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법문/지안스님_선가귀감

지안스님 특별법문 선가귀감 _ 제13회 동체대비가 참된 보시이다 (22:19)

Buddhastudy 2012. 3. 4. 20:28

  방송 보기: 불교TV

흐르는 세월이 강물과 같다. 이렇게 말하기도 합니다마는 설 쉰지 며칠 안 된 거 같은데 어제가 정월달, 관음제일이었죠. 25일이 지났습니다. 설 쇠고 난 뒤 벌써 25일 지나니 왜 이리 세월이 빠른가? 이렇게 생각되기도 합니다. 부처님 말씀 가운데 가장 자주 하신 말씀이 덧없다는 무상이라는 말씀이에요. 무상하다. 이 불교가 이 말로 중생들에게 여러 가지 가르침을 주고 어떤 생각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이렇게 볼 수 있습니다. 무상하다. 삼법인에 제행무상이라는 게 있죠. 모든 게 덧없다. 그다음에 나오는 말이 뭐냐? 괴롭다 하는 얘기요. 괴롭다.

 

불교는 괴로움을 떠나자는 그런 목적을 가지고 있는 종교입니다. 離苦騰樂이고등락이라 이러죠. 고를 떠나서 즐거움을 얻자. 태어나서 살다가 죽는 인생살이 자체, 이게 괴로운 것이다. 이렇게 해석을 했어요. 다시 말하면 불교의 인간 해석, 인생을 뭐라고 정의를 내렸느냐? 괴로운 것이다. 그리고 또 무아라는 말이 나오고 공, (빌 공). 공하다는 말이 나오죠. 그래서 부처님 말씀을 아함경에서 하나하나 죽~ 읽어보면 무상하다는 말씀, 괴롭다는 말씀, 내가 없다는 무아라는 말씀. 그리고 공하다는 말씀이 제일 많이 설해져 나옵니다. 이 불교의 네 말을 통해서 불교가 어떤 인생관, 어떤 세계관을 가지고 있나 하는 것도 엿볼 수가 있죠.

 

오늘은 44장에 나오는 말을 먼저 보겠습니다. 선가귀감은 선을 닦아서 깨달음을 얻는 거울을 말하는 제목인데, 이장에 와서는 마음이 일어나지 않는 것이 나지 않는 것이다. 이런 말이 나와요. 마음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말은 뭘 보고 들어도 마음이 안 움직다는 얘기에요. 사람의 마음에 생각이 일어나는 것을 파도가 일어나는 거와 같다. 물결이 일어나는 거와 같다. 이렇게 비유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보고 듣는 경계를 대할 때마다 생각이 일어나요. 그런데 생각이 일어나가지고 이것이 어떤 집착심을 만든다고 할까? 마음이 움직여져요.

 

그런데 이 대목에서는 경계를 보고 마음이 일어나지 않는 것이 불생이다. 나지 않는 거다. 생겨나지 않는 거다. 이렇게 말을 하시고. 다음에 또 이어서 나지 않는 것이 이게 무념이다. 무념상태, 생각이 없는 거다. 이거요. 또 생각이 없는 무념이 이게 해탈이다. 이렇게 설해놨습니다. 다시 말씀드리면은 경계를 보고도 마음이 일어나지 않는 것이 나지 않는 것이고. 나지 않는 것이 무념상태. 아무 생각이 없는 상태. 그러면 우리가 이렇게 좀 의아하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사람 마음에 어떻게 생각이 안 일어날 수 있느냐? 사람은 목석이 아니지 않느냐? 그런데 전에도 여러 차례 말씀을 드렸습니다마는 생각이 일어나도 그 생각에 내 마음이 안 흔들리면 되는 것이다. 이런 말씀 드렸죠.

 

그러니까 견물생심이라는 말이 있듯이, 뭘 보면 욕심이 생긴다. 갖고 싶은 이런 충동이랄까. 그러면 그 마음이 일어난 거잖아요. 그런데 보고도 무심해질 수 있는 거, 견물생심이 아니고, 봐도 본 것이 없는 상태. 이렇게 되는 경우가 있다는 거에요. 마음이 이렇게 되면은 이게 무념상태고 무념상태가 되면은 이게 바로 해탈이다. 그래서 마음이 안 일어날 때 이게 선이 되고, 또 달리 계정혜삼학으로 말하면은 계가 되고 정이 되고 혜가 된다. 주에 보면은 계율이나 선정이나 지혜가 하나의 셋이 다 갖추어져 있다. 擧一具三거일구삼 이라는 말은 하나를 들면 셋이 다 들어있다. 이런 뜻이에요.

