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겪는 감정적 요동은
궁극적으로 생존과 번식을 위한 것이다.
불교는 이것을 알아차리고
그것의 무상함과 실체 없음을 통하여
苦의 문제를 해결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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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우리 사람들이 느끼는 희노애락이라고 하는 감정에 대한 얘기를 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인간한테는 감정이 있죠, 희노애락이 있습니다.
근데 진화심리학적으로 보면은
인간의 감정이 있다는 것, 이성도 있지만 감정의 궁극적인 목적은
아무래도 살아남는 생존이죠.
생존과 번식
이 두 가지가 어떻게 보면 모든 생명 현상의 궁극적인 목적이다.
이렇게 이야기할 수 있겠습니다.
인간은 감정이라고 하는 것을
이 생존과 번식에 굉장히 중요한 하나의 도구로 발전시켰던 것이죠.
그래서 행복이 뭐냐라고 많은 사람들이 행복론을 연구해 봤는데
결국 심리학자들의 결론은 이런 겁니다.
유명한 그림이 있는데
사랑하는 사람과 우아한 자리에서 와인을 놓고, 고기를 써는
즉 사랑하는 사람들과 같이 밥을 먹는 것
그것이 행복이다,
이렇게 이야기를 하는 거죠.
그래서 행복은 추상적이기보다는 대단히 구체적이고 감성적인 것인데
그것은 그 한 단어로 표현하면 굿필링이다.
이렇게 표현을 하는 것이죠.
그러니까 굿필링, 필링은 느낌이지 않습니까?
이 느낌이 자주, 오래, 그리고 강력하다면 우리는 행복하다.
이렇게 이야기를 할 수 있을 겁니다.
근데 이 행복이 생존 다음에 오는 우리의 목적이라고 하면
근데 이 감정, 행복이라고 하는 그 감정이지만
그 감정에는 여러 가지가 있는데
거기에는 기쁨과 슬픔이 있고, 또 분노와 공포가 있고
이렇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근데 이 기쁨과 슬픔도 보면은 역시 그 생존 문제와 관련이 있는데
얻었다, 획득했다, 성취했다, 도달했다라고 하는 것은 기쁨이 되는 것이죠.
그런데 이 어떤 기쁨입니까?
생존할 확률이 대단히 높아지는 거죠.
그다음에 만약에 우리가 뭘 상실했다, 이별했다, 박탈당했다, 실패했다 라고 하는 것은
슬픔이라고 하는 감정을 이끌어내는데
이 슬픔의 감정의 핵심은 뭐겠습니까?
생존 확률이 내려갔다, 생존할 확률이 떨어졌다, 위험해졌다
이렇게 이야기를 할 수 있겠습니다.
그래서 기쁨과 슬픔을 분석해보면
결국 마지막에는 생존의 확률과 상관이 있다.
이렇게 이야기를 할 수가 있겠습니다.
이게 진화심리학에서 바라보는 감정의 효용 같은 거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렇다면 분노와 공포도 비슷한 베이스가 있다.
이렇게 이야기를 할 수 있겠습니다.
이 분노라고 하는 것은
주로 우리가 화가 나는 것은 주로 사람한테 화가 나죠.
뭐 자기 자신에게도 화가 나고, 상대방에게도 화가 나고, 세상에 대해서도 화가 나지만
이 분노라고 하는 것은
주로 관계에서 발생하는 감정입니다.
더군다나 이 관계 속에서 자기가 생각하는 자기 이미지가 있잖아요.
그 자기 이미지가 훼손되거나
이미지가 약화할 것 같거나
이미지가 더러워질 것 같으면
대단히 위험하다고 생각하고 불안해하면서 화를 낼 수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생존 이야기를 했는데
인간은 사회가 자연환경보다 훨씬 더 1차적인 생존 환경이죠.
그러니까 이 1차적인 생존 환경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다른 사람에게 내가 어떻게 보이는가 라고 하는 이미지거든요.
이 자아 이미지라고 하는 것은, 평판이라고 하는 것은
생존에서 굉장히 중요한 부분이다.
그래서 소극적으로는 평판
적극적으로는 더 나은 지위
이것이 사회적 생존의 관건이기 때문에
여기에 굉장히 예민하다
이렇게 얘기를 할 수 있겠습니다.
그리고 이런 부분이 잘 안될 것 같으면 화가 난다
이렇게 이야기를 할 수 있겠죠.
그러면 두려움, 특히 공포는 뭐냐?
