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주일마다 무상사에 오셔서 이 시간엔 우리가 같이 공부를 합니다. 또 잘 지내셨지요? 박수 받을 라고 그런 거는 아닌데. 공부하는 즐거움. 이 불교에 법피라는 말이 있어요. 부처님 법을 배우는 즐거움이다. 이런 뜻이죠. 그래서 법피를 느낄 줄 아는 마음이 되면은 저절로 공부가 된다. 이렇게 말씀드릴 수도 있습니다. 오늘은 199쪽에 보면은 경을 볼 때 어떻게 보아야 되느냐? 특별히 서산스님께서 말씀해주신 내용이 나옵니다. 우리가 부처님 경전을 듣고, 경전의 말씀을 설해주는걸 듣는 것. 이건 저번 시간에 청경이라 이랬습니다. 그다음에 내가 직접 보는 것. 경을 많이 봐야 돼요. 불교도.
다른 종교 믿는 분들은 경을 많이 보는데, 불교는 수행방법이 다양하다 보니 경을 보는 분이 있기는 하지마는 전체적으로 볼 때 또 열심히 안보는 분도 있다. 이래 말할 수 있습니다. 경을 볼 때 어떻게 보아야 되느냐? 경을 보되 만약 자기 자신의 마음을 돌이켜보는 공부를 하지 않으면 비록 팔만대장경을 다 보더라도 아무 이익이 없을 것이다. 경을 보되 옳게 봐야 된다. 잘 봐야 된다. 그러면 옳게 본다는 게 무슨 뜻인가? 자기 자신을 행해서 자기 자신의 마음을 돌이켜 보면서 경을 봐야 된다. 그러지 않고 경을 보는 것은 팔만대장경을 다 보더라도 소용이 없다. 중요한 것은 경을 볼 때 내 마음을 돌이켜 봐야 된다. 반조란 말이 있습니다. 자기 마음을 살핀다는 얘기죠.
그래서 이 점을 강조해 놨습니다. 해서 모든 불교의 수행이 내 마음 밝히는 것이거든요. 공부가 내 마음 밝히는 겁니다. 네. 어리석게 배우는 것은 봄에 새가 낮에 우는 것에 불과하고 가을에 벌레가 밤에 우는 것과 같다. 이런 말이 있어요. 그냥 읽기만 하는 거는 그렇다는 거죠. 그래서 경을 볼 적에 자기 마음을 반조하면서 봐야 된다. 이조 때 靑梅印悟청매인오 선사라는 스님이 계셨습니다. 이 스님께서 불교의 공부를 할 때, 바로 해야 된다. 하는 취지에서 열 가지 경책하는 말을 남긴 것이 있어요. 十無益頌십무익송이라 하는데. 공부에는 경책이 있어야 합니다. 사실 사람을 올바르게 가르칠 때도 교육을 시킬 때도 경책이 있어야 돼요.
바로 하도록, 정신을 바로 차리도록 일러줘야 된다. 이런 뜻이죠. 십무익송에 보면은 첫 번째 여기 선가귀감에 나오는 내용과 똑같은 뜻인데요. 心不返照심부반조 看經無益간경무익이라 해서 마음을 반조하지 않으면 경을 보아도 소용이 없다. 이랬어요. 쉽게 말하면 자기 마음을 살펴야 돼. 내가 경전에 설해 놓은 그 진리대로 마음을 쓰고 있는가? 반성 따위를 해야 된다. 이런 뜻이죠. 그다음에 자성이 공한 줄 알지 못하면 좌선을 해도 소용이 없다. 불교는 깨달음의 체험을 하면은 이 세상에 대한 모든 것이 쉬워져요. 집착 따위가 없어진다. 이래.
그래서 공을 안다. 이럽니다. 공을. 공해진 이치를 안다. 꿈을 꾸던 사람이 몽경에 헤매일 때는 실제처럼 꿈인데. 실제인 것처럼 느껴지잖아요. 그래서 몽경에서는 그 몽경에 나타나는 그 경계를 따라 움직이면서 집착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잠이 깨져서 꿈에서 벗어났을 때 꿈은 없었던 거에요. 완전히 공해진 것이다. 이거요. 이렇듯이 공부라는 것이 공해진 경지를 터득한다. 이렇게 말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두 번째 심무익송의 얘기는 성품이 공한 줄 알지 못하면, 자성이 공한 줄을 알지 못하면, 참선을 해도 소용이 없다. 그다음에 또 몇 가지 일반적인 얘기를 더 얘기합니다.
