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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하는 세계사] 세계문화유산 특집! 바이마르는 어떻게 독일 문화를 상징하는 도시가 되었을까?

Buddhastudy 2024. 9. 4. 19:58

 

 

바이마르는

한국에서 파리나 런던, 베를린만큼 많이 알려진 도시는 아니지만

독일인들에게는 독일의 문화를 상징하는 도시 중 하나라고 평가받습니다.

 

오늘은 바이마르의 도시 역사를 알아봄으로써

인구 7만 명 남짓의 도시인 바이마르가

어떻게 이런 평가를 받게 되었는지 알아보고자 합니다.

 

바이마르라는 도시는

이미 10세기 이후, 그러니까 중세부터 존재했습니다.

그러나 당시의 바이마르는 지금의 바이마르와는 많이 달랐는데요.

이는 1424년 도시에서 큰 화재가 일어난 후

도시가 전체적으로 다시 세워졌기 때문에 더욱 그렇습니다.

 

화재 이후 당시 바이마르를 지배했던 베틴 가문은

다른 도시에서 세금을 조달하고

경제적으로 바이마르에게 각종 특권을 부여함으로써

도시의 재건을 지원했습니다.

 

한편 바이마르의 위상은

16세기 이후, 크게 높아지게 되는데요.

이는 1552년 작센 바이마르 공국의 공작이었던 요한 프리드리히 1세가

바이마르를 공국의 수도로 삼았기 때문입니다.

 

이후 바이마르는 1918

독일 제국이 1차 세계대전에서 패배할 때까지

공국의 수도로 남게 되죠.

 

비록 공국의 수도가 되긴 했지만

당시까지도 바이마르는 무수히 많은 제국들 중 하나의 수도였을 뿐

독일을 대표하는 도시와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그러나 바이마르는 18세기를 거치면서 전성기를 맞이하게 됩니다.

여기에는 무엇보다도 이 시기 바이마르를 통치했던 [안나 아말리아]

그의 아들이었던 [칼 아우구스트] 공작이 큰 역할을 했습니다.

 

1757년 태어난 칼 아우구스트의 아버지이자 공작이었던 에른스트 아우구스트 2세는

아들이 태어나고 1년 만에 사망하게 되는데요.

이후 그의 아내였던 안나 아말리아가

섭정으로서 공국의 통치를 담당하게 됩니다.

 

당대의 예술에 조예가 깊었던 그는, 섭정을 하면서

동시에 크리스토프 마르틴 빌란트와 같은

당대의 유명한 문학가와 지성인들을 아들의 교사로 임명하고

이들에게 아들의 교육을 일임합니다.

 

그리고 이들로부터 칼 아우구스트는

당시 계몽주의의 세례를 듬뿍 받은 교육을 받고 성장합니다.

 

또한 선생님들의 동행하에 어린 아들에게 자주 여행을 시키면서

견문을 넓혀주고자 노력했는데요.

이런 교육의 영향으로 칼 아우구스트는

이후 1816년에, 독일 지역에서는 최초로 헌법을 도입하기도 합니다.

 

한편 어린 시절의 여행들은

칼 아우구스트와 바이마르의 미래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는데요.

특히 1774년 그러니까 17살 무렵에 했던

오늘날의 독일 서쪽 여행이 그러했습니다.

 

우선 칼 아우구스트는 여행 도중

다름슈타트에서 동갑내기였던 루이제 공주를 만나 사랑에 빠지게 됩니다.

그리고 다음 해인 1775

둘이 18세로 성년이 되자마자 결혼식을 올렸죠.

 

그러나 이때의 여행은 칼 아우구스트 개인에게 있어서뿐만 아니라

이후에 바이마르와 독일 전체에도 큰 의미를 지닌 것이었습니다.

이는 다름 아니라 이 여행 도중에

칼 아우구스트가 프랑크푸르트에서

바로 그 유명한 괴테를 만났기 때문이었습니다.

 

당시 괴테는 릴리 쉐네만이라는 여성과 사랑에 빠진 후

쉐네만의 부모에 의해 이별을 통보받아 크게 낙담한 상태였습니다.

이런 상태에서 자신보다 8살 어린 칼 아우구스트가

괴테를 자신이 있는 바이마르로 초대하자

괴테는 이 초대를 받아들였죠.

 

사실 칼 아우구스트가 괴테를 바이마르로 초대한 것에는

괴테에 대한 존경심 외에

개인적인 경쟁 심리도 깔려 있었습니다.

