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래 우리 마음은 순수한 마음, 곧 부처님과 똑같은 마음으로 탐욕이 없었다는 거에요. 意三業의삼업의 세 가지 있지 않습니까? 탐・진・치 삼독이라는 거. 그러니까 이 사람 마음에 독소가 있다. 이 말이오. 독소가. 독사 같은 뱀은 독을 가지고 있잖아요. 또 뭐 여러 가지 해충들 독을 가지고 있고, 병균을 갖고 있는 그런 종류들도 있습니다. 인간도 인간의 마음에 본래 없었던 것인데 잘못된 업에 의해서 삼독이 들어있다. 그게 탐욕이 첫째고 성내는 거, 진심. 분노. 그다음에 치심. 미혹, 어리석음. 그래서 이것이 있기 때문에 중생이 나쁜 방향으로 업을 짓는다. 이렇게 말합니다. 그래서 이 대목에서 생사를 벗어나려면 먼저 탐욕을 끊고 그리고 애갈을 제거해야 한다. 애욕의 갈증. 애갈.
애는 애갈은 이 말이오. 윤회의 근본이요, 욕, 탐욕은 생을 받는 연이 된다. 조건이 된다. 이 말이오. 그래서 이 애욕을 끊어버리자. 이런 본래 이 말은 능엄경이라는 경전 안에 설해져 있는 구절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불교의 이런 근본 가르침의 본뜻을 모르면은 사람 사는 게 뭐냐? 다 서로서로 사랑하고, 애정을 나누고, 그래서 가정을 기본단위로 해서 사회적인 어떤 공동체 속에서 안녕을 누리고 화목하게 살면. 물론 그것도 맞는 말이지만은 나고 죽는 생사의 근본 원리를 밝히면서 말할 때는 무엇이 우리로 하여금 몸을 받게 하며, 다음 생에 또 태어나게 하며, 이걸 설명할 때는 그 근본은 애욕에 있다는 거요.
쉽게 말하자면 결혼 안 하면은 아들딸 낳을 수 없잖아요. 그러니까 이 말이 우리 세속경계에서 좀 멀리 들리는 말이라고 느낄는지 모르지만은 말 자체는 나고 죽는 생사의 업보를 갖게 된 원인은 애욕에서 시작되는 거요. 이거는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거요. 그래서 이 장에서는 그걸 경계합니다. 애욕에 끌려가면은 생사를 벗어날 수 없다. 윤회란 말은 범어 삼사라samsara란 말이 있는데 함께 달려간다는 얘기에요. 우리가 이사를 갈 때 서울서 다른 도시로, 뭐 우리 대도시 세 개를 말하면 부산, 대구가 우리나라 삼대 도시 아닙니까? 그러면 서울서 부산으로 이사를 간다. 부산에서 서울로 이사를 온다. 대구로 간다.
이렇게 지역을 옮겨 가면서 이사를 하듯이 인간도에서 지은 업을 가지고 다음 생에 선업이 많을 경우에 천상에 간다는 거요. 악업이 많을 경우에는 악도 축생도나 아귀, 지옥 같은데도 간다는 거요. 그러면 여섯 갈래의 세계가 있는데 이 여섯 갈래의 세계를 이사 가듯이 사실은 직선적으로 오고 가는 거에요. 그런데 이 돈다. (바퀴 윤)자를 써가지고 그 뒤에 (돌 회)자를 붙여서 중국에서 표현을 했는데, 어떤 잠재적인 세력, 힘을 갖고 함께 달려간다. 이런 뜻이 있어요. 마치 강물이 흘러가듯이. 시냇물이 흘러가듯이. 그런 뜻을 가지고 있는 말이 윤회. 범어의 어원을 밝혀 말하면은 삼사라samsara라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앞에서 말한 말은 계를 지니면은 부처님 마음을 유지할 수 있고, 그리고 애욕의 경계를 초월할 수 있다. 그러면 자연히 선정을 이룰 수 있다는 거에요. 다음에는 선정에서 청정한 지혜가 생긴다. 이 말이 나옵니다. 선정, 마음이 고요해 흔들리지 않는 거, 그래서 선은 마음이 안 흔들리는 이걸 선이라 하는 겁니다. 마음이 흔들리면 선이 아니에요. 생각이 이 생각, 저 생각, 어지럽게 산란심이 되어가지고 흔들리면 선이 아니오. 옛날 중국 선종사에 전해지는 일화가 하나 있죠. 마조스님이라는 스님이 계셨어요. (말 마)자, (홀아비 조)자. 마조스님. 남악 회양선사의 제자였습니다. 남악회양선사는 육조스님의 제자, 5대 제자 가운데 적손으로 알려져 있는 스님이었습니다.