정법을 믿지 않으면 고행을 해도 소용이 없다. 고행. 몸을 학대해 가면서. 옛날 인도에서는 고행주의 수행자들이 있었습니다. 가시덤불에 몸을 벌거벗은 체 던져놓고 가시에 찔린 체 피가 철철 넘치는 그 고통을 견디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몸을 학대하는 거죠. 부처님도 처음 고행을 했지 않았습니다. 그러나다가 나중에 고행이 바른 수행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버렸죠. 그런데 아무리 고행을 하는 정신이 지극하다 하더라도 바른 법을 믿지 않고, 정법을 바로 믿지 않고 고행해봐야 소용없다. 이 말이오. 가끔 종교계에도 사이비 종교랄까. 이런 종교단체에서 자살을 하고 하는 이런 사건도 오래전에 있었잖아요. 집단 자살. 예. 이게 정법을 바로 믿지 못한 탓에 그런 결과가 나타났다.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네 번째는 아만을 꺾지 못하면 법을 배워도 소용이 없다. 공부가 되면 될수록 겸손해져야 돼요. 우리 속담처럼 전해지는 말에 벼가 익을수록 고개가 숙여진다 하는 말이 있잖아요. 그래서 공부가 되면 될수록 겸손의 미덕을 갖추게 됩니다. 공부 좀 됐다고 남보다 잘난 체하고 이러면은 인격에 손상이 생기는 것이거든요. 남의 스승이 될 덕이 없으면 중생을 교화해도 소용없다. 중생을 교화할 때는 교화할만한 자격, 수행의 덕이 있어야 된다. 이런 뜻이죠. 또 안으로 진실한 덕이 없으면 밖을 이 일을 드러내도 소용없다. 사람이 속이 꽉~ 차야 돼요. 밖으로 뭐 남에게 보이기 위해서 아무리 치장을 잘 하고 다녀도, 그 사람 속이 비었다 할 때는 인격적으로 높이 평가를 못 합니다. 대접을 못해요.
그래서 안으로 진실한 덕이 없으면 밖으로 ‘이’라는 거는 몸에서 나타나는 여러 가지 동작, 모습, 이런 것을 ‘이’라 합니다. 마음에 믿음이 가는 진실이 없으면 말 잘해도 소용이 없다. 말만 잘해가지고 되는 게 아니거든요. 마음이 믿을 수 있어야 되죠. 진실해야 되죠. 원인을 무시하고 결과만 바라면서 도를 구해 봐도 소용이 없다. 화엄경에는 이런 말이 있습니다. 중생들은 결과를 두려워하고, 예를 들면 내가 나쁜 짓을 했을 때, 옳지 못한 짓을 했을 때, 안 들키면 된다. 이렇게 생각해요. 그런데 보살들은 인을 두려워한다. 이런 말이 있습니다. 인이 있으면은 원인이 있으면은 원인에 따른 결과는 오게 되어 있거든요.
그러니까 중생들은 원인은 무시하고 결과에 내가 어떤 손해를 당하느냐? 벌을 받느냐? 이점은 신경을 쓰는데, 보살들은 결과는 중시안하고 어떤 원인이 만들어졌느냐? 그걸 중요시 여겨서 조심을 한다. 이런 말이 화엄경에 설해져 있습니다. 그래서 여덟 번째, 원인을 무시하고 결과만 바라면서 도를 구해봐야 소용없다. 속에 든 것이 없으면서 아만을 부려봐야 소용이 없다. 아홉 번째 평생 개각을 부리면서 중생과 어울리지 못하면서 엉뚱한 행동을 하는 걸 개각이라 합니다. 대중이 모여살 때는 지켜야 할 천규같은 절 집안에서는 규칙이 있는데. 이걸 무시하고 혼자 엉뚱한 행동을 하면은 그게 대중에게 누를 끼치는 결과가 되죠. 그래서 평생 개각을 부리면서 대중처소에 살아도 소용이 없다. 십무익송의 내용을 간략히 소개했습니다.
그다음에 오늘은 좀 생략하고 뒤로 넘어가겠습니다. 왜냐하면, 중간에 스님들 경책하는 얘기가 몇 장 쭉~ 설해져 있어요. 쉽게 말해서 중노릇 잘하라는 이런 내용이 설해져 있는데. 요 부분은 생략하고 257쪽. 불교 선수행에서 아주 중요한 내용이 나오는 대목이 있습니다. 73장 257쪽입니다. 자~ 오늘 이 대목, 우리가 잘 보아야 되겠습니다. 중요한 말이에요. 참 마음은 생사를 따르지 않는다. 좀 얘기가 우습게 들릴는지 모르겠습니다마는 누구나 내가 죽을 줄은 알잖아요. 언젠가는 내가 죽을 것이다. 이건 명확한 일이에요.
화엄경에 보면 어딘가 그런 말이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확실한 일이 하나 있다는 거에요. 이 세상에 가장 확실한 일. 그게 뭐냐? 태어난 자가 죽는다는 사실이다. 태어난 자가 죽는다는 사실, 이게 이 세상에서 가장 확실한 일이라는 거요. 경문 속에 이런 말이 설해져 있습니다. 그런 말이 있는데 모든 것은 다 나중에는 죽는다, 生者必滅생자필멸이라 사자성어를 만들어서 말하기도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불교에서 생사를 따르지 않는 게 하나 있다. 이 선가귀감이 처음에 한 물건이란 말로부터 시작되었는데, 그 한 물건은 생사를 따르지 아니한다 이거에요. 생사를 따르지 아니하는 한 물건이 여기 다시 나온 말, 진심이에요. 우리의 참마음은 나고 죽고 하지 않는다. 이 말이에요.
