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상시의 난 이후, 혼란을 틈타
황제를 바꾸면서까지 권세를 차지한 동탁이었지만
낙양 주변으로, 전국 각지의 군웅들이 모여들며
반동탁연합군으로부터 고립된 처지가 되었습니다.
이로 인해, 전장의 형세를 파악했을 때
낙양보다는 서쪽에 있는 장안으로 도읍을 옮기는 것이
방어적으로도 세력 결집을 위해서라도 득이 될 것이라 판단한 동탁은
190년 2월, 장안으로의 천도를 결정하였고
한 달 뒤인 3월 5일, 황제는 서천하여 장안에 도착하게 됩니다.
동탁은 반동탁연합군에게 밀릴 경우
서량 지역의 힘을 빌리기 위해
한수와 마등에게 더 이상의 죄를 묻지 않고 벼슬을 내주었으며
자신은 낙양에 머물면서 반란군을 대적하고
조정 대소사는 사도 왕윤에게 모두 맡겼습니다.
십상시를 비롯한 환관들의 횡포로 인해
평생을 환관 세력들을 척결하고 싶어 했던 사대부들 중에서도
왕윤은 양표, 황완과 함께 처음부터 동탁에게 협력했고
동탁 또한, 자신이 세력을 잡았을 때 무엇보다 먼저
숙원사업에 열중하여 사대부들의 영향력을 손에 넣었습니다.
왕윤은 장안이 새로운 수도로서 자리를 잡기 위해
궁궐을 개보수하는 등, 국가 내정에 힘썼는데
동탁과는 달리, 힘으로만 사람들을 다스려 하지 않고
기품을 보이며 황실을 안정시키려는 태도를 보이자
황제와 신료들은 모두 왕윤에게 의존했습니다.
동탁 또한, 왕윤의 청렴하고 강직한 인물로서의 명성을 높이 평가해
자신의 곁에 두면서,
동탁 정부의 정당성을 높이고자 했으며
이런 와중에, 왕윤은 자신이 맡은 업무하는 때를 제외하고는
항상 동탁에게 몸을 굽혀 조신하게 행동했습니다.
왕윤은 10여 년 전, 황건적의 난이 일어났을 때
장수로서 황건적을 격파한 적이 있으며
십상시와 황건적이 내통하고 있다는 편지를 입수해
십상시와 대적을 하며, 사형을 받을 뻔했지만
긴 세월 동안의 투옥과 수형, 유형 생활을 겪는 동안
예전보다는 한층 조심스러운 성격으로 변모해
자신의 주장을 꺼내 드는 행동을 자제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왕윤은 동탁에게 신임을 받는 동안에도
언젠가 동탁을 제거할 것이라고
마음속에 은밀히 계획을 품고 있었습니다.
한편, 동탁은 헌제를 장안에 안착,
눈엣가시였던 황보숭도 황제 수호라는 명분으로 장안에 입성시키며
황보숭의 군대까지 흡수하고서
반동탁연합군과의 본격적인 전투를 준비했습니다.
세간에는 동탁을 벌하자는 군웅들이 모여
반동탁연합군을 형성하는데 주력하고 있었지만
조정에서는 반란군의 실질적인 수장이
원소인지 원술인지 제대로 파악하기도 어려웠습니다.
이는, 반동탁연합군 내에서는 원소를 맹주로 추대했으나
한 지역에 세력이 집결되지 않고
산조에서는 원소를 중심으로 산동 제후군이
남양군에서는 원술이 주변 세력들을 따로 모았기 때문에
특히, 이 중에서도 손견군이 원술에게 합류하자
반란군의 세력이 남북으로 갈라져 비슷한 세력이 형성되었습니다.
어쨌든 동탁이 볼 때, 자신을 향한 칼날의 주요 세력은
원소든 원술이든간에 사세삼공 명문 가문이라 불리는
원씨 가문인 것만은 틀림없었고
앞으로 자신에게 반기를 든 자들의 결말을 보여주기 위해
조정 내 사대부들의 지지도가 높았던
원외와 원기 등 원씨 가문을 모두 잡아들였습니다.
그리고, 원외와 원기 가족뿐만 아니라
친척에 어린아이까지 모조리 잡아들여 50여 명을 참수한 후
목을 막대기에 걸어 높은 곳에 매달아
지나가는 사람들이 많이 보게 되는 효수형에 처했습니다.