마조스님께서 어느 날, 법당 앞, 밖에 나와 가지고 좌선을 하고 계셨어요. 좌선을. 그때 마침 스승인 남악회양선사가 지나가다가 자네 거기서 뭐 하는가? 묻습니다. 스님, 그냥 여름 날씨가 덥다 합시다. 내가 밖에서 이렇게 좌선하고 있습니다. 좌선은 뭐 하려 하는가? 좌선해야, 스님이 왜 그렇게 말씀하십니까? 책에는 그런 말은 없습니다마는, 어서, 선의 목적이 견성이니까 견성성불이라 안 합니까? 깨달음을 얻어 부처 돼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래 듣고 남악회양선사가 지나갑니다.
다음 날, 또 마조스님이 법당 앞에 나와서 앉아 좌선을 하고 있었답니다. 그걸 또 스승인 남악회양선사가 봤어요. 회양선사가 마조스님 좌선하고 있는 앞으로 가가지고 기와장이라 하기도 하고 벽돌이라 하기도 합니다. 기왓장이든지 벽돌이지 상관없습니다. 이걸 스삭슥삭 돌 위에 갈고 있었다는 거에요. 그래서 마조스님이 아이, 스승 되는 스님이 자기 좌선하는 앞에 와서 기왓장을 쓰~ 싹~ 갈고 있으니 스님~ 지금 기왓장을 왜 갈고 계십니까? 물어봤어요. 그랬더니 남악회양선사 대답하는 말씀이 거울을 만들려고 그런다. 거울을 만들려고. 기왓장을 아무리 갈아도 거울이 될 수 없는 거에요. 옛날에는 동, 구리를 그렇게 닦아가지고 거울로 썼다 합니다. 그래서 동경이라 하는 말이 전해지거든요. (구리 동)자 (거울 경)자. 요새처럼 유리가 나오기 이전에.
그래서 기왓장을 갈아서 어떻게 거울이 됩니까? 했더니 누구는 가만히 앉아서 부처 되겠다는 사람도 있는데. 그와 똑같다는 얘기에요. 가만히 앉아서 부처 되겠다는 사람이나 기왓장을 갈아서 거울 만들려는 사람이나 뭐가 다르냐? 이거요. 이때 마조 스님이 그 말뜻을 알아차리고 그럼 스님 어떻게 하란 말씀입니까? 다시 여쭈었더니 비유를 하나 들죠. 소가 수레를 끌고 가다가 수레가 멈춰졌을 때 주인이 수레를 소를 끌게 해서 가던 그 주인이 있을 거 아닙니까? 주인이 채찍을 가지고 있는데, 소를 때려야 되겠느냐? 수레를 때려야 되겠느냐? 소를 때려야지 수레를 때려봐야 그 소가 안 나가잖아요. 걸음을 앞으로 걸어나가지를 않습니다. 이건 무슨 말이냐?
몸이 아무리 움직이지 않고 부동자세로 이렇게 앉아 있다 하더라도, 마음이 안 움직여야 선이 되는 것이지, 마음속으로는 온갖 생각이 이렇게 저렇게 움직여 마음이 흔들리면 그게 무슨 선이냐? 이런 뜻을 은연중에 깨우쳐 준 그런 일화라고 볼 수 있어요. 그래서 진정한 선정을 이루었을 때는 그 선정에서 깨끗한 지혜가 나온다. 선정에서 청정한 지혜가 생긴다. 無碍淸淨慧무애청정혜가 걸림이 없는 청정한 지혜가 모두 선정에서 생긴다. 선정에 들어가면 근심・걱정 없어지잖아요. 근심・걱정 없어지는 거에요. 선정에 들어가면 불안 공포가 없어지는 거에요. 선정에 들어가면 다른 것을 또 연관 지어 말하면은 죽음에 대한 공포도 없어지는 거에요.
생각이 일어나는 이게 병이거든요. 생각이 일어나는 게 병이에요. 그래서 생각을 병으로 말한 그런 옛날 조사스님의 말씀도 있었습니다. 생각이 많으면 병이 많으니라. 내가 서울을 오르내리면서 보니, 서울 사람들이 저 경상도 사람보다 생각이 좀 많은 거 같애. 산란하게 사는 거 같아. 그래서 점수 깎아야 되겠어요. 좋은 부분도 있지 마는. 생각이 많으면 이게 안 돼요. 행복의 조건에, 요새 현대적인 의미에서 단순해야 되는 게 있어요. 단순하지 못하면은 심플하지 못하면 행복 못 느껴요. 그래서 단순해져야 됩니다. 생각이 단순해 져야 되요. 그걸 어리석음으로 보면 안 됩니다. 소박하고 質直질직하다고 이렇게 봐야 되요.
