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덕마음공부, DanyeSophia

[현덕마음공부] 붓다의 연금술 붓다의 수레

Buddhastudy 2024. 1. 16. 19:52

 

 

붓다는 설법에 있어서 당대 최고의 과학기술이었던 연금술과 수레를 비유로 사용했다.

1200도 넘는 불의 열로써 불순물을 정화하면

불퇴전의 순금(해탈)을 얻을 수 있다고 했다.

이것은 수행을 인정한 것이다.

반면에 수레를 통해서는 부품들이 모여 수레를 이루는 과정을 들어

조건생 조건멸의 연기법과

그 자연스러운 결론인 무아를 설명했다.

불교는 지혜의 종교이다.

붓다는 불의 열(열심수행)보다는

(반야지혜)이 무명을 타파하는데 결정적이라고 보았다.//

 

 

 

오늘은 붓다의 연금술 또는 붓다의 수레라고 하는 제목으로 말씀드려 보도록 하겠습니다.

불교는 지혜의 가르침 이렇게 일반적으로 얘기를 하는데

거기에 불이라고 하는 것들과 직접 간접으로 연결이 되어 있습니다.

 

그때 당시 인도에도 배화교라고 하는 종교도 있었고

그렇기 때문에 불교에서는

불이라고 하는 것에 대한 어떤 견해를 갖고 있었는지도 중요하고

붓다는 그것을 어떤 관점으로 이해하고 비유했는지를 보도록 하겠습니다.

 

당대에 그때 인도 사회 고대 최고의 두 가지 과학기술이 있었는데

하나가 연금술이었고

또 하나가 수레로 대표되는 조립하는 기술이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알다시피 연금술은 금이나 철 같은 경우는

1200°C 열을 올려서 제련할 수 있는

그런 최고의 그때 당시로는 과학기술 아닙니까?

 

그다음에 수레라고 하는 것은

지금으로 치면 탱크 이런 장갑차 등과 같아서

최고의 전쟁 무기

그래서 만승천자萬乘天子 그러면

황제는 수레를 만대를 거느릴 수 있는 무력을 무장을 갖출 수 있다

이렇게 되지 않겠습니까?

 

그렇게 해서 이 바퀴의 발명이라든지

이런 것들을 조립해서 수레를 만드는 것이 문명을 구르게 했다.

그렇게 해서 팔정도도 8가지 바퀴살로 이루어진

바퀴에 비유하기도 하죠.

 

그렇게 해서 이 불교에서 불하고 수레바퀴는

굉장한 어떤 실질적인 상징성을 가진다

이렇게 말할 수가 있겠습니다.

 

근데 그중에서 붓다는 연금술을 더 강조했을까?

아니면은 조립하는 수레를 더 강조했을까?

둘 다 중요한 가르침의 비유로 사용하긴 했지만

궁극적으로는 이 수레가 주는 통찰을 핵심적으로 강조했던 것 같습니다.

 

연금술과 수레를 한번 살펴보겠습니다.

연금술이 뭡니까?

원석을 불을 가해서 녹여서 불순물을 없애는 거 아닙니까?

불순물을 없앤다.

이게 도닦음이죠.

그렇게 해서 불순물을 다 처리하고 나서야 순금이 되잖아요.

그러면서 이 순금은 다시는 잡석으로 돌아가지 않는다.

그게 불퇴전이죠.

 

그렇게 해서 불교적으로 이야기하면

내가 욕심이 나는구나’ ‘내가 화가 나는구나를 알아차리고

그런 부분을 싫어하게 되고 싫어함으로써 멀어지게 되고

멀어짐으로부터 벗어나게 되고

이런 과정을 거쳐서

수행 혹은 닦음이 있는 과정들을 지난 후에

완전히 순금이 되면은

더 이상 닦을 필요가 없는 무아의 단계가 된다.

그것이 아라한이다

이렇게 이야기를 하는 것이죠.

 

그렇게 해서 이런 관점에서 보면

인도의 수행주의 전통이 있죠.

몇 년이 내려오는

첫 번째가 요가 삼매나의 선정을 닦는 수정주의라고 하는 것이 있고,

두 번째는 이 몸을 괴롭히는 욕망을 의도적으로 찍어 누르는 고행주의라고 하는 것이 있는데

문제는 부터는 이 수정주의와 고행주의 둘 다를

양극단으로 보고 중도를 강조했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연금술, 또는 다시는 되돌아가지 않는 도닦음을 말을 하기는 했지만

이것이 핵심은 아니었다.

붓다의 가르침의 체계에서는 그것이 핵심 아니었다.

이렇게 이해할 수 있겠죠.

 

두 번째는 수레에 대한 것인데

이 수레라고 하는 것은 잘 알다시피

부품을 결합해서 조립한 거 아닙니까?

그렇게 해서 부품들의 결합이라는 것이죠, 수레라고 하는 것이.

원래부터 수레가 천의무봉天衣無縫하게 딱 수레가 있는 것이 아니고

부품들을 결합해야 되는 거니까

조건들이 모여서 결합이 되면은 생겨나는 것이고

조건들이 흩어지면은 사라지는 것이다라고 하는

조건생 조건멸을 설명하기엔 매우 유용한 물건이죠.

 

그렇게 해서 이런 얘기를 할 수 있죠.

수레는 없다.

수레는 이미지로만 있고 실제로 있는 것들은 부품들이다

이렇게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이죠.

 

또 같은 논리로

부품은 없다, 부품의 부품들만 있다.

이렇게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이죠.

 

그러면 이게 무한 소급이 되면

어느 것도 본질적으로 있다라고 할 수가 없다.

