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승불교에서는 돈오와 점수가 대응한다.
돈오가 먼저다. 초기불교에서도 견혹과 수혹이 대응한다.
불교가 인간의 괴로움을 바라보는 시각은 하나로 관통한다.
먼저 깨닫고 그 다음에 닦는다.
견도 후에 수도한다.
우리가 겪는 정서적 장애는 그 자체로 치유되지 않는다.
반드시 인식의 오류를 바로잡은 다음에야 치유가 가능하다.
그런 점에서 확실히 불교는 지혜의 가르침이다.//
오늘은 돈오와 점수에 관해서 말씀을 드려보겠습니다.
대승불교에서는 돈오라고 하는 것을 굉장히 중요하게 생각을 하고
결정적인 사건으로 말을 합니다.
대승불교나 선불교에서는 이 돈오를 어떻게 표현하는가 하면
능엄경에 보면 ‘이즉돈오理卽頓悟이나 사비돈제事非頓除’라 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이치로 말하자면 문득 깨달음이 있을 수 있으나
사- 일로 따지자면 우리가 생활하는 일로 따지자면
그 문득 깨달아서 다 해결되는 것은 없다
이런 뜻이죠.
그러니까 여기서 깨달음의 문제하고 닦음의 문제가
둘로 갈라지는 거다
이렇게 이야기를 할 수 있겠습니다.
근데 이 문제는 비유하자면
예를 들면
아무리 천년, 만년, 억만년의 어둠이라도
빛이 비치는 순간 사라지는 거 아니냐?
이게 깨달음의 문제죠.
그러니까 불교는 깨달음의 종교이기 때문에, 가르침이기 때문에
깨달음이 중요하다라고 얘기하는데
그 말도 맞지만 현실에서 보면
인간이 살아가면서
그러면 찌든 때는 어떻게 할 거냐
찌든 때 이거는 하나씩 하나씩 닦아서 없애야지
그걸 그냥 때는 ‘때의 본질은 공하다’
이렇게 해서 때가 없어지는 건 아니지 않느냐
이런 얘기를 하니까
둘 다 틀렸다고 말할 수 없는 부분입니다.
그런데 대승불교나 선불교에서만
이 문제가 있었던 것은 아니고
이 문제는 초기 불교에도 충분히 다루어지니까
이게 관통하는 뭐가 있는 것 같습니다.
초기 불교에서는 두 가지 이야기를 하거든요.
인간의 미망, 인간의 어리석음 중에
-하나는 견혹이라고 하는 게 있고
-또 하나는 수혹이라고 하는 게 있습니다.
견혹은 뭐냐 하면
이 혹이라고 하는 것은
혹하다, 어리석음에 빠진다, 미망에 빠진다
이런 뜻이잖아요.
견혹- 통찰해서, 깨달음을 통해서 벗어나야 할 어리석음
이걸 견혹이라고 했고요.
그럼 수혹은 뭡니까?
수- 닦을 수, 닦아서 없애야 될 나쁜 습관, 습관적인 미혹, 어리석음
이렇게 이야기했죠.
근데 인도에서 업이라고 하는 개념도 보면
습관 또는 깊이 빠져든 그 무엇, 물들어 버린 것, 무의식 수준까지 내려가 있는 것
이런 거잖아요.
이거는 의식적인 깨달음이 있다 하더라도 바로 없어지지 않는다
이런 얘기를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니까 대승불교나 선불교하고 초기 불교하고
이 깨달음과 닦음에 관한 이슈는
쭉 관통되게 계속 있었다
이렇게 이야기를 할 수가 있겠죠.
그러면 견혹이라고 하는 게 뭐냐?
잘못 봤다는 거 아닙니까? 착각 보류라는 거 아닙니까?
그래서 그건 세 가지 얘기를 하는데
-불교적으로 보면 하나는 [신견]- 몸이 나다라고 하는 생각, 그건 착각이다.
-또 두 번째의 착각은 [아견]
‘나라고 하는 나라고 하는 것이 있다’ 라고 하는 것이 착각이다.
그런데 현대어로 말하자면 ‘셀프 이미지’ 같은 거죠.
그렇게 해서 자기에 대한 이미지, 아상이라고 하는데
그것을 만들고, 그것을 더 키우기 위해서 평생을 노력하는
이런 거 잘못된 거다.
-세 번째는 [변견]이라고 그래서
내 생각, 나의 사상, 나의 세계관, 나의 철학, 내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가치 기준
이런 것들이죠.
