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래서 형장에 갇혔다가 서른한 살인가? 나이로. 형장의 이슬로 사라져요. 그래서 억울하게 생애를 일찍 마치고 맙니다. 그때 이제 임종게. 큰 스님들이 돌아갈 때, 자기 평생 살아온 어떤 소회를 또 수행한 어떤 소회, 소감을 간단한 싯구로 남겨 두는 것이 있습니다. 이걸 臨終偈임종게라 이래요. 임종할 때 남겨 놓은 게송이다. 게송이고 곧 한시. 시입니다. 그래 임종게를 승조법사도 남겼어요. 뭐라고 남겼느냐? 사대법무주. 이렇게 시작이 돼요. 사대는 원래 주인이 없다. 사대가 내 몸을 말하는 겁니다. 지수화풍. 색온. 내 몸. 우리는 내가 내 몸 주인이다. 이렇게도 말할 수 있죠.
또 주인이 있다. 뭐 이렇게 몸을 움직이고 다니는 주인, 차를 몰고 갈 때 운전수가 있듯이 기사가 있듯이 주인이 있다. 이렇게 말할 수 있는데. 성조법사는 임종게에서 사대는 원래 주인이 없고, 오온은 본래 공한 것이다. 이렇게 설했어요. 四大元無主사대법무주 五蘊本來空오온본래공. 그래 놓고 다음엔 옛날은 형장에서 망나니들이 칼을 가지고 죄인의 목을 치는 그런 사형법이 있었어요. 성조법사도 그렇게 죽었고요. 그걸 두고 將頭臨白刃장두임백인이라도 머리를 가져서 칼날에 댄다. 이 말은 반대로 한 말인데. 내 목을 번쩍 하는 칼날이 내려칠 것이지만은. 형장에서 사형을 당하니까. 恰似斬春風흡사참춘풍이라. 봄바람을 베는 거와 같을 것이다.
바람을 칼로 어떻게 베요. 마지막 사구가 흡사참춘풍이라. 봄바람을 베는 거와 같을 것이다. 그래서 임종게로써는 이 선조법사의 임종게가 수작이다. 아주 뛰어난 게송이다. 이렇게 말해 오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그런 얘기도 있는데. 여기서도 사대도 나라는 것이 없고, 오온도 다 공한 것이고, 그래서 이 육체라는 거는 뭐 쉽게 말해서 없는 것이다. 이런 뜻이에요. 참된 마음은 형상이 없어서. 자기 진심은 모양이 나타나지 않는다. 이 말이에요. 형상이 없어서. 가지도 않고, 오지도 않는 줄을 관찰해야 한다. 이걸 볼 줄 알아야 된다. 이거에요. 내 참 마음은 오고 가는 것이 없다는 것을 알아야 된다.
어제가 부처님 열반절이었습니다. 음력으로 이월 보름이 어제였습니다. 열반에 들기 전에 부처님께서 설법을 하셨어요. 그걸 열반경이라 합니다. 이월 보름 하루, 밤낮 동안 설해 놓은 법문이다. 대승열반경에서는 이렇게 말하죠. 열반경이 소승 열반경도 있고, 대승 열반경도 있는데. 우리나라는 주로 대승열반경을 많이 보아왔습니다. 부처님이 열반에 들 때. 부처님이 여기 임종이란 말 나왔습니다마는 임종하는 거에요. 이 육신을 놓고 말할 때는. 좀 있으면 임종해서 사바의 생애를 마치는 겁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부처의 몸은 없어지지 않는다. 이 말씀을 하십니다. 열반경에 설해진 중요한 내용을 간추리면은 가장 중요한 뜻이 뭐냐? 이걸 佛身常住說불신상주설이라 하는데. 부처님 몸은 항상 그대로 있다. 이 말이에요. 조금 있으면 죽을 텐데. 부처님 몸은 항상 그대로 있다. 이런 법문을 설해요.