그래서 어떤 면에서 이 말만 들어도 우리가 상식적으로 생각하든 죽음에 대한 어떤 공포심, 두려움, 이런 걸 좀 극복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 수가 있습니다. 하여튼 참 마음은 나고 죽고 하지를 않는다는 거에요. 생사를 따르지 않는다. 그 말이 그 말입니다. 범부인 사람이 보통 사람들, 일반 사람들. 임종을 할 때, 마지막에 숨 거두려 할 때를 임종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다만 오온이 모두 공한 것이며. 반야심경에 오온계공이라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색, 색은 우리 육체 자체를 말하는 것입니다.
지수화풍 사대로 이루어져 있는 거, 수상행식은 정신작용이라 말할 수 있는데. 수는 눈에 뭐가 보여지고, 귀에 소리가 들려오고, 말하자면 어떤 처음 감각이 일어나는 것이 수예요. 이걸 우리 처음 만난 사람 두고 말할 때 인상이 어떻더라. 이러죠. 인상이 좋더라. 그 인상이란 말이 오온 가운데 (받을 수)자로 나타내는 수온에 해당돼요. 뭘 보면은 처음에는 시계를 봤을 때, 우리 가끔 팔목시계 차고 다니면서 급할 때 시간을 보는 수 있지 않습니까? 시계가 내 눈에 보여 졌는데. 처음 시각이 일어날 때는 ‘지금 몇 시다’ 하는 걸 못 읽어요. 보고 큰 바늘 작은 바늘이 어떻게 돼 있는가? 이걸 살피고 나서 ‘지금 몇 시다’ 시간을 읽게 됩니다.
그러면 처음 시계가 눈에 들어오고 바늘이 우리 시각에 포착됐다 할까. 이럴 땐 수에요. 그런데 상이 따라 일어나죠. 상. 초상. 생각이 형성된다 할까. 생각이 형성되면서 생각도 움직입니다. 앞생각, 뒷생각, 정념, 무념이 있어요. 물이 흘러가듯이. 생각도 흐른다 말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의식을 흐른다. 이렇게 말해요. 그게 이제 행이에요. 행. 왔다 갔다 하는 걸 행이라 하잖아요. 의식주 삼권 다음에는 행문화가 옵니다. 중국의 소문이란 분이 그런 말을 하기도 했어요. 요즘 현대사회에 와서 행문화가 발달돼요. 가만히 한곳에 머물러 있는 사람들이 많지 않고, 전부 왔다 갔다 합니다.
누가 그런 우스갯말을 하던데. 서울에도 아파트촌 많지 않습니까? 아파트. 그런데 저 아파트에 낮에는 아무도 없다고 그래요. 유령의 집이에요. 그래서 낮에 전화를 해가지고 일반전화, 휴대폰 말고. 누구를 연락을 취해 보면은 안 받는다 이거에요. 받는 사람이 누구라든가? 아픈 사람, 제사 모시려고 밖에 안 나간 사람. 그게 그런 말이 나오듯이, 행이 발달돼 있는 사회다. 이렇게 말합니다. (행할 행)자가 그런 뜻인데. 오온에서 행은 생각이 이어져 움직이는 게 행입니다. 그러면서 식. 인식을 하는 순간. 그래서 이걸 오온이라 하는데. 이 오온이 실체가 없는 것이다. 공한 것이다.
아까 꿈이 공하다는 말을 한번 했죠. 그건 이해하기 쉽죠. 몽경이 있었는데 깨고 나면은 없어. 몽경 속에 있었던 겁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오온도 공한 것이다. 이 말이에요. 또 사대라는 거는 이 세권을 말하는데 지수화풍. 네 가지 원소입니다. 이 사대도 나라는 게 없어요. 僧肇승조법사라는 스님이 계셨어요. 동진 때 스님입니다. 구마라집의 수제자였다. 이렇게 알려져 있죠. 이 분이 억울하게 사형을 당했어요. 왜 사형을 당했느냐? 그 당시 왕. 여홍이 벼슬을 내였어요. 벼슬. 왕이 내린 벼슬을 거절을 해 버려요. 출가한 스님이 벼슬을 본래 이 출가 신분에 맞게 하려면 벼슬을 할 수 없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벼슬을 거절 해가지고 왕의 노여움을 삽니다.
'스님법문 > 지안스님_선가귀감' 카테고리의 다른 글
지안스님 특별법문 선가귀감 _ 제17회 본지 풍광을 밝혀야... (20:44) (0) | 2012.03.25 |
---|---|
지안스님 특별법문 선가귀감 _ 제16회 참 마음은 생사를 따르지 않는다 (42:28) (0) | 2012.03.18 |
지안스님 특별법문 선가귀감 _ 제15회 주력으로 숙세의 업장을 소멸 한다 (42:56) (0) | 2012.03.18 |
지안스님 특별법문 선가귀감 _ 제15회 주력으로 숙세의 업장을 소멸 한다 (20:16) (0) | 2012.03.18 |
지안스님 특별법문 선가귀감 _ 제14회 한 번 진심을 일으키면 백만 장애의 문이 열린다 (42:56) (0) | 2012.03.1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