맹렬한 불이 훨훨 붓고 보***에 보이는구나. 송에 이런 말이 나오는데요. 이건 이제 맹렬한 불이 훨훨 붓는다는 거는 중생의 업화를 말한 것이고, 보***에 보이는 거는 불법의 지혜를 얘기해 놓은 것이다. 이래 볼 수 있습니다. 수행자가 한 생애를 마치고 임종에 임할 때 견문각지 우리가 보고 듣고 느낀 이걸 견문각지라 합니다. 눈이 보고, 귀가 듣고, 육근이 육진을 반연해서 온갖 생각을 일으키는데 이걸 식심분별이라 해요. 이 識心分別식심분별은 움직이는 거요. 하나의 파동이에요. 이게 임종시에 남아있으면 안 된다는 거에요. 생각이 끊어져 버리라는 거에요.
유심정토를 설해놓은 사구의 게송이 있는데, 一念忘時明了了일념망시명요료하니, 한 생각이 없어져 버리면은 훤히 밝아진다 이거요. 그때는 아미타부처님이 특별한 처소에 있는 게 아니에요. 彌陀不在別家鄕미타부재별가향이라. 아미타부처님이 서방으로 십만억 국토를 지나면 극락이 있다. 아미타경에 나오는 얘기가 있거든요. 그건 타방정토의 얘기죠. 그렇지 않다 이거요. 아미타부처님이 어디 일정한 곳에 있는 게 아니다 이 말이오. 한 생각이 없어져 버릴 때 내 마음, 자성에서 아미타 부처님이 나타난다. 이런 뜻을 가지고 있는 말이에요. 通身坐臥蓮華國통신좌와연화국하니. 온 몸이 연꽃이 피어있는 극락국토에 앉았다 누웠다. 거닐다 멈추다. 사위. 행동거지를 말하는 겁니다. 處處無非極樂堂처처무비극락당 이로다. 곳곳이 극락의 집이 아닌 데가 없도다. 이런 사구송이 있습니다.
그래서 불교는 선리에 의해서 이해를 하면은 빠르기는 제일 빨라요. 물론 교리적인 그런 공부를 착실히 해야 되기도 하지만은 어떤 면에서 선적인 입장에서 불교를 이해하는 것이 좀 뭐라 할까? 지름길로 가는 길이라 할까. 이해의 차원에서도 그렇다 이거요. 깨달음을 체험하는 증득하는 분상에서도 그렇지만은 때로는 불교를 좀 더 확실히 단도직입적으로 이해하는 데 있어서는 설리적인 방법. 선의 이치에 입각해서 공부를 하는 방법도 좋다. 이렇게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일체의 지견이 끊어져 무념의 경지에 들어가 있어야 後有身후유신. 죽고 난 다음 생에 받는 몸을 후유신이라 합니다. 후유신을 받지 않는다.
나귀의 태나 말의 뱃속에 들어간다는 것은 축생의 몸을 받는다는 말이지만, 때로는 업식이 망망하여 지옥에 가는 것도 면치 못한다. 무심학도문이라는 말이 있어요. 이걸 선의 오종종지에는 들어가지 않는 우두법륭 선사가 주창했던 특별 선수행문이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무심해 지면은 도에 딱 들어맞는다는 거에요. 개합한다. 이런 말이 있는데. 그래서 죽을 때도 무심해져야 된다 이 말이오. 無心무심이 是道시도다. 이런 말이 있거든요. 그래서 선에서 말하는 얘기는, 일반 교리적인 얘기하고는 몇 번 말씀드렸습니다만 차원이 다릅니다. 차원이 달라요. 중간에 한 번 이렇게 얘기했지 않습니까? 지옥이 어떤 것입니까? 누가 질문을 했어요.
