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서울에도 봄이 느껴지죠? 봄이 왔습니다. 허허. 봄이 왔습니다. 허허허허. 봄은 희망을 상징하는 계절이다. 이렇게 말하기도 하죠. 만물이 소생하고, 꽃이 피고, 새가 울고, 그런데 봄이 어디서 옵니까? 오는 데가 없죠. 와도 오는 데가 없어요. 선가귀감 공부하면서 생각할 때는 마음에서 오는 거요. 마음에 봄이 오니까 봄이 오는 거요. 예. 불교는 우리 인간의 한 생애를 결산하고 났을 때, 다음 생을 기준으로 해서 말하는 경우가 자주 있습니다. 무슨 말이냐? 금생에 우리가 한 생을 살았다. 어떤 사람이 부귀영화를 누리고 한평생 잘 살았다.
금생을 놓고 말할 때, 남보다 호화롭게 생활을 하고, 요새 말로 하면 경제적으로 어떤 여유가 있어서 궁핍함이 없이. 가난을 모르고, 잘 살았다. 그것도 이제 세속생활에서 볼 때 좋은 것이거든요. 그런데 이렇게 결산하는 거는 금생을 기준으로 해서 말하는 거요. 그런데 다음 생에 가서 다음 생을 기준으로 말할 때, 금생, 다음 생에서 말할 때는 전생이 되죠. 전생에 이 사람이 아무리 잘 살았지만 지금 생에 어떻게 될 것이냐? 그때 기준으로 말할 때는 전생 것이 업이 좋아야 좋은 것이지, 업이 나빠졌으면 좋은 것이 아니다. 이런 결론을 내립니다. 그래서 다른 종교에서 하지 않는 특별한 얘기가 있어요.
다음 생에 사람 몸 잃어버리지 마라. 이거요. 다음 생에 사람 몸 못 받고 축생 보를 받거나 지옥에 가는 수도 있다. 이러면은 금생에 아무리 부귀영화를 누리고 잘 살았지마는, 다음 생에 축생 보를 받거나 지옥에 간다면은 그 앞 생에 잘산 것이 뭐 대수냐? 이렇게 이야기가 된다. 이 말씀입니다. 오늘은 261쪽. 74장을 보는데요. 이 장에 나온 말이 특이해요. 나귀의 태와 말의 배에 들어갈라. 조심하라 이 말이오. 나귀의 태. 나귀. 당나귀. 줄여서 나귀라고도 하죠. 말. 물론 말을 들어 얘기했지만은 소 말 짐승이 있지 않습니까? 배에 들어갈라? 무슨 말이냐? 금생의 수행이 잘못되어져서 다음 생에 엉뚱하게 짐승의 몸을 받을라. 조심하라. 이런 뜻이에요.
범부인 사람이 임종할 때에. 숨 거둘 때 이 말입니다. 만약 털끝만치라도 범부다, 성인이다. 하는 생각이 남아있으면. 이게 무슨 말이냐? 사람이 죽어도 생각을 가지고 간다 그래요. 가령, 원한을 품고 죽으면은 다음 생에 원귀가 되는 수가 있어서 원수를 갚으려 한답니다. 은혜를 품고 죽으면은 다음 생에도 그 은혜를 갚으려고 한다 그래요. 그래서 생생이 생각을 가지고 간다는 거요. 금생에 하던 생각이 내생에도 이어진다는 얘기에요. 우리가 쉽게 생각할 때, 과거생각이 지금까지 남아있지 않습니까? 어릴 때 생각했던 것이 지금까지 남아있다고 볼 수 있어요. 머릿속에 기억되는 수도 있지 않습니까?
그렇듯이 생각은 계속 이어진다는 거요. 생이 바뀌어진다 해서 생각이 몽땅 없어지는 게 아니다. 이제 이렇게 이해하시면 돼요. 그런데 선수행에서는 깨닫는 순간을 생각이 뚝~ 끊어진다. 이렇게 표현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전념후념이 끊어진다. 이런 말이 있어요. 앞생각, 뒷생각이 안 이어지고 딱~ 잘라져버린다. 이런 뜻이에요. 그래서 사람이 임종시에는 생각이 뚝~ 끊어져 버려야 된다. 없어져 버려야 된다는 얘기에요. 이런 뜻에서 이런 말을 이 대목에서 해 놓은 것입니다. 보통 사람들이 임종할 때에 만약 털끝만치라도. 이 말은 조금이라도, 정양. 정양이라는 것이 우리 생각으로 이리저리 헤아리는 걸 정양이라 합니다.
