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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하는 세계사] 루브르는 어쩌다가 박물관이 되었을까? 루브르 박물관의 역사

Buddhastudy 2024. 9. 11. 19:28

 

 

루브르 박물관

사람들이 파리에 들르게 된다면

에펠탑과 함께 꼭 방문하게 되는 장소 중 하나이자

2018년 기준으로 세계에서 가장 많은 사람들이 입장한 박물관입니다.

 

그런데 루브르 박물관이 원래는 박물관이 아니라

궁전이자 동시에 성이었다는 사실을 알고 계셨나요?

 

오늘은 루브르 궁전이 어쩌다가 박물관이 되었는지

그리고 박물관이 된 이후

루브르의 역사에 관한 이야기를 나눠보려고 합니다.

 

 

12세기 후반, 프랑수와 국왕 필립 2세는

파리를 노르망디에 주둔하고 있던 영국군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요새를 짓습니다.

 

이 요새가 루브르의 시초인데

지금도 루브르에 들르게 된다면

당시 요새로 쓰인 건물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중세를 거치면서 파리시가 점점 확장되자

요새로서 루브르의 기능은 점점 퇴화될 수밖에 없었는데요.

이에 1546년 당시 프랑스의 왕이었던 프랑스와 1세는

루브르의 기능을 요새에서 궁전으로 바꾸게 됩니다.

 

한편 프랑수아 1세는 개인적으로 예술과 학문의 열렬한 후원자였는데요.

그는 당대의 뛰어난 예술 작품들을 열심히 수집하여

루브르 궁전에 보관하게 했는데,

이 중 많은 것들이 오늘날 루브르 박물관의 전시품 중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것들입니다.

 

오늘날 사람들이 루브르 박물관에 방문하게 된다면

꼭 보게 되는 작품,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모나리자를 수집하여

루브르에 보관하게 한 것도 프랑수아 일세였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관광객들이 파리에 들를 때

꼭 방문하는 또 다른 장소가 있죠.

바로 파리시 교회에 위치한 베르사유 궁전입니다.

 

1682년 태양왕 루이 14세는

베르사유 궁전을 짓고 이곳을 자신의 거처로 정하게 됩니다.

이제 루브르는 왕이 없는 궁전이 되었는데요.

이후 이곳에는 프랑스 왕실이 후원하는 예술가들이 거주하게 됩니다.

 

한편 기존에 수집해 놓았던 작품들과

새로 머물게 된 예술가들이 만들어낸 작품들이 늘어나면서

18세기에 이르러 차츰 루브르에 보관하고 있던 작품들을

시민들에게 공개하라는 요구가 발생합니다.

 

이에 1750년 루이 15세는

당시 왕실이 보관하고 있던 작품 중 96점만을 골라

정해진 날에만 공개하게 되죠.

 

그러나 이는 전체 작품 중 극히 일부에 불과했고

루브르 궁전을 프랑스 박물관으로 개조하고자 하는 일부의 시도는

답보 상태로 남게 됩니다.

 

그런데 이때 프랑스 혁명이 발생하게 됩니다.

전 유럽을 뒤흔드는 혁명의 움직임 속에서

루브르 궁전의 작품들이

왕가의 소유만으로 남아 있기는 힘들었겠죠.

 

1791년 프랑스 혁명의 국민재헌의회는

루브르가 모든 과학과 예술 작품들을 보관하는 장소가 될 것이라고 선언했습니다.

그리고 다음 해인 1792810

당시까지 프랑스의 왕이었던 루이 16세가 투옥되자

루브르에 위치한 왕가 소유의 작품들은 국고로 귀속됩니다.

 

이어서 의회는 루브르를 박물관으로 개조할 준비에 착수하게 됩니다.

루이 16세가 투옥되고, 왕정이 몰락한 지

1년이 되는 1793810

루브르는 궁전이 아니라 박물관으로서 대중에게 공개됩니다.

 

대중들은 일주일에 3일 루브르에 입장할 수 있었고

이곳에서 기존 왕가의 수지품들

혁명의 와중에 기존 귀족들과 교회로부터 압류한 작품들

그리고 프랑스 혁명군이 전 유럽에서 전리품으로 가져온 작품들을

감상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당시 루브르의 모습은

오늘날 박물관으로서 잘 정리된 루브르의 모습과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이는 작품들이 바닥에서부터 천장까지

여기저기 걸려 있었다라는 기록에서도 확인됩니다.

 

한편 루브르 박물관은 나폴레옹의 등장과 함께

전환기를 맞이합니다.

유럽과 이집트를 돌아다니며 전쟁을 벌인 나폴레옹은

매번 해당 지역의 주요 예술품들을 약탈한 뒤

자신의 개선 행렬 때 파리 시민들 앞에 선보인 후 루브르에 보관하게 했습니다.

 

특히 이탈리아 지역이 큰 피해를 받았기에

이 지역 사람들의 분노는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컸죠.

 

그리고 나폴레옹은 1803년에는

아예 나폴레옹 박물관으로 루브르의 이름을 바꿔버리죠.

그러나 나폴레옹이 워털루 전투에서 패하고 곧 폐위되자

나폴레옹에 의해 약탈된 작품의 대부분은

원래의 주인으로 돌아가게 됩니다.

 

나폴레옹의 사례는

이후의 통치자들에게 중요한 교훈을 주었는데요.

바로 루브르 박물관을 통해 예술을 사랑하는 모습을 시민들에게 보여주면서

동시에 자신의 치적을 쌓을 수 있다는 것이었죠.

 

왕정복고의 시기에 루이 18세는

밀로의 비너스상을 비롯하여

100여 점의 예술 작품을 루브르에 새롭게 전시했습니다.

 

나폴레옹의 조카로 훗날 프랑스의 황제가 되는 나폴레옹 3세는

떨어지는 인기를 복구하기 위해

아예 1861년 한 해에만 1만천점이 넘는 작품들을 수집합니다.

이렇게 수집된 작품들 중 많은 것들은

오늘날까지도 약탈의 논란에서 자유롭지 못하며

지금이라도 해당 국가로 반환해야 한다는 주장이 꾸준히 나오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루브르에 입장하는 방문객의 대부분이

지나가는 건물이자 통로가 있죠.

바로 루브르의 유리 피라미드입니다.

 

지금은 파리의 랜드마크 중 하나가 되었지만

지어질 당시인 1980년대만 해도

당시 프랑스의 대통령이었던 미테랑의 치적 쌓기 용도라는

격렬한 비판을 받았습니다.

 

이렇게 루브르를 자신의 정치적 이미지를 위해 활용하는 사례는

19세기뿐만 아니라 현재까지 꾸준히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700년이 넘는 루브르의 역사에 대해 짧게 알아보았습니다.

그리고 루브르 박물관에 보관되고 있는 작품들만큼이나

루브르 자체도 많은 역사를 품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했습니다.

나중에 루브르에 들르실 때

작품들뿐만 아니라 루브르 자체의 역사도 생각하시면서 감상하신다면

더 뜻깊은 시간이 되지는 않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