그렇다면은 지옥은 육도가운데에서 고통을 가장 혹심하고 받는 가장 괴로운 곳 아닙니까? 지옥이? 기독교도 지옥이 있잖아요. 지옥. 그렇게 설명을 해 줘야 돼. 지옥에도 뭐 여러 종류가 있어요. 팔열지옥 팔한지옥 아까 말한 확탕지옥. 또 도산지옥. 지옥에 대한 설명이 아주 자세하게 많이 나옵니다. 그래서 그런 게 지옥이다. 이렇게 알아듣도록 차근차근 설명해주는 거는 교회방편이오. 교회에서 설명해 주는 거다. 이 말이오. 그런데 어느 선사가 실제 그리했다고 전해는 얘기가 있습니다. 지옥이 어떤 곳입니까? 물었더니, 대뜸 주장자를 가지고 이마빡을 한 대 탁~ 때려주는 거요.
화가 나가지고 아니 스님, 내가 지옥을 물었는데 왜 사람을 때립니까? 껄껄껄 웃으면서 스님이, 내가 한 대 때렸더니 자네가 지금 화를 냈잖아. 때리니까 화를 내죠. 이 사람아, 화내는 그게 지옥이야. 멋진 설법이오. 화내는 그게 지옥이야. 이거는 교리적인 설명하곤 다르잖아요. 차원이. 그래서 이런 설명하는 그 차이가 있다 할까? 어투랄까? 대의가 좀 다르죠. 다음 장에는요. 목적. 이걸 밝히는 얘긴데. 보통 견성한다. 이러잖아요. 견성. 성품을 본다. 선의 목적, 견성을 달리 말할 때는 ‘본래 면목을 안다.’ ‘본지풍광을 밝힌다.’ 이렇게 바꾸어 말하기도 합니다. 이 장에서는 본지풍광을 밝혀야 한다. 본지풍광. 선을 배우는 사람들은 본지풍광을 본래의 모습이란 뜻이에요. 본지는 근본자리. 풍광은 경치라는 뜻도 됩니다. (바람 풍)자, (빛 광)자. 본지풍광을 만약에 밝히지 못하면은 옛 따로 높은 진리의 관문을 어떻게 꿰뚫을 수 있으리오.
관문을 뚫는다는 말, 이것은 간화선에선 화두를 타파하는 것을 그렇게 말하기도 합니다. 이따금 아주 끊어버려 없애 버린 것으로, 가끔 사람들이 일체를 부정해 버리는 거. 이걸 斷滅空단멸공이라 해요. 예를 들면은 내생도 없다. 물론 공영법문에 없다고 부정하는 얘기가 있다고 말했죠. 반야심경에 나오는 얘기처럼 오온이 모두 공한 상태에서는 아무것도 없다. 이런 얘기가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무조건 없다는 것을 단멸공, 惡取空악취공이라 그래요. 이건 사견이에요. 단상의견에 빠지는 것은 불법을 모릅니다. 불법 밖의 외도에요. 그래서 선한 사람들이 모든 것을 부정하는 이런 생각을 일으키면서 그게 바로 선이라고 생각하는 수가 있다. 아니라는 거요.
혹은 무기공으로 도를 삼는 수도 있어요. 무기라는 말은 선악이 아닌 거. 업을 보통 우리가 선업, 악업으로 구분 안합니까? 인과법에 의해서 말할 때는 선인선과, 악인악과 이렇게 말하죠. 그래서 선업을 지으면 선보가 오고, 악업을 지으면 악보가 온다. 이렇게 말하는데. 선악의 과보를 초치하지 않는 게 있다는 거요. 사람 경우에는 무의식적으로 하는 거, 그것도 논란이 있는데. 가령 어떤 사람이 잠을 자다가 잠꼬대로 어떤 말을 했을 때, 그건 의지가 실리지 않는 것이라 해서 일종의 무기로 취급하는 경우가 있어요. 의지가 없을 때는 그게 선악의 업보를 불러오지 않는다고 보는 견해가 있습니다. 또 바람소리, 물소리, 이거는 자연의 현상이잖아요. 우리 인간의 행위하고는 관계없는 거거든요.