몸이 죽는 것이 부처님이 죽는 게 아니라는 거에요. 그러니까 우리는 내 몸이 나다. 이렇게 생각하는데. 내 몸이 나가 아니란 이런 뜻이에요. 그래서 열반경 대의를 요약할 때, 불신상주설이 가장 중요한 뜻이고. 그다음에 常樂我淨상락아정이라 하는 涅槃四德열반사덕에 대한 법문이 설해져 있고. 또 일체중생이 전부 불성을 가지고 있다. 하는 一切衆生悉有佛性說일체중생실유불성설. 이게 중요한 대의로 요약이 됩니다. 달이 넘어가는 그 것에 비유해서 사람이 돌아가는 것을 달이 지는 거와 같다. 설해 놓은 내용도 있어요. 月喩品월유품이라는 품이 있거든요.
그러면 달이 졌다 해도 마찬 가지오. 해가 졌다. 없어진 건 아니에요. 동양에서 해가 지거나 달이 지면 서양에선 뜨잖아요. 지구가 동서, 이렇게 밤낮이 반대로 되니까. 그렇듯이 죽는 것이 죽는 게 아니라 이 세상에서 안 보이는 거다. 이 말이오. 그리고 이제 저 세상에 가서 다시 또 생을 받는다 할까. 윤회설대로 말하면은 이런 법문을 열반경에 설해놓았습니다. 그래서 가고 오는 게 없는 줄 알아야 된다. 이 말이오. 태어날 때도 성품은 나는 바가 없으면, 쉽게 말해서 우리가 태어날 때 몸이 부모 사이에서 태어났는데 마음은 태어난 게 아니라는 거에요. 마음은.
마음이 태어났다 생각하면 불교 이해 잘못하는 겁니다. 몸은 분명히 태어난 거죠. 부모 의지해서 태어난 거요. 그런데 내 마음. 이걸 자성이라 하기도 하고, 아까 참마음 할 때 진심이라고도 표현했죠. 이건 태어나는 게 아니라는 거에요. 서산스님도 그런 법문 남겼었죠. 머리털은 희어지지마는 마음은 희어지지 아니한다. 이런 구절을 시에 남기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죽을 때에도 성품은 가는 것이 아니다. 죽을 때는. 해서 불교를 믿을 때 처음에 이 불생불멸하는 진여를 믿는 것이 가장 으뜸가는 믿음이다. 한번 중간에 말씀드린 바도 있습니다. 맑고 고요하기만 해 주관과 객관이 하나일 뿐이다. 이런 말이 나와요.
이 도라는 것은 주객이 나눠지지 않은, 진리 당체를 두고 하는 말이에요. 참선수행을 할 때, 지금도 선방에서 수행 정진하는 스님들이 벽을 향해 돌아앉아서 참선을 합니다. 그걸 면벽이라 해요. 면벽이란 말은 얼굴을 벽으로 향했다. 이런 뜻이에요. 달마스님이 원래 중국에 건너와가지고 소림굴에서 9년 동안 면벽을 했다. 이렇게 알려져 있습니다. 그래서 이제 면벽. 이걸 네 자로 말하면은 面壁觀心면벽관심이에요. 얼굴을 벽으로 해서 마음을 관한다. 이런 뜻이에요. 이걸 줄이면은 면벽이란 말로 줄이지 않고, 壁觀벽관이라고 줄이는 수가 있어요. 이 벽. (벽 벽)자. 벽이 관한다. 벽관. 이게 무슨 말이냐? 마음이 벽이 돼야 된다는 얘기에요.
벽은 뭐요? 막히는 거잖아요. 공간을 막아 놓는 게 벽 아닙니까? 그럼 마음이 벽이 된다는 거는 마음에서 주관이 생각을 일으켜서 객관대상을 뭘 인식할 때 이거는 주객의 통로가 생기는 거에요. 주객의 그 길이 만들어진다. 이런 뜻이에요. 주객의 통로를 막아버린다는 뜻을 가지고 있는 말이 벽관입니다. 그러니까 생각이 멈춰져야 되는 거에요. 생각이. 달마스님이 혜가스님에게 어떻게 하면 도에 들어가는가? 入道方便입도방편이라 그래요? 도에 들어가는 방편을 일러 준말에 外息諸緣외식제연하고 밖으로 모든 攀緣반연을 쉬라 이거에요. 외부에 시선을 돌려서 이것저것 살피지 말라 이런 뜻이에요. 창밖으로 시선을 보내지 말라 이런 뜻이에요.