 

그래서 각각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다. 계 속에 정이 있고, 정 속에 혜가 있고, 흔히 일반적으로 하는 말로 계정혜 삼학이 삼위일체다. 이렇게 말했습니다. 왜 그러면은 경계를 보고도 마음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이 무념도리를 이 대목에서 강조하고 있는가? 흔히 육조단경에도 강조하고 있습니다마는 선수행에 있어서 무념도리를 매우 중요시 여기고 있어요. 중요시. 왜 그러느냐? 마음 다음 장에는 이 말이 또 나오는데요, 마음의 법은 본래 고요하다는 거에요. 그러니까 불교는 본래의 마음으로 돌아가자는 거에요. 본래의 마음. 우리가 번뇌 망상을 일으키면은 이건 본래 마음을 떠난 것이에요. 본래 마음에서 이탈됐다.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공부를 할 때도 공부를 한다는 생각이 없이 해야 된다. 저번 시간에 금강경에 나오는 중요한 법문 내용 소개해 드렸지 않습니까? 중생을 제도해도 제도해주는 중생이 없다. 이런 말이 있었거든요. 그럼 뭘 하고 나서 뭘 했다 하는 것은 생각이 일어난 거고, 생각이 일어나면은 이게 본래의 순수한 마음에서 떨어진 거에요. 떠나온 거에요. 이래서 마음의 법은 본래 고요하다. 이런 말을 또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修道證滅수도증멸이 是亦非眞也시역비진야요. 본문 설명이 나오는데요. 도를 닦아서 멸을 증득하는 것이. 우리 흔히 도를 닦아서 깨달음을 얻는다. 이러지 않습니까?

 

이게 수도증멸입니다. 돈오는 뭐 이게 도승제, 사성제 가운데 해당하는 내용이고, 멸은 멸승제. 멸이 곧 열반이거든요. 그래서 도를 닦아서 열반을 증득하는 것이 얻는 것이 이게 참된 것이 아니다. ? 생각을 일으켜서 어떤 의도적인 마음이 되어서 뭘 한다는 거는 그건 마음이 나지 않는 상태가 아니다. 이거요. 무위심이란 말이 있습니다. 무위심. 함이 없는 마음. 무위심이 되어야 참된 수행이 이루어진다. 뭐 이런 뜻에서 한 말이다. 이래 볼 수 있습니다. 심법본적이 내 진멸야니라. 이런 말이 있어요. 마음의 법이 본래 고요한 것이 이것이 참된 멸이다. 열반이다. 이 말이오.

 

마음이 고요해지면은 이게 열반이다. 마음이 고요해지면은 경계도 의식되어지지 않아요. 봐도 봄이 없는 거에요. 들어도 들음이 없는 거에요. 그래서 열반경에 나오는 경 구절을 인용해 붙여 놨습니다. 그러므로 諸法從本來제법종본래 常自寂滅相상자적멸상이니라. 모든 법은 본래 항상 스스로 열반의 모습 그대로다. 이 말이오. 법화경 사구게에 제법종본래 상자적멸상. 이 두고를 먼저 말하고, 뒤에 佛子行道已불자행도기 來世得作佛내세득작불이라는 두 구가 또 있습니다. 법화경에서 가장 중요한 네 구절이다. 이래서 법화경 사구다. 이럽니다. 그러니까 본래, 이 본래라는 말이 불교에서는 이게 굉장히 깊은 뜻을 가지고 있는 말인데. 본래. 우리 흔히 쓰는 말이죠. 본래라는 말. 본래. (근본 본)(올 래). 본래는 그런 것이 아니었다. 본래는 어쨌다.

 

그러니까 이 불교는 사람이 이렇게 태어나서 일생을 살아가는 한 생을 두고 극명이라 하는데 본생이란 말을 써요. 본생. 부처님도 본생담이라는 내용이 있습니다. 본생의 얘기라는 뜻이죠. 범어로는 자타카, 이렇게 말하는데. 본생이 언제에요? 본생이라는 거는 어느 때다. 시간을 정해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 흔히 주소도 이사를 가서 옮기면은 현주소가 나오잖아요. 그런데 또 본적이라는 말도 썼고, 옛날은 원적이란 말도 썼어요. 원적이 어디냐? 본래 내 주민등록적 호적이 어디에 있었느냐? 뭐 이런 뜻으로 볼 수 있는 말이죠. 그렇듯이 생을 두고 본생이라 한다.

 

그러니까 이건 언젠가 알 수 없는 생인데, 우리가 가령 언제부터 나고 죽는 생사를 시작했는가? 이렇게 생각해 본다면은 가정을 해서 하는 말입니다마는 시작된 생이 있었을 거에요. 첫 번째 생이. 말하자면 이게 본생이 되는 거죠. 이게 본생. 그래서 이 본생 할 때 본은 시작도 없는 말하자면은 언제라고 스타트라인을 딱~ 제시할 수 없는 정해놓고 말할 수 없는 거에요. 여튼 그런 의미에서 본래라는 말이 여기 쓰여졌는데 본래는 고요했다 이 말이오. 본래는. 육조단경에도 이런 사구게가 있습니다. 이 법화경 이 대의와 비슷한 말인데요. 어떤 말이 있느냐? 겁화가 일어나서 바다밑을 태우고. 劫火燒海底겁화소해저라는 말이 있어요.