이 세 가지
내 몸이나, 나의 애고나, 나의 의견 나의 관점이
위험에 처하거나 공격을 받거나 이러면
나는 굉장히 불안하고 분노에 휩싸이고
이렇게 되는 거죠.
그래서 이거는 통찰을 통해서 없애야 된다라고 하는 것이죠.
그건 뭐 ‘그렇게 생각하면 안 돼 ’
이렇게 해서 되는 게 아니라는 거죠.
그래서 그걸 어떻게 통찰하냐?
[연기법으로 통찰해라] 그렇죠.
모든 것은 조건이 모여서 형성되고
조건이 흩어지면 소멸한다 라고 하는 연기법
그리고 연기법의 결과적인 추론이
-무상하다
-만족스럽지 못하다
-고정 불편한 본질은 없다라고 하는 것을
잘 깨달아라 이거죠.
그래서 여기서 잘 안다, 깨닫는다라고 하는 것은
생각해서 ‘그런 것 같은데’ 이런 게 아니고
실감하는 거라는 거죠.
그래서 보통은 think가 아니고 see 보는 것이다
이렇게 표현을 하는데
예를 들자면
‘세상에 공짜가 없다’ 이 말을 들었을 때
‘그렇지 뭐’ 이렇게 안다라고 얘기를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런 경우를 진짜로 당해보면
‘진짜 세상에 공짜가 없네’라고 하는 것을 실감하게 되는 거 아닙니까?
그다음에 요즘 중년 이후에 자녀들이 다 커서 밖으로 나가서 살게 되면
‘빈둥지증후군’을 앓게 되는데
이거는 우리가 30~40대 저도 그런 얘기를 들었습니다마는
‘그런가 보다’ 또 뭐 ‘그런 거겠지’라고 생각했는데
실제로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아이가 커서 대학을 가고, 대학원을 가서
밖으로 나가서 사니까
‘빈둥지증후군이라고 하는 것이 이런 거구나’라고
실감을 하게 되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그 연기법과 무상- 고- 무아를 깨달아라라고 하는 것은
실감해 보라는 것이죠.
그러니까 이게 단순히 문자적으로 이해한다라고 되는 것은 아니다.
하여튼 그런 건데
이 견혹이라고 하는 것은
결국은 생각을 잘못한 것을 통찰을 통해서 바로잡는 것이 되겠습니다.
그다음에 수혹이라고 하는 것은
생각한다고 해서 없어지는 게 아니고
하나하나 닦아서 끝내줘야 되는 거지 않습니까?
주로 심리적인, 정서적인 문제하고 연결돼 있죠.
그래서 불교적으로 말하자면
이게 탐욕
그다음에 그것이 좌절되었을 때 일어나는 분노
그다음에 그렇게 되면은 사리 분별이 어려워지니까 그 어리석음
그다음에 교만
그다음에 의심
이런 온갖 심리적인 장애를 말한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현대인들이 이런 것들을 많이 겪으면
현대인들의 어떻게 보면 고질병인 공황증, 우울증
이런 것들도 다 이것이 점점 심화되면 일어날 수 있는 일이죠.
그래서 어떻게 보면은
불교가 이고득락 그러니까
괴로움과 괴로움의 소멸에 대해서만 이야기한다라고 부처님이 얘기했듯이
괴로움이라고 하는 것이 불교의 굉장히 중요한 출발점인데
이런 어떤 탐진치만의 라고 하는 이 심리적 장애를
불교에서는 어떻게 극복하라고 하는가 하면
도덕적인 올바름으로 그거를 쳐내라 또는 눌러라, 억눌러라
이렇게 말하는 게 아닙니다.
불교에서는
내가 어떤 심리적인 탐욕이 생겼다든지, 분노가 생겼다든지
이런 사건이 생겼을 때
-사건의 자체와
-그 사건의 전의 상황과
-사건 후의 결과를 전체적으로 관찰해라
이걸 반복적으로 해라, 계속해라
이렇게 얘기하는 것이죠.
그러니까 내가 어느 순간에 욱하고 화가 났는데
어떤 경우에는 화가 나고 나서도
그 화났다는 사실
또 뭐 때문에 화났다는 사실을 모를 때도 있고
화가 나고 나서 한 하루 정도 지나고 나면
좀 침착해지면서 ‘아, 내가 이것 때문에 화가 났구나’라고 하는 것이 있고
또는 화가 나는 그 순간에는 통제를 못했지만
화가 난 바로 그다음 순간에
‘이게 내가 화를 냈구나’라고 인식할 수가 있고
이래 점점 가다 보면
화 자체를 완전히 정복할 수 있게 된다라고 하는 것이죠.
