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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하는 세계사] 브란덴부르크 문으로 알아보는 독일의 역사!

Buddhastudy 2024. 9. 5. 19:29

 

 

브란덴부르크 문은 베를린에 방문하게 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들르는 곳이자

오늘날 외부의 독일을 상징하는 건축물 중 하나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 브란덴부르크 문에

꽤나 복잡한 역사가 깃들어져 있다는 사실을 알고 계셨나요?

오늘은 브란덴부르크 문과 함께하는 독일의 역사에 관해 알아보고자 합니다.

 

브란덴부르크 문은 18세기 후반에 지어지는데요.

그런데 브란덴부르크 문이 아직 건설되기 전

그러니까 17세기에

이미 그 자리에는 브란덴부르크 문의 전신이라고 할 수 있는 건물이 있었습니다.

 

이 문은 베를린 시내와 외부 사이의 경계에 위치하며

도시 내부에 들어오는 이들을 감시하고

필요한 경우 세금을 걷기 위해 만들어졌습니다.

 

이렇게 평범한 행정 건물이었던 장소에

어쩌다가 브란덴부르크 문이 세워지게 되었을까요?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프로이센의 왕이었던 프리드리히 빌헬름 2세에 대해 알아야 합니다.

프리드리히 대왕이라고 불리며 성공적으로 계몽 절대군주로서 통치를 했던

삼촌의 뒤를 이어 왕이 되었던 프리드리히 빌헬름 2세는

즉위 당시 프로이센들로부터 많은 기대를 받았습니다.

 

이런 기대에 부응하는 모습을 보이고 싶어 했던 프리드리히 빌헬름 2세는

이를 웅장한 건축물을 세움으로써 보여주고자 했죠.

 

그는 평소 스스로 자신을

고대 아테네의 황금기를 가져왔던 페리클레스와 종종 비교했는데요.

브란덴부르크 문은 바로 이러한 심리의 연장선상에서 건축되었습니다.

 

프리드리히 빌헬름 2세가

고대 아테네 아크로폴리스 입구의 모습을 본따

브란덴부르크 문을 세운 것입니다.

 

1793년 완성되었던 브란덴부르크 문은

그러니까 프리드리히 빌헬름 2세가

스스로를 고대의 성군과 비교하고자 하는 마음에 탄생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 시기 유럽은

프랑스 혁명의 물결에 휩싸이고 있었습니다.

프로이센도 예외가 아니었는데요.

프로이센은 혁명의 물결을 정면으로 거부하며 프랑스와 전쟁을 벌였지만

나폴레옹에게 무참히 패배하고 말았습니다.

 

1806년 프로이센과의 전쟁에서 승리한 후

베를린에 입성한 나폴레옹이 처음으로 한 일 중 하나는

브란덴부르크 문의 꼭대기에 있는 이 콰드리가를 떼내서

파리로 옮기는 것이었습니다.

 

옮기는 과정에서 콰드리가에 손상이 많이 가서

파리에 도착한 후, 전문가들이 달라붙어 복구를 해야 했습니다.

이 과정을 거쳐 1808

콰드리가는 루브르 박물관에 전시되죠.

 

네 마리의 말을 이끄는 승리의 여신 빅토리아가

베를린을 지켜보는 모습을 표현한 이 구조물은

원래 프로이센의 태평성대를 상징하는 구조물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콰드리가가 사라진 브란덴부르크 문을 바라보는 프로이센인들은

수치스러움을 느끼게 되었죠.

그렇기 때문에 이후 나폴레옹과의 전쟁에 있어서

프로이센인들의 목표 중 하나는

바로 이 콰드리가를 되찾아오는 것이었습니다.

 

콰드리가를 빼앗긴 지 8년이 지난 1814

나폴레옹과의 전쟁에서 승리한 브로이센의 장군, 게프하르트 레베레히트 폰 블뤼허가

파리에 입성한 후 가장 먼저 한 일 중 하나 역시

쿼드리가의 행방을 알아보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331일에 파리에 입성했는데요.

콰드리가를 찾아낸 후, 베를린에 보고하고

운송을 시작한 것이 44일이었습니다.

 

정신없이 바빴을 와중에

사흘 만에 쿼드리가를 찾아내고 운송을 시작했으니

이 일이 프로이센인들에게 어느 정도 중요성을 지녔는지 짐작해 볼 수 있겠죠.

 

이렇게 다시 완전하게 복구된 브란덴부르크 문은

이후 독일이 통일되면서 프로이센인들뿐만 아니라

독일 전체를 상징하는 역할을 하게 됩니다.

 

1933130일 집권한 나치가

가장 먼저 축하 행진을 한 곳도

바로 브란덴부르크 문이었습니다.

 

그러나 브란덴부르크 문은

2차 세계대전을 겪으며 많은 피해를 받게 됩니다.

따라서 종전 후 독일인들은

브란덴부르크 문을 복구하는 작업에 들어가게 됩니다만

문제는 베를린이 분단되었다는 사실.

그리고 브란덴부르크 문이

분단된 베를린의 경계 부분에 위치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이는 브란덴부르크 문을 복구하기 위해서는

양 진영이 서로 협력해야 했음을 의미했죠.

1950년대 복구 과정에서

동서독 양쪽은

서로를 수시로 비난하는 등 갈등이 없었던 건 아니지만

결국에는 협력을 통해 브란덴부르크 문을 복구하는 데 성공합니다.

 

양 진영의 협력을 통해 복구되었지만

브란덴부르크 문은 곧 분단된 독일의 상징이 됩니다.

이는 1961년 소련의 지시에 의해 세워진 베를린 장벽 때문이었습니다.

 

1950년대 많은 동독 시민들이

서베를린을 통해 동독을 벗어나 서독에 합류했었는데요.

베를린 장벽은

바로 이러한 탈출을 막기 위해 건설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베를린 장벽이

브란덴부르크 문의 바로 옆을 지났기 때문에

이제 브란덴부르크 문은

동독 군인들만이 지나다닐 수 있는 건물이 되었습니다.

 

반대로 서독을 비롯한 서방 진영에게

장벽 너머로 보이는 브란덴부르크 문은

동독과 공산 진영의 억압을 상징하게 되었죠.

 

1963년 서독을 방문한 미국의 케네디 대통령은

서베를린에서 행한 유명한 연설에서

나도 베를린인입니다라는 역사에 남게 된 말을 하며

장벽 건설 직후 불안감에 휩싸인 서베를린 시민들을 안심시켰습니다.

서베를린을 방문한 것은

이후에 미국 대통령들도 마찬가지였죠.

 

통일이 멀지 않게 다가왔지만

아직 아무도 이를 예상할 수 없었던 1987

미국의 레이건 대통령은

아예 브란덴부르크 문 앞에서 연설을 하며

소련 진영의 베를린 장벽을 허물 것을 촉구하기도 했습니다.

 

레이건 대통령의 연설이 있고 2년이 지난 후

결국 베를린 장벽은 무너집니다.

그리고 이와 함께 독일의 통일이 찾아옵니다.

 

19891222, 10만 명이 넘는 시민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브란덴부르크 문은 드디어 다시 개방됩니다.

 

 

지금까지 브란덴부르크 문과 함께하는

200년 남짓의 독일 역사에 관해 알아보았는데요.

프로이센의 절대주의와 궁극주의를 상징하는 건축물에서

통일된 독일을 상징하는 건물이 되기까지의 과정이

흥미롭지 않으신가요?

 

나중에 브란덴부르크 문에 들리시게 된다면

이런 역사를 한 번쯤 생각해 보시는 것도

나름대로 의미가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