 

바람이 불어, 폭풍이 불어와서 산끼리 부딪쳐가지고 산이 전부 무너진다는 거에요. 폭풍이 불어 산끼리 부딪쳐도 이 말입니다. 이 말은 바다와 산이 없어진다는 얘기에요. 바다와 산이 없어진다는 말은 달리 말하면은 조금 알기 쉽게 설명해서 말하면 지구가 없어진다는 얘기에요. 지구가. 지구가 없어진다 해도 이런 뜻이죠. 가정법이니까. 지구가 없어진다는 건 뭐 우주, 이 천체 밤하늘의 별이 많이 있고 이 천체가 있는데 그게 없어진다 해도 이런 뜻입니다. 眞常寂滅樂진상적멸락은 참되고 한결같은 고요한 즐거움은 여적멸상이 나왔는데 거기는 진상적멸락은 이렇게 (즐거울 락)자를 붙였습니다.

 

涅槃相열반상 如是여시이라. 열반의 모습 그대로다. 아주 이 심오한 말이에요. 그래서 어떤 눈으로 보느냐에 따라서 우리는 이 현실이 앞서 말씀 드린 데로 괴롭고 무상하고 이런 세상이지만은 또 눈이 열린 깨달음을 체험한 분상에서는 이게 전부 헛된 가상으로 보이고, 진상이 보일 때 이게 열반의 모습이다. 이렇게 또 본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음은 본래 고요한 것이다. 여기서 고요하다는 말은 우리가 흔히 중생의 업 속에 가지고 있는 삼독심입니다. 욕심을 부리고 분노를 하고 화를 내는 거. 어리석은 그 치심을 가지고 있는데. 이런 마음이 없었다는 얘기에요.

 

전 시간에 말씀드렸습니다마는 깨달음을 중생 누구나 가지고 있었다. 깨달음을 가지고 있었다는 말은 사람이 누구나 마음을 가지고 있다. 이 말 하고 같은 말입니다. 열반경에 그렇게 설해져 나와요. 마음이 있는 사람은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무상정각을 이룰 수 있다. 얻을 수 있다. 이래 놨어요. 마음 없는 사람이 이 세상에 없지 않습니까? 그러면은 그 사람이 마음이 있으니까 그 마음에 무상정각이 갖추어져 있다는 거에요. 그래서 깨달음이라는 것을 우리는 외부에서 자칫 잘못 생각하면 찾아오는 것이라고 얻어오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데. 깨달음은 이미 내 마음속에 있다는 겁니다. 있다는 거. 이게 참 묘한 말이죠. 미묘한 말이죠.

 

마음은 본래 고요하다. 고요한 그 자리가 열반자리. 달리 말하면은 깨달음 마음이에요. 깨달은 마음. 눈이 눈을 보지 못하는 것이니. 눈을 본다는 것은 거짓이다. 이런 보충설명이 나옵니다. 사람이 눈으로, 밖에 있는 경계에 나타나는 물체를 보는 것이지 자기 눈을 자기가 못 보잖아요. 물론 거울을 통해서 보면은 거울에 비춰진 모습을 볼 수는 있습니다마는. 그러므로 문수보살은 생각으로 헤아렸지만, 유마거사는 말이 없었다. 이것은 유마경에 문질품이라는 품이 있는데 문수보살이 유마거사를 찾아가서 병문을 하는 그런 내용이 설해져 있는 품이 있습니다. 거기에 나오는 말인데. 유마거사가 끝에 가서 문구답하는 장면이 나오거든요. 그걸 인용해서 이렇게 말해 놨습니다.

 

도를 닦는 것이 열반을 얻기 위한 것이라 하지만, 본래 닦을 것도 없고 얻을 것도 없다는 뜻을 밝혀 놓은 대목입니다. 이 선의 말은 앞서도 여러 차례 말씀드렸습니다만 일반적인 교리 설명하는 말 하고, 경전에 어떤 나오는 대의, 어떤 뜻을 가지고 말하는 경우하고 다르다. 이 얘기겠죠. 마음은 본래 고요하여 닦고 말거나, 마음의 닦거나 닦지 않거나 이 말이오. 마음의 본체와는 상관이 없다. 우리 마음이 본래 그 모습을 그대로 놓고 말할 때는 닦거나 닦지 않으나 관계없다는 겁니다. 도를 닦는다는 것은 중생의 망념에서 하는 말이에요. 그러니까 생각이 쉬어져 버리면 혹은 생각이 끊어진다. 이런 말도 씁니다. 닦을 것도 없다는 거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