이게 남아 있으면은 이게 업식이 망망해지는 거죠. 이래가지고 나귀의 태나, 말의 뱃속에 들어가 몸을 의탁하는 수가 있으며, 앞서 말씀드린 데로 축생의 몸을 받게 되는 수가 있다 이 말이오. 또는 지옥의 끓는 가마 속에 삶기면. 화탕지옥이라고 천수경에도 나오죠? 가마솥에 물이 펄펄 끓는데, 거기에 들어 가가지고 삶긴다는 거에요. 泥犁鑊湯中니려확탕중이라 이랬는데. 니려를 지옥을 달리 표현한 말입니다. 확탕, (가마솥 鑊확)자가 있는데, 펄펄 끓는 가마솥 안에 들어가서 삶긴다 이 말이오. 또는 乃至내지. 나아가서 개미나 모기 같은 벌레가 되기도 하느니라.
불교 윤리의 가장 중요한 뜻을 가지고 있는 것은 생명의 평등성. 모든 생명 자체는 똑같다. 그래서 계율에도 제일 먼저 나오는 계율 종목이 불살생 아닙니까? 생명 자체에서 볼 때에는 사람 목숨이나 짐승 목숨이나 땅에 기어 다니는 벌레 목숨이나 생명은 똑같다는 거에요. 그래서 이 생명의 평등성을 불교에서는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점이 특이한 점이죠. 서양종교는 인간본위에요. 물론 불교도 인간본위, 인본주의 사상이라고 말씀드리기도 했습니다마는, 그러나 생명의 절대성을 강조하는 점에 있어서는 불교의 윤리가 특색이 있다. 고차원적이다. 이래 말할 수 있죠.
그래서 똑같은 생명인데 업에 따라서 인간의 몸을 받는 수도 있고, 축생의 몸을 받는 수도 있고. 나아가서는 지옥 같은 혹심한 고통을 받는 곳도 있다. 윤회설에 나오는 얘기 아닙니까? 이렇게 말합니다. 白雲守端백운수단 선사라는 스님이 계셨는데 이 스님이 남긴 말씀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설사 털끝만치의 범부다, 성인이다, 하는 생각이 깨끗이 없어졌다 하더라도, 가정법이에요. 나귀의 태나 말의 뱃속에 들어가는 것을 면치 못하는 수가 있다. 이건 공부가 다 되었다고 하는 사람도 잘못 축생의 몸을 받는 수가 있다는 거요. 선화에는 여러 가지 깊은 뜻을 담고 있는 얘기들이 많이 있습니다.
한 가지를 소개하면은 백장이라는 스님이 계셨어요. 百丈懷海백장회해 선사라고. 중국 선종사에 큰 자치 업적을 남긴 분이라 이래 알려져 있습니다. 이 스님이 법회를 열고 있었는데. 스님네와 신도님들이 모여서 백장스님의 법문을 들었어요. 그런데 법문을 들으러 왔던 사람 중에 노인이 한 분 있었어. 법회가 끝났는데도 이 분이 가지를 않고 저 절 마당가에 서성거리고 있었답니다. 그래서 백장스님을 한번 뵙고 싶다. 지나가는 스님한테 부탁을 한 거에요. “내가 큰 스님을 한번 뵙고 싶은데 안내를 좀 해줄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젊은 스님이 이 노인장을 백장스님 방으로 안내를 했어요.
인사를 하더니 나도 전생에 전생 얘기를 하는 거요. 스님처럼 여러 대중을 모아놓고 설법을 했던 스님이라는 거요. 전생에 나도 스님처럼 떡~ 이렇게 설법을 하고 있었다 이 말이오. 많은 스님네와 신도들을 향해서. 그런데요. 그래서 백장스님이 그래서 어떻단 말씀입니까? 했더니. 내가 전생에 설법을 하고 지낼 때, 어떤 학인이 선수행 하는 스님 한 사람이 내게 질문을 했어요. 질문을 하는데 그 질문이 어떤 질문이었느냐? 하면은, 대수행인도. 대수행이란 말은 크게 수행한 사람, 곧 도를 이룬 사람이다. 이런 뜻입니다. 수행을 완성한 사람. 대수행인도 크게 수행을 해서 도를 이룬 사람도 인과에 떨어집니까? 떨어지지 않습니까? 이렇게 누가 물었다는 거에요.