그러니까 이것은 ‘이것이 옳은 거야’
‘화내지 않는 것이 옳은 거야’라고 하는 기준을 놓고
그 기준으로 갖다 대는 것이 아니고
화를 내고 있는 자기 자신에 대한 싸띠
바라봄, 지켜봄,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보는 거죠.
그런데 그걸 어떻게 해야 된다?
반복적으로 해야 된다
보는 것이 점점 힘이 세지면
이런 탐진치 마니가 조금씩 조금씩 녹아서 없어져 간다
그러니까 이거 닦는 거죠.
이렇게 구성이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불교에서도 보면
이건 조사들이 하는 말이
‘견도 후에야 수도가 가능하다’
이런 말을 하거든요.
그러니까 연기법, 무상- 고- 무아라고 하는
그것으로 인해서 아견, 신견, 변견
이런 잘못된 시각이 타파가 되어야
그것을 가지고 올바른 기준을 가지고 닦아가는 것이 가능하다
이렇게 이야기를 하는 것이죠.
그래서 본성을 보지 못했다면
수도는, 수행은 무의미하다
이런 표현도 있죠.
그래서 이게 참 아이러니인 게
깨달으면 우리는 끝난다고 생각하지만
보통 조사어록이나 그 역사적인 기록들을 보면은
깨닫고 나서 한 30년 정도
뭐라 그럴까 깨달음과 친숙해지는
혹은 표현을 어떻게 해야 될지 모르지만
깨달음 그 자체가 되는
익숙해지기 기간이 있습니다.
이것을 뭔가 조작하고 닦는다라고 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 습관에서 벗어나는 그런 기간이
그 정도 걸린다라고 하는 것이죠.
그러니까 평생 공부가 끝이 없다, 이렇게 되니까
또 우리가 압축적으로 쌈빡하게 하고 끝내고 싶은 마음의 입장에서는
‘그렇단 말이야?’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죠.
그래서 육조 혜능도
견성만을 말할 뿐 해탈 열반을 논하지 않는다.
이건 뭐냐 하면
견성은 견혹을 없애는 거잖아요.
사물의 실상을 이해하는 거잖아요.
그런데 해탈과 열반은
심리적 장애로부터 해탈, 놓여나고 해방되고 벗어나는 거 아닙니까?
이게 중요한 게 아니다.
아까 본성을 보지 못했다면 수행은 무의미하다.
오직 견성을 말할 뿐
해탈 열반을 말하지 않는다.
이거 똑같은 얘기거든요.
그러니까 견성을 해야 해탈 열반이 가능해진다.
이렇게 말을 할 수 있겠습니다.
그게 불교의 본질이죠.
또 다르게 이야기하면
‘니가 사물의 실상을 바로 봤다면 결국은 벗어나게 되어 있다.
그건 같은 거다’
이렇게 이야기를 하는 것이죠.
‘니가 만약에 아직까지 벗어나고 있지 못하다면
장애에 시달리고 있다면
너는 바로 보지 못한 거다’
이렇게 말할 수도 있겠습니다.
그래서 이것의 비유는
‘바람이 이미 멈추었다면 파도는 조금 있으면 잔잔해진다.
그건 시간 문제일 뿐이다’
이렇게 하는 것이죠.
‘더 이상 바람이 일지 않는데, 파도가 다시 일어날 수는 없다’
‘다만 시간 차이가 좀 있다.
파도는 점점점점 잔잔해지게 될 것이다.’
이게 점수고
바람이 멎은 것
깨달음을 통해서 통찰이 일어나면 바람이 멎게 되겠죠.
자기중심적으로 부는 회오리가 멈추면
바닷물은 시간을 두고 잠잠해진다.
이렇게 이야기를 할 수 있겠습니다.
불교는 지혜의 가르침이다라고 하는 것은 분명한 것 같습니다.
인격적 도야나 도덕적인 표준으로
자기를 몰아대는
이런 방식은 사실 전혀 아닙니다.
정반대입니다.
먼저 인식의 오류를 바로잡으면
정서적인 문제, 정서적인 문제는 차츰차츰 치유가 된다.
그것이 원리다 라고 제시하는 것이
불교적 가르침이다
이렇게 이야기를 할 수 있겠고,
그것은 초기 불교나 대승, 선불교 다 똑같다
이렇게 이야기를 할 수가 있겠습니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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