복잡한 생각, 요새는 많이 배운 사람들이 많아가지고, 지적으로 지식하고 지혜하고 여기서는 지혜가 생긴다고 했잖아요. 지식하고 지혜하고 다릅니다. 지식은 머리에 알고만 있는 거에요. 행동으로 올바른 그런 실천이 지식 갖고는 잘 안 되는 경우가 많아요. 그러나 지혜는 단순한 지식이 아니에요. 진실한 마음이니까 진실한 마음은 행동도 그대로 따라는 거에요. 그래서 지혜에서 올바른 행동이 나오는 거에요. 물론 지식, 아는대로 행동할 때 지식도 행동을 올바르게 할 수 있다. 물론 이렇게 일반적인 상식으로 말할 수 있지마는 차원이 다른 거에요.
그래서 선정에 들면은 우리 마음이 편안해지고 거기에서 모든 지혜. 학교 다니면서 우리가 공부를 합니다. 이런저런 교과서를 통해서 뭐 초등학교 중고등학교 대학교 대학원 우리나라는 학계가 이렇게 돼 있는데 교과서를 통해서 많은 지식을 우리가 습득한다 할까? 이렇게 말할 수 있죠. 그런데요, 이 불교를 깊이 공부한 분들은 제 말을 이해할 수 있으리라 생각됩니다. 밖에서 얻어 들였다고 생각합니다. 밖에서. 가령 뭐 무슨 외국말을 하나 배웠다. 영어를 배웠다. 모르던 것을 책을 통해서 내가 배워. 단어도 외우고 또 회화를 할 수 있는 말을 내가 배웠다. 이거요.
그런데요, 그 책을 통해서 혹은 선생님의 가르침을 통해서 배워 얻은 지식이 본래 내 마음에 다 있던 거에요. 이거 아주 대단한 얘기에요. 본래 내 마음에 다 있던 거에요. 영어가 본래 내 마음속에 있었어요. 다른 어떤 과학적인 지식, 이게 본래 내 마음속에 있었다는 거에요. 서양철학자가 이렇게 말한 사람이 있습니다. 지식은 본래 인간의 마음에 갖추어 있던 것이다. 이런 말이 있어요. 그렇다고 보면은 선정에 들어가면은 지혜가 생긴다. 물론 이게 지식하고 앞서 말씀드린 차원은 달라요. 그래서 선정에 들어가면은 사는 걱정 없어진다. 이렇게도 말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아요? 지혜가 생기니까.
그래서 선정이 불교수행에서 가장 중요하다. 범부를 뛰어넘어 성인에 들어가고 앉아서 죽고, 서서 죽는 것이 다 선정의 힘이다. 가끔 옛날 큰 스님들, 수행을 깊이 한 스님들이 임종 시에 앉아서 돌아간 분, 근래도 뭐 우리나라도 큰 스님들 몇 분이 좌탈을 했다고 소문이 났달까? 그랬죠. 육조스님도 좌탈을 했고 중국 선사스님들이 앉아서 돌아간 스님들 많아요. 유명한 신심명을 쓴 서산대사가 나무 밑에 합장을 한 채 서서 돌아가셨다. 열반에 드셨다. 이렇게 책에 보면은 설명해 놨어요. 나무꾼들이 지나다가 보니 스님이 나무 밑에 앉아서 기도를 하시나? 이렇게 생각했다는 거에요.
그런데 책에 보면은 바람이 불었는데 이 장삼이 바람 불면 옷깃이 날리잖아요. 안 날리더라는 거에요. 그래 가까이 가보니 돌아간 채로 그렇게 서 있더라는 거에요. 그래서 그 나무꾼들이 가매장을 해줬다. 뭐 이런 얘기도 전해지고 나중에 어느 스님이 알고, 스님들은 주로 화장을 하잖아요. 화장을 해서 다비를 했다. 이렇게 책에 보면 설명돼 나옵니다. 또 어떤 스님, 오대鄧隱峰등은봉이라는 스님이 계셨는데, 이 스님은 아주 특이한 얘기가 전해져요. 설화입니다. 이거. 사실 여부를 따지라고 소개하는 거 아니고, 흥미 삼아 들어보세요. 법상에 앉아 이렇게 법문을 하시다가 대중을 향해서 대중아~ 부르더라는 거에요. 예. 대답을 하니까. 앉아서 죽은 사람이 있는가? 예.