원씨 가문이 멸족당했다는 소식을 들은 원소와 원술은
피눈물을 흘리며, 반드시 복수할 것을 다짐했고
그동안 원씨 가문과 가깝게 지낸 주요 지방 권력자들은
저마다 원씨 가문 복수에 앞장서겠다 하여
원소는 한층 반동탁연합군 맹주로서의 입지를 다지게 됩니다.
이로 인해, 하북 지역에서는 점점 원소를 중심으로
각지의 사람들이 더욱 몰려들었고
하남에서는 원술을 중심으로 세력들이 의탁하여
사람들은 하북의 원소, 하남의 원술이라 불렀습니다.
장안으로 수도를 옮긴 동탁은
새로운 수도의 건설과
병력을 더욱 받쳐주는 군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기존 낙양의 부호들에게 아무 죄를 물어 죽인 다음 재산을 몰수했고
여포를 시켜, 오랜 황실과 고관들의 묘를 파헤치게 하여
부장품을 도굴하면서까지, 군의 예산을 확보해 나갔습니다.
그리고, 전투 도중 상황이 불리해 도주할 것을 대비해
병사들을 시켜 낙양의 백성들을 강제로 이주시켰는데
급작스레 이주를 하게 된 극빈층 사람들은
서울-부산 거리보다 긴 거리인 약 500km 이동 중
제대로 먹지 못해, 죽어가는 사람이 헤아릴 수 없었다고 전해집니다.
동탁이 낙양 근교를 모두 불태우며
100만 명에 가까운 사람들을 서쪽으로 이주시키자
이유를 모르던 백성들과 군대 내에서는
동탁군이 연합군에게 패배하여 도주 중이라는 소문이 나돌았고
이러한 동요를 막기 위해,
동탁은 전과를 조작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이어서, 군대를 주변 여러 방면으로 보내
사당에 모여 제사를 하던 백성들 중
남자들은 무차별적으로 죽이고
여자들과 재물은 수레에 태워 데리고 오며
병사들에게는 만세라 부르라 명하였고
적에게 이겨, 포로를 잡은 것이라 선전했습니다.
반동탁연합군을 통솔한 원소는 우선 선봉으로
의협심이 높기로 소문난 하내태수 왕광을 지명하였고
왕광은 병사들을 이끌어, 황하를 건너기만 하면
바로 낙양을 공략할 수 있는 하양진에 주둔시켰습니다.
전투에 경험이 풍부했던 동탁은
직계 부대를 이끌고 선제공격에 나서
황하를 건너는 것처럼 위장하여
왕광군과의 전투에서 마치 도주하는 것처럼 퇴각을 했는데
왕광은 눈앞에 적이 꼬리를 내리고 도망가자
자신이 동탁을 무찔렀다는 명예를 얻기 위해
깊숙이 동탁군을 쫓아갔습니다.
하지만, 동탁의 숨겨놓았던 정예병은
이미 다른 곳에서 강을 건너 왕광군의 후위를 포위하였고
왕광은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대부분의 병사를 잃고
극소수만 살아남아 도망쳤습니다.
참고로, 나관중이 집필한 소설 <삼국지연의>에서는
왕광의 휘하 장수 중 가장 맹장이라 일컬어지는
가공인물 방열이라는 장수가
동탁군의 여포와 정면승부로 싸우다가
몇 합 만에 창에 찔리며 사망하게 됩니다.
다시, 이야기는 정사 삼국지로 넘어와서
연합군의 선봉인 왕광군이 동탁에게 전멸당하자
장막, 유대, 교모 등의 주력 부대는 진짜 전투를 체험하며
동탁의 군대가 생각 이상으로 강하다 여겨
감히 진군할 생각을 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평생, 귀한 집안의 자식으로 태어나
이론적인 병법으로만 전투를 공부했던
연합군의 주요 제후들이 주눅들자
성장기 시절부터 원소와 함께 지역 소년배를 이끌며
각종 싸움 경험과 무공을 겸비한 조조는
귀족들의 갑갑한 행동을 보고 의분을 참지 못해,
‘도대체 한 번의 패배로 무엇이 두렵냐’면서
다시 한번 출병하여 동탁을 쳐야 한다고 제후들을 설득했습니다.
오늘은 삼국지 41번째 시간으로
하북의 원소, 하남의 원술을 포함하여 반동탁연합군의
첫 번째 전투에 대해 정리해 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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