이거는 직접적으로
이게 지위라든지 평판이라든지 하는 사회적 관계는 간접적이지만
직접적으로 죽을 수도 있겠다,
직접적으로 목숨이 위험하다고 생각되는 수준의 심리적인 압박감을 우리는 공포다,
이렇게 이야기를 할 수 있겠습니다.
멀리 갈 것도 없이 50~60대는 건강검진을 했는데
어떤 부분은 좀 더 자세히 보자거나
어떤 부분은 떼서 조직 검사를 해봐야 되겠다거나
이렇게 이야기하면 우리는 바짝 졸죠.
그리고 한 일주일 정도 검사 나오기까지 별 상상을 다 하면서
잠을 잘 이루지 못하고
그런 어떤 경험들이 다들 있으실 겁니다.
그러니까 이 분노와 공포는 결국은
소멸할 수도 있다, 죽을 수도 있다라고 하는 두려움과 연결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다만 그것이 간접적이냐 직접적이냐의 차이가 있는 것이죠.
그렇게 보면은
희노애락, 즉 기뻐하고 슬퍼하고 화를 내고 두려워하고 하는 이 모든 감정이
하루에도 12번씩 교차하는 우리의 삶이라고 하는 것은
어쩌면 전쟁 같은 것이다.
즉 살아남기 위해서 싸우는 전쟁터 같은 것이다.
이렇게 이야기를 할 수 있겠네요.
그래서 우리가 보통 생존의 관점에서 성공을 바라볼 때는
이 성공과 행복이 함께 가기는 어렵다.
이렇게 말을 할 수 있겠습니다.
물론 성공과 행복을 굳이 대칭해놓고
이거 아니면 저거라고 말할 필요도 없고, 그게 사실도 아닙니다.
하지만 성공이라고 하는 것은 아까 이야기한 것처럼
더 나은 이미지, 더 나은 위치, 더 나은 생존과 번식의 가능성을 위해서
투쟁하는 것이기 때문에
조금 더 성공 지향적으로 사람들이 살아가게 됩니다.
그러면 행복이라고 하는 것은 만족감
그다음에 사랑 그다음에 성취감, 유대감 이런 느낌, 굿 필링
이런 느낌으로 이루어져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아까도 이야기한 것처럼
행복이라고 하는 것을 궁극적으로 보니까
사랑하는 사람과 같이 밥을 먹을 때더라 이거죠.
그러면 밥을 먹는 거는 성공했는데
사랑하는 사람이 없다면
행복이 절름발이 행복이 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사실은 전쟁터 같은 삶을 살고
전쟁터에서 살아가는 우리는, 심리적인 전쟁 형태에서 살아가는 우리는
성공과 행복을 함께 누리기가
밸런싱을 잘 잡아서 함께 누려가기가 어렵다.
이렇게 이야기를 합니다.
더군다나 뇌를 연구해 보니까
이 뇌라고 하는 것은 고차적인 생각을 하고 감정을 가질지라도
또 도덕과 철학을 가질지라도
뇌는 기본적으로 생존을 위한 회로더라.
그러니까 우선 살고 봐야 되잖아요.
그래서 산다라고 하는 것은
먹이와 지위에 관한 것이기 때문에
거기를 중심으로 해서 작용을 하고 있는 것 같다
이렇게 이야기를 할 수 있겠죠.
그래서 이런 우리의 삶의 조건에서
성공을 위한 몸부림이라고 하는 것 때문에
괴로움이라고 하는 것이 필연적이겠다
이런 느낌을 받게 됩니다.
그래서 이 괴로움 때문에
사실은 불교라고 하는 종교가 탄생을 한 것이죠.
괴로움이 없다고 하면
불교라고 하는 종교는 적어도 필요가 없었을 거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런데 불교가 이것을
즉 괴로움을 다스리기 위해서 제시한 키워드가 있는데
그것이 ‘알아차림’
즉 그때 당시 표현으로 하면 ‘사띠’
한자로 하면 ‘정념’
이런 것이 되겠습니다.
정념, 올바른 생각, 올바른 기억 이렇게 번역할 수 있는데
이 정념은 삿띠라고 하는 것은
무엇보다도 있는 그대로를 인식하는 것
이렇게 표현을 하고 있습니다.
있는 그대로 인식하기가 정말 어렵죠.
우리는 a인데 b라고 말을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내가 수업을 따라가기 벅차다’ 이렇게 이야기하지 않죠.
‘학교가 뭔가 공부하는 방향이 잘못됐어’
이렇게 이야기를 할 수 있죠.
그런 것들이 우리가 주로 표현하는 방식입니다.
그러니까 다른 방식으로 표현하지 말 것.