좌탈한 스님들은 많아요. 어떤 스님은 법상에 올라가서 법문을 하는데 그날이 열반절이었답니다. 열반절이 2월 15일입니다. 음력으로. 2월 8일은 출가절이죠. 불교도 사대명절이 있지 않습니까? 부처님 탄신한 날, 석가탄일인데, 요새는 부처님 오신 날 이렇게 말하잖아요. 그다음에 성도절. 열반절, 출가절, 사대명절입니다. 불교. 그 열반절 기념법회를 했는 모양이에요. 그러면서 대중에게 열반을 설명하려고 열반이란? 이랬답니다. 열반이란? 그래 대중이 귀를 기울이고 다음 말을 들으려 했는데, 그래 놓고 말이 없는 거에요. 아무 말 안 하는 거에요. 가 보니 그 말 해놓고 그냥 돌아가셨다는 거에요. 열반엘 들어버렸다는 거에요.
그래서 어느 노스님은 최고 법문이다. 이래요. 열반이란 해 놓곤 법상에 앉아서 열반에 들어가 버린 거, 이게 진짜 법문이다. 그래서 이게 최고 법문이라는 거에요. 이런 우수개, 우스개는 아니죠. 이런 얘기를 해요. 등은봉 스님은 물은 거에요. 앉아서 돌아간 이가 있느냐? 서서 돌아간 이가 있느냐? 대중이 에. 예. 대답을 했어요. 그러면 물구나무 서가지고, 거꾸로 서서 죽은 사람이 있느냐? 그 얘기는 못 들어 봤습니다. 이래 대답을 했대요. 그러더니 법상에서 내려오더니 물구나무를 서더라는 거에요. 그래 돌아갔다. 책에 보면 그렇게 돼 있어요. 이게. 그런데 큰일 났어. 물구나무선 채로 시신이 꿈쩍도 안 해요. 안 떨어져요. 시신을 옮기려 하니까 떨어지지를 않는 거에요. 그래서 이거 옛날 선종에 전해지는 선화 하나 소개하는 겁니다.
대중이 어찌할 줄을 몰라서. 그래 한 이틀 지나서 이 스님의 누이동생도 출가해가지고 비구니 스님으로 수행을 잘했데요. 속가 오라버니잖아요. 부음을 듣고 찾아온 거요. 찾아오니 대중이 시신을 못 옮겨서 애를 먹고 있소. 물구나무선 채 딱 이적이 나타나 꿈쩍을 안 하는 거에요. 그래서 동생되는 비구니 스님이 오라버니, 입적해 있는 등은봉 스님이 살아생전에 개각을 부리더니, 개각은 엉뚱한 행동 부리는 걸 개각이라 그래요. 개각을 부리더니 죽고 나서도 대중을 애를 먹인다고 야단을 친 거에요. 애먹였으니 이제 넘어지라니까, 그때서 슬쩍 넘어지더라는 거에요. 그래가지고 누이동생을 기다렸다. 이렇게 뒷사람들이 얘기를 하기도 하고, 에피소드가 있어요.
그래서 이런 힘이 선정에서 나온다. 예. 앉아서 죽고, 서서 죽는 것이 다 선정의 힘이다. 물론 앉아서 죽으나, 서서 죽으나, 누워서 죽으나 죽는 자세에 무슨 문제가 있겠어요? 그렇지만 이런 어떤 선 수행을 통해서 내면적으로 얻은 힘을 때로는 발휘하는 수도 있었다. 이렇게 이해하면 되겠습니다. 그러므로 말하기를 성인의 길을 찾으려면 이를 여의고 선정 닦는 것을 도외시하고는 달리 길이 없다. 그러니까 마음을 고요히 맑게 마음이 안 흔들리도록, 불안 초조 뭐 온갖 근심・걱정 희로애락에 이렇게 쏠리고 저리 쏠리고. 맹자 같은 책에서도 유교에서는 중용이란 말이 있잖아요.
불교에서는 중도라는 말을 쓰는데 중용을 설명하기를 희로애락의 감정에 치우치지 않는 것을 중용이라 한다. 이렇게 해석해 놓은 글도 책에서 본 적이 있습니다. 우리는 감정을 가지고 마음이 이리 쏠리고 저리 쏠리고 이러잖아요. 이 불교에서는 선에서 특히 무심하라. 무심하라. 생각이 일어나도 그 생각 때문에 마음이 흔들리거나 관념적인 지배를 받지 않도록 하라. 그래서 이렇게 알고 불교의 수행을 착실히 해야 됩니다. 예. 오늘은 시간이 또 다 되어서 여기서 마치고요, 다음 주에 또 와서 같이 공부하도록 하겠습니다. 예. 안녕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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