外息諸緣외식제연. 內心無喘내심무천. 안으로 마음에 헐떡거리는. 천. 천식이라는 말이 있죠. 목에 끓는 소리가 나는 이런 일종의 병종인데. 이걸 천식이라 합니다. 헐떡거림이 없어야 해. 이 말은 마음에 쉽게 말해서 갈등 같은 거, 이래야 되는가? 저래야 되는가? 근심걱정이 일어나면은 이래야 될까? 저래야 될까? 생각이 자꾸 움직이잖아요. 이런 마음이 안 일어나야 된다는 거에요. 그래서 밖으로는 모든 반연이 쉬어지고. 안으로는 마음의 헐떡거림이 없어져 생각이 움직여서 자꾸 마음 자체를 흔들리게 해서는 안 돼요. 다음에 心如墻壁심여장벽이라야. 마음이 장벽과 같아야만이 주객이 막혀야 된다. 이 말이오.
마음이 장벽과 같아야만이 도에 들어갈 수 있다. 可以入道가이입도. 이렇게 말해줬다고 알려져있습니다. 외식제연하고 내심무천하야 심여장벽이라야 가이입도니라. 사구 송이 전해지죠. 그래서 실지 우리가 자기 인생의 문제를 편안하게, 모든 어떤 근심걱정에서 벗어나가지고 마음을 안정시키는 데는 이런 도에 들어가는 방법. 그래서 이 도를 찾으면은 인생의 고민도 우리가 벗어날 수 있다 할까? 문제 자체에서 뛰쳐나올 수 있는데. 도를 못 찾으니까 현실에 끌려가가지고 자꾸 여기에서 고민을 하고, 저기에서 고민을 하고, 어떤 면에서는 사람 사는 게 우습거든요. 그래서 어느 큰 스님은 이런 말씀을 하셨죠. ‘근심 걱정하려고 이 세상에 태어난 것이 아니다. 사바세계를 문대로 멋지게 한번 살아봐라.’ 이런 말을 남기시기도 했습니다.
다만 이와 같이 관찰하여 단박에 알아버리면 과거 현재 미래의 삼세에 구애되어 매이지 않을 것이다. 해탈을 할 것이다. 이 말이오. 이렇게 되면 바로 세상을 벗어난 자유인이라 할 수 있다. 자유. 자유라는 건, 자기 수행을 통해서 얻어지는 것이지 객관문제를 자기 마음대로 생각대로 한다해서 자유가 얻어지는 건 아니거든요. 이렇게 자유자재해지면은 부처를 보더라도 따라갈 마음 없고. 그때는 부처도 소용없어. 내가 부처니까. 지옥을 보더라도 무서울 게 없어야 한다. 생사의 고통 따위는 일어나지 않는다는 거에요. 화엄경에 보면은 또 이런 송이 있죠. 一切無礙人일체무애인 一道出生死일도출생사라 하는 구절이 있어요.
일체의 걸림이 없는 사람. 어디에도 구속받는 바가 없고. 마음이 어떤 지배를 받는 상태가 되지 않는 거. 이게 무애인 입니다. 일체무애인. 일체의 모든 것에 걸림이 없는 사람이라야 일도출생사라. 외길로 곧장. 이 말이오. 한길로 생사를 벗어날 수 있다. 이 구절을 신라시대 원효스님이 그렇게 좋아했다는 구절입니다. 서민들을 대하기 위해서 천촌만락을 다니면서 탈바가지처럼 무애가라고 적어서 춤을 추기도 했다. 이런 설화까지 전해지기도 하는데. 바로 무애정신. 어디에도 걸림이 없다는 것은 어떤 경계를 완전히 무시한다는 뜻이 아니고. 남의 입장을 다 무시한다는 뜻이 아니고. 내 자신 안으로 자유자재한 마음이 어디에도 장해를 받지 않는 거. 그래서 이게 중요한 불교수행의 정신이라 할 수 있는 겁니다.
