머리방향을 오른쪽 왼쪽이라고 두 개를 나눠 말할 때, 오른쪽 머리에 있는 입이 냉큼 먹이를 집어삼켜. 왼쪽 머리에 있는 입이 항상 선수를 뺏겨가지고 먹이를 먹지를 못해요. 그래서 얘기인데. 은연중 불만이 생겨. 먹이가 나타났을 때 항상 오른쪽 머리에 달린 입에게 먹이를 빼앗겨버리니까 나는 뭐하는가? 왜 먹이도 한번 제대로 집어삼키지를 못하는가?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한번은 오른쪽 머리가 먹이가 나타났는데 냉큼 집어삼키지를 않고 머뭇머뭇하는 거 같아요.
이때 왼쪽 머리 입이 잽싸게 이때다 하고 내가 찬스한번 잡아 보자하고 집어삼켰어. 집어삼켰더니 그건 먹어선 안 될 독이오. 독. 그래서 이 양두사가 죽어버립니다. 독을 먹고. 여기에 상징적인 뜻이 있어요. 어떤 면에서 인류사회라는 것이 한몸이오. 요즘은 너무 개인주의가 발달해 있지마는. 그러니까 먹이는 배에 들어가서 몸 안으로. 쉽게 말하면 배로 들어가서 배가 안 고프도록 하면 되는 거거든. 따지고 보면 오른쪽에 있는 머리에 있는 입이 먹으나 왼쪽에 있는 머리에 있는 입이 먹으나 마찬가지예요. 마찬가지다, 이 말이오. 그런데 몸은 하나고 똑같은 배라 할까? 뱃속으로 들어가는데, 입이 어느 입으로 들어와야 되느냐? 이것 때문에 서로 불만을 가지는 거요.
그래서 중생이 개개인의 업을 앞세워서 이기적인 자기 욕망만 충족시키려 하는 것은 양두사의 두 개의 머리 입이 서로 먹으려는 거와 같다. 이 말이오. 뜻이. 그래서 동체의식이 있어야 된다. 불교. 동체의식. 너와 내가 하나다. 동체의식. 그래서 부처님의 대비를 동체대비라는 거요. 동체대비. 남을 중생을 부처님처럼 생각한다. 자신처럼 생각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동체대비가 참된 보시이다. 가난한 사람이 와서 구걸을 하거든 능력대로 베풀어주라. 남의 몸을 내 몸처럼 생각하는 동체대비가 이게 참된 보시니라. 불교는 이 육바라밀이 대승불교에서 보살도 닦는 근본 덕목인데. 제일 먼저 보시바라밀이 있거든요. 보시. 베풀어 주라. 은혜를 베풀라.
더 쉽게 말하면 남을 도와 줄줄 알라 이 말이오. 불교 신심이 어떤 마음이냐? 이걸 대승기신론에서 성취발심장에 설명해 놓기를 첫째는 직심이란 말이 나옵니다. 곧은 마음. 곧은 마음이라는 말은 단도직입적으로. 우리 흔히 직설적으로 말할 때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지. 이렇게 표현해지는 경우가 있지 않습니까? 진여를 생각하는 거요. 부처님을 단도직입적으로. 부처가 곧 진여인데. 부처님을 이것저것, 이건가? 저건가? 분별심을 앞세워서 사량해서 따지지 말고, 오직 깨달음을 생각하는 진여자리, 부처님을 생각하는 그 마음을 직심이래요. 직심. 바로 하는 마음. 바로. (곧을 직)자를 씁니다.
그래서 이 마음이 먼저 갖추어져야 되요. 불교는요, 우리가 깨닫지 못한 중생이라도 깨달음에 대한 향수가 있어야 되요. 부처님에 대한 향수가 있어야 올바른 불자가 됩니다. 고향을 멀리 떠나서 객지에 사는 사람들이 때로는 고향에 대한 향수를 가지고 있거든요. 우리나라 남북이 아직도 통일이 안 되가지고 북한에서 옛날 남한으로 내려와 사는 분들. 고향 못 가잖아요. 그래서 가끔 이산가족 상봉이니 뭐 이런 나라에서 정부에서 주선해가지고 만나게 하는 일들도 있었지 않습니까? 고향에 향수 없는 사람이 누가 있겠어요? 부처님은 우리 마음의 고향, 어떤 면에서 다르게 표현하자면 영혼의 고향이에요.
영혼의 고향인 부처님에 대한 향수가 있어야 불교 정서가 일어나는 거고. 불교의 어떤 신행이나 수행이 바로 될 수 있는 겁니다. 그래서 직심은 바로 그거에요. 진여를 생각하는 마음이라고 했으니까. 두 번째는 깊은 마음이라는 마음이 나옵니다. 심심. 깊은 마음. (깊을 심)자를 썼어요. 이건 뭘 설명하는 말이냐? 일체 선법, 혹은 선행을 닦기를 좋아하는 마음. 말하자면 좋은 일을 하고 싶어 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어야 된다는 거에요. 좋은 일. 나도 이롭게 하고 남도 이롭게 하는 좋은 일을 하고 싶어하는 마음. 이게 갖추어져야 되요. 심심이라 합니다.