그러면 바람 소리가 다음에 업을 가져오고 물소리가 다음에 업을 가져 오느냐? 아니라는 거에요. 업보를 가지고 오느냐? 이런 걸 무기라 합니다. 그래서 무기라는 말이 있어요. (없을 무)자. (기록한다 할 때 기)자. 무기공으로 선을 삼는 그런 폐단도 때로는 있다. 이거요. 또 일체를 전부 없다고 앞서 말한 단멸공이나 비슷한 말인데. 이런 견해를 가지고 이게 공부가 가장 높은 견해다. 이렇게 생각하는 경우가 있다. 이 말이에요. 그래서 이런 거는 전부 흐리멍텅한 상태에서 무조건 공에 도취된 그런 소견이다. 지혜롭지 못한 상태라는 거에요. 그래서 이런 것도 병에 깊이 든 것이다.
그래 요즘 천하에 선을 공부한다는 사람들이 이런 병에 걸린 경우가 가끔 있다. 이런 얘기를 했습니다. 그래서 이 대목에서는 정견을 가지고 공부를 해서 본지풍광을 밝혀야 된다. 본래 면목과 같은 얘기에요. 본지풍광이란 본래 면목과 같은 뜻으로 쓰이는 선가의 관용어입니다. 관용어다. 원래 본지란 불보살의 실상, 법신자리를 지칭하는 말로, 만물이 대지를 의지하여 있는 것처럼 제법의 근본 입각지를 말한다. 이 말이오. 풍광이란 풍경, 경치를 이르는 말로, 심성의 참모습이 고스란히 드러난 것을 형용한 말이다. 내 마음, 이거 있다 할 수도 없고, 때로는 없다 할 수도 없고.
마음이 어디 있는가? 찾아보면 없다잖아요. 능엄경에는 아란존자에게 부처님이 마음이 어디 있느냐? 물었습니다. 아란이 몸 안에 있다. 몸 밖에 있다. 중간에 있다. 일체 뭐 데이는 데가 없는 집착이 없는 곳에 일곱 곳에 마음이 있다. 대답을 했지만, 부처님이 전부 아니라고 부정을 합니다. 그래서 마음은 찾으면 찾는 데가 없어요. 찾아지는 데가 없다 이 말이오. 그러면서도 이게 만유를 일어나게 하는 근본이다. 법구경에 설해져 나오는 첫 구절이 마음이 만법의 근본이다. 하는 말입니다. 그래서 이 점을 특히 선에서도 강조하고 대승경전에서도 많이 강조를 하죠. 해서 이제 본지풍광을 밝혀야 한다. 이 말은 내가 누구냐? 그걸 알아야 된다는 얘기에요.
이게 선공부를 안 하면 이런 질문 자체를 이상하게 생각할 수도 있죠. 이 사람이 그냥 착하게 살면 되지 뭐 내가 누구냐? 철학자도 아니고 무슨 그런 질문을 하느냐? 그런 사람들 선공부 못하죠. 그런 사람. 그러니까 의심. 선에서는 이 의심을 맹목적인 의심이 아니라, 깨달음을 얻기 위한 하나의 준비과정이라 할까. 이런 차원에서 의심을 해야 돼요. 나에 대한 의심. 내가 누구냐? 이거 중요한 그 공부방법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다음에 시간이 얼마 안 남아서 마지막 대목이 있는데 325쪽. 오늘 이 시간이 아주 역사적인 순간입니다. 선가귀감이 끝나는 날이에요.
신령스러운 빛, 만고에 빛나다. 신령스러운 빛이 만고에 빛나다. 神光不昧신광불매 萬古輝猷만고휘유하다. 이 선방이 있는 절에 가면은 선방 문 앞에 이 글을 적어 **식으로 달아 놓은 데가 많아요. 신령스러운 빛은 우리 마음 빛입니다. 불교에서는 우리 마음을 빛으로 봅니다. 화엄경 같은 데는 보살들은 마음의 빛을 쓰고 활동을 한다. 이런 말이 있어요. 신광을 쓴다. 자심의 광명을 쓰면서 중생을 이롭게 해준다. 이런 말이 나오거든요. 그래서 우리 마음이 빛이에요. 빛은 어둡지 않아요. 빛은 서로 싸우는 일이 없어요. 등이 천개 만개 되어도, 요즘은 전등이죠. 전등이 천개 만개 되어도 그 전등에서 나오는 광선이 서로 싸우는 일이 없어요.