다만 무심하기만 하면 법계 그대로이니. 여기서 법계는 진리 그대로라 이 말이죠. 이것이 가장 중요한 문제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평소 생활하는 거는 전부 결과를 초래할 원인이 됩니다. 우리의 일상생활 속에서 그때그때 어떻게 내가 행동하느냐 하는 것은 원인이 되고. 임종시는 결과가 되는 것이다. 공부해 놓은 이게 원인이 되고, 공부해 놓은 만큼 임종시에 결과가 나타난다는 거에요. 그래서 선수행하는 그 공부에서는 생사를 대적한다. 이런 말을 해요. 생사를 물리친다. 이런 뜻인데. 모름지기 이 점을 주의해야 한다. 이래놓고 여기 송을 하나 붙였는데 참 좋은 말이 나옵니다.
좋을 때에 자기를 밝혀라. 좋을 때. 아직 몸이 건강하고 또 뭐 그런대로 생활에 어려움이 없고, 나름대로 참~ 하루하루 공부할 수 있는 어떤 여력이 남아있을 때, 그때 내 자신을 밝혀라 이거에요. 좋을 때, 자기를 밝혀라. 인생, 허송하기 아주 쉽다. 이런 뜻에서 백년 세월이 깜빡하는 사이에 지나가 버린다. 틀려 지니라 이 말이 그런 뜻인데요. 백 년 세월이 눈 깜빡하는 사이에 지나가 버린다. 없어져 진다. 공부한 사람은 불교수행이 공부입니다. 불자들이 전부 공부하는 사람이에요. 불자들이. 공부인은 임종시에, 죽을 때 이 말이오. 평생을 해온 공부의 결과가 나타난다 하였다. 평생의 공부한 결과가 임종시에 나타난다.
그래서 어록에 어딘가 보니, 쉽게 말하자면, ‘죽을 때 한번 보자’ 하는 말이 있더라고요. 죽을 때 함 보자. 이 말이 무슨 뜻이냐? 네가 당당하니 잘 죽는가? 내가 당당하니 잘 죽는가? 이런 뜻에서 한 말이에요. 이 선에서 설해진 말들은 일반세속의 상색하고는 좀 거리가 있어 보이는 이런 말들이 많이 있거든요. 차원이 다르니까. 차원이. 사람의 참 마음의 성품은 나고 죽는 생사를 따르지 않는다는 것이 이 장의 대의이다. 그러니까 생사해탈법이 있다는 거죠. 생사해탈법이. 불교가 가르치는 것이 궁극적으로 이거 가르칩니다. 석가모니 부처님이 중생들에게 뭐를 가르쳤느냐?
생사해탈법이 있다. 운명을 벗어날 수 있는 진리를 찾는 길이 있다는 거에요. 석가모니가 그걸 체험으로 체득했고 그걸 보여준 거에요. 예. 오온이 모두 공하고 사대가 주인이 없다는 것을 관하고 나면은, 마음은 무심해져서 삼세의 업에서 벗어난다. 과거 현재 미래. 중생은 전에 말씀드렸죠. 결국, 우리가 이 세상을 살고 나니 결과가 어떻게 되는가? 내가 지은 업을 내 자신에게 상속시키고 마는 존재다. 이거에요. 내가 한생을 살면서 지은 업이 업 값으로 남게 돼요. 그걸 누구에게도 전과 못하고 내 자신이 다음 생에 가서 그대로 상속받아야 돼요.
그래서 중생은 스스로 지은 업을 자기 자신에게 상속시키고 만다. 이런 말을 합니다. 그래서 주관과 객관이 하나로 합일된 무심의 경지에서는 지옥의 두려울 바도 없고, 뭐 부처님 따라갈 필요도 없고, 불국토의 뭐 이러니 저러니, 그냥 모든 것이 쉬어져버린 거에요. 그래서 이런 경지를 해탈한 경지. 도를 통달한 경지. 이렇게 말한다. 볼 수 있습니다. 다음 시간에 또 한 시간 와서 같이 공부하겠습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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