다음에는 여기 대비가 나왔는데 대비심. 대자는 생략하면 비심이죠. 남을 연민이 생각해 줄줄 알고, 남을 동정할 줄 하는 마음이 있어야 된다. 이거요. 나보다 딱한 처지에 처해있는 사람들에게 동정할 수 있는 그런 마음이 돼 있어야 된다는 거에요. 그래서 이 세 가지 마음, 직심과 심심과 비심이 갖춰지면은 믿음이 갖춰줬다. 이렇게 말하는 거에요. 그러니까 서양종교처럼 맹목적으로 믿는 게 아니오. 마음에 어떤 덕을 갖추어졌을 때 심덕이 갖추어졌을 때, 믿는다 하는 거에요. 이렇게 대승기신론이라는 책에 설명해 놨습니다. 自他爲一曰同體자타위일왈동체요. 나와 남이 하나인 것을 한몸이라 하고,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가는 것이 우리 집안의 살림살이다. 옛날부터 하는 말이잖아요. 공수래공수거.
옛날 어느 마을에 부자가 한 분 있었어요. 호의호식하고 참 남보다 부를 많이 누리고 그렇게 살았습니다. 부자도 때가 되면 떠나야 되잖아. 가야 되잖아요. 그래 참~ 부귀영화 누리고 한생을 잘 살다가 이 부자가 나이가 많아져서 연세가 많아져 결국 임종에 임합니다. 임종 직전에 이 부자가 아들을 불러서 특별한 유언을 남겨요. 어떤 유언을 남기느냐? 내가 죽거든 옛날 장례치를 때는 상여 만들고 이러지 않습니까? 우선 곽에다 사람 시신을 넣지 않습니까? 입관이라 해가지고. 아들에게 내 두 팔을 곽 좌우 양쪽에 구멍을 뚫어서 밖으로 드러나게 하라는 거에요.
상여를 곽 안에 넣어놓고 꽃종이 같은 거 이래 가지고 밖으로 장엄을 하지 않습니까? 상여 밖으로 내 두 손이 펴져 나오도록 하라. 옛날 설화인데요. 이런 유언을 했다. 그래요. 유언은 보통 지켜드리는 거잖아요. 그래서 아들이 아버지 유언대로 해서 장례를 치렀답니다. 우선 곽 양쪽으로 구멍을 뚫어가지고 죽은 시신의 손이 밖으로 나오게 하고, 그걸 또 상여에 얹어서 매고 가잖아요. 밖으로 손이 뻗쳐져 나오도록 했다는 겁니다. 부잣집 상여가 나가니까 마을 사람들이 전부 길로 나와서 구경을 합니다. 운구해 가는 상여를 다 보고 있어요. 그때 나이 많은 그 이웃 노인이 한 분 있었는데 마을 사람들이 전부 나와서 상여가 왜 저러느냐? 왜 상여 좌우에 손이 밖으로 나와 있느냐? 수군거렸답니다.
그랬더니 그 어른이 나이 많은 분이 지혜가 있는 분이었나 봐요. 동네사람들. 내 말 한번 들어보소. 귀를 기울였어요. 저 아무개 부자가 평생을 부귀영화 누리고 호의호식하면서 살았지마는 저 상여 좌우로 나와 있는 손을 보시오. 동네 사람들아. 갈 때는 내가 빈손으로 간다. 이거 동네 사람들에게 깨우쳐주기 위해서 일부러 저렇게 유언을 남겨가지고 상여를 매고 가게 한 것이오. 이렇게 해석을 했다. 해주었다. 이런 설화가 있습니다. 그래서 흔히 빈손으로 왔다. 빈손으로 간다. 이 말. 세속적으로도 자주 하는 말인데 요즘은 너무 많이 가질라 잖아요. 서울 사람들이 지방 사람보다 욕심이 더 많은가 봐. 집도 더 좋고. 뭐 건물도 아주 호화롭고.
그래서 이 시대가 점점 물질적으로는 고급화 돼요. 옛날보다 좋은 집에 살고 좋은 옷을 입고 또 좋은 음식도 먹죠. 서울에는 사실인지 아닌지 무슨 호텔에 가면은 한 사람이 먹는 한 끼 식사에 30만 원짜리가 있다면요. 그건 너무하다. 아무리 잘살지만 어떻게 한 끼에 30만 원짜리, 물론 그보다 더 비싼 음식도 있을 수 있기야 있겠죠. 물질적 고급이 인생 고급은 아니거든요. 그래서 고급 고급하는데, 어떤 물질적 가치를 우선해서 고급스럽게 살려고 하는데 인생 자체, 인격 자체가 높아야 되고 삶 자체의 질이 높아야 그게 고급이 되는 거 아니겠습니까? 그래 이 취부만 많이 해가지고 남보다 내가 많이 소유했다. 그게 이제 어떤 면에서 업보가 혹은 업장이 더 두껍다. 역설적으로 이렇게도 말할 수 있을 거 같습니다.
그래서 동체대비. 불교는 다른 종교보다 비의 윤리를 내세우는 종교에요. 비의 윤리. 자비할 때 동체대비 할 때 비. 비는 이건 남의 괴로움을 뽑아준다. 자비할 때 앞에 자자는 慈能與樂자능여락이요. 자는 남을 기쁘게 하는 거, 즐거움을 주는 거요. 비는 남의 고통 괴로움을 뽑아주는 것이다. 이렇게 해석을 합니다. 그래서 불교의 근본정신을 자비정신이라 이럽니다. 자비심으로서 가족 간에 서로 보살피고 돌보고, 자비심으로 이웃과 서로 어울려서 사이좋게 그렇게 좋은 인간관계를 맺어가지고 살아가야 되고. 나라를 위해서 세계를 위해서 전부 불교는 자비심을 바탕으로 해서 처신을 하고, 어떤 내 할 일을 해 가야 된다. 이렇게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싸인을 보낸 지가 벌써 돼서 오늘 시간, 여기서 마치겠습니다. 다음 주에 또 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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