 

칼 아우구스트의 큰 할아버지이자 후대의 프리드시 대왕으로 불리는 프리딜 2세가

평소에 계몽주의의 대표자 중 한 명이었던 볼테르와 가까운 관계였던 것을 보고

자신 역시 당대의 대표적인 지식인을

자신의 옆에 두고 싶어 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 그는 괴테가 바이마르에 도착한 이후에도

그를 바이마르에 계속 묶어두기 위해서 노력합니다.

괴테에게 끊임없이 선물을 보내고

그를 공직에 등용하기도 합니다.

 

이런 선물 공세를 맞이하여

괴테는 프랑크푸르트에 있는 자신의 친구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어차피 집에 가봤자 딱히 할 일도 없는데

몇 년 정도 이곳에 머물러야겠다라고 말하며

바이마르에 머물기로 결정하죠.

 

그러나 가볍게 몇 년 정도 머물겠다고 처음에 생각한 것과는 달리

괴테는 이후 1832년 사망할 때까지

바이마르를 거점으로 두고 활동하게 됩니다.

 

여기에는 칼 아우구스트가 괴테를 전폭적으로 신임하고

당대의 다른 중유럽 지도자들과는 달리

자유롭고 관용적인 정책을 펼친 것이 큰 역할을 했습니다.

 

이 때문에 당시 바이마르에서는

괴테를 바이마르에서 칼 아우구스트

바로 다음의 2인자라고 표현하기도 했죠.

 

그리고 바로 괴테가 바이마르에 머물면서

바이마르의 황금기가 찾아옵니다.

이는 괴테가 바이마르에 머물자

당대의 명성 있는 지식인들과 문학가들이

바이마르로 몰려들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여기에는 대표적으로 프리드리히 실러가 해당되는데요.

괴테와 친구이자 경쟁자였던 실러는

괴테가 자신을 바이마르로 초대하자

그 초대를 받아들이고 바이마르로 이사를 오게 되죠.

그리고 1805년에 사망할 때까지 바이마르에서 거주합니다.

 

실러 외에도 당대의 대표적인 독일 철학자였던

헤르더까지 바이마르로 오게 되죠.

 

이렇게 아까 언급되었던 칼 아우구스트의 스승이었던 빌란트와 더불어

괴테, 실러, 그리고 헤르더까지

바이마르에서 머물며 교류하게 되는 이 시기를

이후 바이마허 클래식

즉 바이마르 고정기라고 부르게 됩니다.

 

당대 독일의 대표적인 지식인들이

바이마르라는 작은 도시에 머물면서

매우 가깝게 교류하고 경쟁한 결과 탄생한 바이마르 고전기를 통해

독일에서는 고유의 낭만주의와 영국과 프랑스로부터 비롯된 계몽주의가 종합된

근대 이후의 독일을 특징짓는 문화가 탄생합니다.

 

바이마르의 황금기는 칼 아우구스트가 1828년에 사망하고

4년 후인 1832년 괴테 역시 사망하면서

전환기를 맞이하게 됩니다.

 

칼 아우구스트의 뒤를 이어

19세기 중반 바이마르를 지배했던 칼 알렉산더는

리스트와 바그너와 같은 음악가들을 바이마르로 초대해서

문화 강국으로서의 바이마르의 위상을 계속 지켜 나가죠.

 

칼 알렉산더는 바이마르에 예술가들을 초대함으로써

바이마르를 문학뿐만 아니라

음악과 미술에 있어서도 큰 위상을 갖는 도시로 만들었고

이를 토대로 1860, 바이마르의 당시로서는 드물게

미술대학교를 설립합니다.

오늘날 바이마르에 위치한 바이마르 대학교는

바로 이 대학을 뿌리로 두고 있습니다.

 

역사학자들은 괴테가 살았던 시기에 바이마르를 황금기,

그리고 그 뒤의 시기를 은기로 구분하기도 합니다.

 

이것이 오늘날까지도 독일인들이

바이마르를 독일 문화를 상징하는 도시 중 하나로서 인식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독일인들이 바이마르를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이 시기로부터 약 100년 후

바이마르의 이름을 딴 바이마르 공화국 초대 대통령

프리드리히 에베르트가 한 말을 통해서도 잘 드러납니다.

 

1차 세계대전에서 패전한 독일의 국가적 이미지가 바닥으로 떨어졌을 때

그는 바이마르에서 새로운 공화국의 헌법을 제정하며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이 소개했습니다.

사람들이 바이마르의 정신과 새로운 독일국가의 건설을

연관시켜 생각할 수 있게 된다면

전 세계가 이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일 것이다

 

그러니까 바이마르의 정신은

독일인들이 나락으로 떨어진 상황에서도

전 세계에 자랑할 수 있는 자산이었던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