화엄 법문에서는 사사무애 법계의 이치를 비유하면서 설명하기도 합니다. 신광이 불매하야 만고에 희유하다. 신령스러운 빛이 밝기만 해. 만고에 빛난다. 이거요. 하늘의 태양이 만고에 밝은 거죠. 예. 그것처럼 우리 자신광명이 항상 밝기만 하다. 이거요. 이 밝은 자신광명에는 내 마음의 빛에는 생사가 없어요. 나고 죽는 생사가 없어. 운명이 없어. 어떻게 먹고 살고, 걱정도 없는 겨. 入此門內입차문내하여는 莫存知解막존지해어다. 이 문안에 들어와서는 지혜를 두지 말지어다. 알음알이 가지고 생각을 가지고 분별을 해서 이러쿵저러쿵 시비를 일으키지 마라. 이 말이오. 이건 오직 참구해서 아는 수밖에 없다. 이런 뜻이죠. 네. 그래서 마지막 이 신광불매 만고휘유란 말이 아주 중요한 말입니다.
이렇게 들어 종지를 제창해 밝혔지만. 서산스님이 마지막에 설명을 붙이는데요, 지금까지 선가귀감에서 선의 종지를 나름대로 이리 밝혀왔다. 서쪽에서 온 눈 푸른 중은 비웃으리라. 달마스님이 인도에서 중국으로 건너온 것을 서쪽에 왔다 합니다. 이게 하나의 또 화두죠. *** ** ***있고. 그러면 어쩌란 말인가? 아하~ 달이 홀로 강산을 비추어 고요하기 이를 데 없는데, 孤輪獨照江山靜고륜독조강산정한데. 自笑一聲자소일성이 天地驚천지경이로다. 절로 터져 나온 웃음소리에 하늘과 땅이 놀라버리네. 어떤 스님이 저 산속 깊은 절에 선수행을 하다가 소식이 와서 그래서 한 번 자신도 모르게 웃음소리를 냈어요. 그 웃음소리에 하늘과 땅이 놀라더라.
西來祖意最堂堂 서래조의최당당이오.
自淨其心性本鄕 자정기심성본향이로다. 나무아미타불
妙體湛然無處所 묘체담연무처소언만
山河大地現眞光 산하대지현진광 이로다. 나~무~~아미타~불
마지막으로 게송을 하나 풀어봤습니다. 서래조의 선의 대의를 뜻하는 말입니다. 이게 가장 당당하다. 공부하는데 가장 빨리 공부하는 방법이라 할까. 물론 불교가 뭐 온갖 무슨 수행방법도 있고 온 갖게 다 대한민국을 설명하려면 온 갖게 다 있잖아요. 그러나 대한민국을 얘기할 때 그래서 서울이 수도니까. 수도를 가지고 많이 얘기할 수 있죠. 그래서 서래조의가 선의 종지가 이런 뜻이죠. 가장 당당하니, 이게 공부하는 데 가장 빨리하는 공부랄까? 쉽게 하는 공부라고도 말할 수 있어요. 자정기심성본향이로다. 스스로 그 뜻을 깨끗이 한다는 말은 우리 마음을 깨끗이 하면은 그게 성품자리의 본래 고향이다. 이런 뜻인데 내 정체다 이거요. 내 identity. 내가 누구냐? 대답은 거기에 있다 이 말이오.
묘체담연. 묘체는 마음자리, 神光不昧신광불매한 그 자리. 묘체는 단면하여 모양도 없고 고요해. 눈에 보이는 것도 아니고 귀에 들리는 것도 아니오. 그래서 여기 있다. 저기 있다. 공간적인 상황을 설정해서 찾아낼 수 있는 게 아니오. 처소언만. 그런데 산하대지에서 참된 빛이 비춰져 나오고 있다. 우리 마음이 앞서 말씀드린 대로 신광이거든요? 이 신광불매하다는 말, 이 말을 기억하시고 선가귀감 강의를 이상으로 고만 마무리해 마치겠습니다. 잘 계시고 편안하게 전하십시오. 네. 네. 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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