친구가 잘 됐는데
친구가 잘 돼서 오래간만에 만났더니 친구가 너무 잘 돼 있어.
학교 다닐 때 내가 공부를 못했어.
근데 ‘친구가 부럽다’ ‘부럽다’. 또는 ‘좀 샘난다’
이게 자기 감정인데 그렇게 표현하지 않죠.
근데 ‘그 친구가 너무 일을 많이 해서 애가 얼굴이 막 맛이 같더라’
이렇게 표현을 하는 것이죠.
그러니까 다르게 표현해 봤자
자기를 알아차리는 데 방해만 될 뿐이다.
그래서 다르게 표현하지 말 것
있는 그대로 보고 표현할 것
두 번째는 해석하거나 합리화하지 말 것.
사실을 이야기하는데
사실을 해석하거나 합리화하는 것은 왜곡할 수 있기 때문에 그러지 말라.
그러면 자신의 감정, 자신의 현재 감정 상태를 알아차릴 수가 없이 꼭꼭 숨어버린다.
숨어버린 감정은 뭔가 물밑에서 작업하다가
어느 순간 맥락도 없이 뛰쳐나와서
나의 삶을 오히려 위협하는 일이 된다.
이렇게 이야기를 할 수 있겠습니다.
첫 번째는 ‘있는 그대로 보자’라고 하는 것이고
두 번째는 있는 그대로 봐야 되는데 아까 이야기한 것처럼
질투하고 있는데 사실은 비난하는 표현을 했다라고 하면
그것도 알아차리면 되는 거예요.
“나는 사실은 질투하고 있으면서 샘을 내고 있으면서
이 사람을 비난함으로써 깎아내림으로써
밸런싱을, 내 마음의 평정을 유지하려고 하고 있구나.”
그걸 알아차리면 되는 것이죠.
알아차린다는 것이 핵심이죠.
두 번째는 의미 있는 기억을 자기에게 환기해줘라.
기억을 인출하라라고 하면 어떤 기억이 있냐면
불교적 진리죠.
이것은 무상한 일이다.
나의 감정도 또 이런 상태도 무상한 일이다.
그죠?
어떤 조건에 의해서 일어나고 조건이 사라지면 없어질
영원히 있는 것이 아니다라고 하는 것이고
두 번째는 그렇기 때문에 또 실체가 없는 것이다.
무아다, 실체가 없는 것이다.
이렇게 얘기를 하는 것이죠.
그래서 무상하고 무아인 것을 가지고
우리가 오래 집착할 수는 없겠죠.
그 집착할 것이 없으면 괴로울 일도 없다.
이렇게 얘기가 되는 겁니다.
이것이 불교적인 관점입니다.
즉 우리가 어떤 현상이 생겨났을 때
그리고 그 현상 때문에 내 마음이 또는 내 감정이 요동칠 때
첫 번째는 있는 그대로 보자는 거고
두 번째는 그걸 어떻게 볼 거냐 하면
불교라고 하는 안경을 써봐라.
불교라고 하는 안경은
사물을 무상한 것으로 보고, 실체가 없는 것으로 보기 때문에
집착할 만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하는 관점입니다.
그래서 이 불교적 관점을 가지고
나의 감정을 있는 그대로 나의 감정을 잘 지켜보는 것
그것이 나를 점차 점차 이해하게 하고
그다음에 감정의 통제, 감정이 나를 붙잡는 것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게
이것이 풀어서 벗어나는 거니까 해탈이죠.
이것이 불교적 관점의 효용이다.
이렇게 이야기를 할 수 있겠습니다.
오늘은 감정이 요동칠 때가 사실은 공부할 좋은 기회다.
이렇게 결론이 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감정을 보통 우리는 억누릅니다.
억누르거나
그렇게 생각하면 안 돼 그렇게 느끼면 안 돼 라고
자꾸 안 돼라고 해서 억누르지만
안 되지 않죠, 아니 그렇게 안 되죠.
눌렸다가 스프링처럼 더 크게 일어나거나 폭발해버리죠.
그래서 통제하려고 하지 말고 알아차리려고 하다 보면
그런 알아차림이 자꾸 힘이 강해지면서
결국 결국 결국에는
헛된 집착으로부터 벗어나서
쿨한, 마음은 또 잘 평정된
그런 상태가 될 수 있다.
이렇게 이야기를 할 수 있습니다.
결국은 무상과 무아를 빼고
불교를 논하는 것은 사실은 의미가 없죠.
그래서 오늘은 감정과 알아차림
그리고 무상과 무아
이 세 가지를 엮어서
감정이 요동칠 때가 공부할 좋을 때다
라고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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