말하자면은 부처님정도 되면은 모든 선악의 업보가 없다고 말할 수 있어요. 악업을 지을 여지가 없다고 볼 수 있지 않습니까? 부처님 경우에는. 그래서 이제 스님이, 그 지금 노인장으로 와있는 전백장이라고도 합니다. 이 스님이 인과에 안 떨어진다. 수행을 성취한 사람, 도를 이룬 사람은 인과법에 떨어지지 않는다 라는 뜻으로 대답을 했답니다. 그게 한문글귀로 不落因果불낙인과에요. 인과에 떨어지지 않는다. 그러니까 어떤 업을 지어도 무위심에서 하는 것이기 때문에 선악의 과보를 받지 않을 수 있다. 보충해서 말하자면 이런 뜻을 가지고 있는 말입니다. 이랬는데, 이 말이 잘못되었다는 거요. 이 대답이 틀렸다는 거에요.
그래서 이 대답 한 번 잘못한 탓으로, 그 과보로, 다음 생에, 그 스님이 죽고 나서 다음, 그다음 생에 여우 몸을 받았다. 여우 몸. 내가 지금 사람형상으로 왔지만, 여우 몸이라는 거요. 참 옛날은 여우가 둔갑을 한다는 말도 있고, 여하튼 설화 전설이니. 그러니 스님께서 다시 내게 한마디 법을 설해주시어 여우 몸을 벗어나게 해 주시오. 이렇게 청하더라는 거에요. 자기 과거사를 말하고 지금 백장스님한테 다시 바른말을 한 말씀 해 주시어, 내 여우 몸을 벗겨 달라. 그래서 이제 백장스님께서 그러면은 그때 그대에게 묻던 사람이 했던 것처럼 그대로 물으라. 이거에요. 그래서 이 노인장이 똑같은 물음을 말하는 거에요.
크게 수행을 한 사람도 인과에 떨어집니까? 떨어지지 않습니까? 이랬더니 이 백장스님께서는 글자한자를 바꿔가지고 대답을 해줘요. 不昧因果불매인과니라. (매할 昧매)자가 있어요. 三昧삼매할 때 어둡다는 뜻인데 여기서는 모른다는 뜻이에요. 인과에 어둡지 않다. 인과를 모르지 않는다. 그래서 불낙인과라는 네 글자에서 낙자를 매자로 바꾸어 대답해 주었는데, 이 말을 들은 노인장이 기뻐하면서 “감사합니다.” 인사를 하고 나가요. “마지막으로 부탁드리겠습니다. 제가 과거에 스님이었으니, 전생에 스님이었으니, 스님의 예로 다비를 해 주십시오.” 절에서 장례 하는 걸 다비라 합니다. 그래 부탁을 하고 나갔답니다.
다음 날 아침에 백장스님께서 대중에게 “오늘 다비식을 할 테니 산으로 들어가자.” 이러더라는 거요. 그 대중이 다비라는 거는 죽은 사람의 시신을 태우는 건데, 화장을 하는 건데, 아무도 죽은 사람이 없는데 무슨 다비를 한다 하시는가? 그런데 백장큰스님께서 앞장을 서서 산속으로 가는 거에요. 그래 대중이 따라가니 골짜기 깊숙이 들어가니 큰 바위 밑에 여우가 한 마리 죽어있더래요. 그래 그 여우를 스님 화장하듯이 이렇게 화장을 해서 장례를 치렀다. 이런 설화에 나오는 얘기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공부가 됐다 하더라도 잘못하면은 축생 몸을 받는다. 여기에 이런 얘기가 나왔는데 그 전백장, 후백장 설화에 바로 그런 얘기가, 내용이 들어있지 않습니까?
그래 이제 또 참선수행을 할 때는 공안, 화두가 되어서 불낙인과라고 대답했을 때는 여우 몸을 받고 오백생을 받았다는 말이 있어요. 불매인과라는 말을 해 주어서는 그 여우 몸을 벗겼다. 이게 뭐냐? 이게 참구할 대상이라는 거죠. 그래서 백운 선사의 말, 털끝만치의 범부다 성인다 하는 생각. 이게 설사 없어졌다 하더라도 나귀의 태에 들어가거나 말의 태에 들어가는 수가 있다. 이거요. 그래서 이 대목의 말은 다음 생에 축생 보를 받지 않도록 공부를 바로 하라. 공부를 바로 하라 이거요. 이런 뜻에서 설해진 내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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