이렇게 되는 것이죠.

 

그렇게 해서 현상으로서의 수레는 있다.

그러나 본질로서의 수레는 없다.

이런 얘기가 되는 겁니다.

 

그래서 이 붓다의 무아론을 자칫 잘못하면 현상마저도 없다 이렇게 이야기하면

이거는 힌두교에서 이야기하는

세상은 그냥 꿈이야 세상은

그냥 그 꿈에 불과해 허상이야, 마약 환상이야

이렇게 얘기하는 아주 극단적인 환상주의자로 빠지기 때문에

그렇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현상은 엄연히 존재한다.

그러나 그것은 조건에 따라서 생겨나고 조건에 따라서 흩어짐으로

생겨나는 것을 보고 없다고 할 수 없고

없어지는 것을 보고 있다고 할 수 없으니

현상은 엄연히 존재하나

본질은 텅 비어 있다

이렇게 이야기를 하고

그것이 붓다가 발견한 연기법의 가장 중요한 핵심이죠.

 

그래서 사람도 그러하다.

그리고 우리 눈앞에 펼쳐지는 모든 현상도 그러하다

뭡니까?

현상은 있지만 본질은 없다

이렇게 이야기를 하는 것이죠.

 

이건 또 나중에 가면 용수에 의하면

본질이 없기 때문에 온갖 현상들이 펼쳐질 수 있다

이렇게 이야기를 할 수 있겠죠.

 

그래서 이런 조건생 조건멸의 연기법에서

아주 자연스럽게 도출되는 결론이 무아죠.

, 본질은 없구나

본질이 있으면 움직일 수가 없으니까, 생성 변형이 불가능하니까

고정된 본질이라고 하는 것은 없구나라고 하는 것이

자연스럽게 도출되게 되는 겁니다.

 

그리고 여러분 알다시피

붓다는 이 부분이 자기가 발견한 거고

자기가 만든 게 아니고

발견한 우주적 진리다

이렇게 선포하죠.

 

그래서 불이가 갖고 있는 두 가지 특성이 있는데

하나는 열이고 하나는 빛이잖아요.

그러니까 인도의 수정주의자들은

뭔가 갈고 닦고 연마하고 재련하고 제작하는 걸 되게 좋아하는 것이죠.

그러니까 이 열이 갖고 있는 불순물을 녹이는 힘에 매료되어서

그쪽으로 가면 수정주의가 되는 겁니다.

고행주의도 되고.

 

뭔가를 열심히 하지 않습니까?

열심히 해서 이상적인 것을 획득하려고 하는 이렇게 되는 것인데

불의 두 번째 속성은 빛이잖아요.

밝게 비추는 힘이 있지 않습니까?

비추는 힘, 알아차리는 힘

그러니까 이 붓다는 열보다는 빛에 더 관심을 가지고

그것이 더 중요한 핵심이다

이렇게 생각을 했죠.

 

그렇게 해서 나온 것이

불로 인한 정화, 열이죠.

열에 의존하면

감각적 욕망을 통제한다든지 아니면 의식을 집중한다든지 하는

고행이나 삼매에 빠지게 되는데

그것은 잠깐 되는 거다.

영원히 될 수가 없다.

그러니까 이것은 완전한 솔루션이 아니다.

이렇게 얘기를 한 거고.

 

그러면 대안이 뭐냐?

불의 다른 측면인 빛을 이용해야 한다.

그 빛은 비추는 느낌이잖아요.

비추는 특성이 있어서 그 비추는 대상을 밝혀주지 않습니까?

그렇게 해서 사람은 불의 비추는 능력

즉 통찰이라고 하는 것에 의해서 밝아져야 한다.

 

그래서 붓다는 모든 괴로움의 근원을 무명으로 봤는데

무명은 밝지 않은 거잖아요.

밝아지면 빛으로 비춰줘야 되지 않습니까?

 

그렇게 해서 붓다는 밝음을 강조했고

그다음에 그 무명을 타파하는 반야 즉 지혜죠.

반야가 불교적 가르침의 핵심이 된 것입니다.

 

 

오늘의 결론은 뭐냐 하면

붓다가 바라보기 또는 불교에서 가르치기를

이 괴로움이라고 하는 것은

괴로움을 불러일으키는 탐진치 같은 게 있다고 하면

그런 심리적인 문제들은

억누른다고 해서

닦는다라고 하는 것이 결국은 바람직한 표준에 맞춰 가는 거니까요.

억누른다고 해서 없어지지 않는다.

오히려 스프링처럼 튀어 오를 수 있죠.

우리 많이 경험합니다.

폭식 같은 게

다이어트 잘 하다가.

 

[괴로움이라고 하는 것은 참아져서 되는 게 아니다.

닦아서 되는 게 아니다.

오로지 이해해야 벗어날 수 있다.]

이것이죠.

 

누르끼리한 게 황금이라고 생각될 때는

어쩔 수 없이 그쪽에 손이 가죠.

하지만 정확하게 보니까 똥이더라 그러면

특별한 목적이 없다면 손 안 대겠죠.

어쩔 수가 없는 겁니다.

 

그러니까 불교에서는

욕망을 누르는 것이 아니고

정확하게 있는 그대로를 봄으로써

사물의 진상을 알아차리고

거기서부터 자연스럽게 벗어나 지는 것

이 과정을 매우 중시했다

이렇게 이야기를 할 수 있겠습니다.

 

그래서 불교는 불에 관해서는

열이 아니라 빛을 채택했다

이렇게 말씀드릴 수가 있겠습니다.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