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의식, 에고 내가 알고 있는 지식
내가 가진 것들, 믿음 체계
다 내려놔야 해요.
다 무장해제 시키고
본래 내 참나로, 내가 있던 자리로 돌아가기 위해서
그런 여정인 거죠.
자기의 의지와 믿음으로서만
오직, 자기 믿음으로만 가는 곳
깨달음의 핵심
믿음 & 쿤달리니
안녕하십니까?
계속 연이어서 쿤달리니와 아즈나차크라에 대해서 말씀을 좀 더 드릴 게 있습니다.
저는 쿤달리니가 언제 열렸는지조차 기억이 잘 안나요.
수행하면서 굉장히 몸수련을 많이 하는편이라서
몸수련은 고통을 기반으로 하거든요.
그 고통을 이용해서, 그 고통을 수행의 도구로 쓰는 거죠.
몸이 아프면
“이게 몸차원에서의 반응이겠구나”하고
차크라가 열리고, 쿤달리니가 돌아다니면서 치유하면서 아플 수 있는데
저는 그 과정에서 이런 몸수련을 많이 했기 때문에
그런 몸 반응에 대해서 좀 둔감한 편이었었어요.
그런데 이 쿤달리니는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준비된 자한테는 당연한 결과이고요
이게 깨어나게 되면 당연히 몸 아픈 곳을 치유하고
내가 갖고 있지 못한, 본래 구족되어 있는데
갖고는 있었으나 쓰지 못했던 그 영역을 활성화하는 그런 힘이 있거든요.
그래서 나의 능력이 굉장히 커지게 되고
생각하지 않았던 영역까지 생각을 하다 보니까
인식능력이 굉장히 넓어지게 됩니다.
그러다보면 품이 커지게 돼요.
--
수행은 믿음이 전부예요.
이렇게 넓어지는 부분에 대해서는 누구든지 다 갈 수 있어요.
이 부분까지는 가이드가 정말 풍부합니다.
주변에 그런 수행하시는 분들이 차츰차츰 스텝바이스텝으로 경험을 하다보면
이 영역까지는 다 도달하게 돼요.
서로 밀어주고 끌어주고 또 그런 구루라든가 이런 사람의 도움을 통해서 스승의 도움을 통해서
정말 편안하고 안전하게 어느 지점 영역까지는 도달하게 됩니다.
그 영역이 거의 한 자기가 갖고 있던 그런 고유한 에고가 덜어지는 게 한 절반 정도?
50% 정도 덜어지면, 그 영역까지는 참 무사히 잘 갈 수는 있는데
그 다음에는 문제가 뭐냐 하면
여기 백회부분과 깨달음을 이어서 올라가야 하는 그 경지는
솔직히 누구의 도움도 받을 수 없어요.
오로지 자기의 의지와 믿음으로서만 가게 됩니다.
이 믿음, 제일 중요한 단어인데,
오늘 말씀 드리고 싶었던 내용이 이 믿음에 관한 내용이에요.
믿음을 어떻게 갖고, 깨달음까지 갈 수 있느냐?
굉장히 어려운 내용입니다만,
본래 자기가 갖고 있던 그 믿음을 실현한다, 구현한다라는 것은
본래 습관화된 자기의 의식체계가 있겠죠.
이것은 이렇다, 저것은 저렇다, 이것은 이런 상황을 거쳐서 저렇게 될 것이다 라고 하는
그런 어떠한 믿음체계가 있습니다.
각자 각자가 인지하는 범위 내에서.
그런데 수행이 되는 믿음은 어떤 거냐하면요
자기를 내던져야 해요.
자기의 목숨마저도 내던져야 하는 그런 용기가 필요해요.
그런 용기가 없이는 나아갈 수가 없습니다.
의심이 들 수 없죠.
의심을 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에요.
이것은 내가 믿느냐 안 믿느냐? 차원이거든요.
내가 누굴 믿는다.
믿는다는 건 뭘까요? 그 단어의 뜻이?
그냥 귀의한다는 뜻이에요.
내 목숨마저도 걸겠다.
이것은 어찌 보면 용기인 거고.
그거 자체가 수행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으신가요?
저는 수행이라고 느껴지더라고요.
왜냐하면 나의 목숨마저도 누군가에게 어떤 것에게 믿는다, 의탁한다라는 것은
두려움으로 다가오기 때문에. 큰 두려움이죠.
이 두려움을 극복하고 한 발짝 내디딘다.
이 내디딘다는 표현이 믿음이라고 인지될 수 있고
또 믿음으로서 내 몸과 마음을 귀의하고 우주에 의탁한다는 것은
나를 그냥 던진다는 건데
이게 마지막 관문인 거 같아요.
--
나의 믿음을 시험받게 될 때
어찌보면 여태까지 쭉 수행을 해오면서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가이드가 필요한 선까지는 있거든요.
예를 들어서 에베레스트 정상을 공략할 때
베이스캠프는 산의 중턱까지만 있게 되죠.
나머지 정상을 공략하는 사람은
정말 소수 정예나 정말 마음 먹겠다라고 하는 사람들만 가게 되는 겁니다.
그런데 베이스캠프까지는
구루라든가 여러 도반이라든가 그런 가르침에 의해서 가이드를 받게되어서 그 영역까지는 도달하는데
나머지 정상을 공략하는 거, 깨달음까지 가는 그 길은
스스로가 마음으로 먹어야만 하는 거죠.
죽음을 불사하는.
나 꼭 저기까지 가고야 말겠다라고 하는 의지와 용기
두려움에 맞설 수 있는 그런 자기만의 투지.
믿음이라고 제가 표현을 했습니다만.
그냥 그 정상을 공략하기 위해서 눈보라가 휘몰아치는 곳에서
배낭 하나 메고, 살지 죽을지는 몰라요.
그런데 거기는 가야 하겠어요.
그런데 그렇게 가겠다고 용기를 내서 배낭을 메고 눈보라를 뚫고서 올라가면
아마 두렵겠죠.
벌써 그 순간 내디디고 눈보라 속에서 베이스캠프가 멀어졌는데
어느 정도까지 올라갔는데
다시 내려올까요? 못 내려와요.
말 그대로 빨리 목적지까지 도달하거나 그게 장땡입니다.
빨리 갈 수 있도록 더 용기를 내고
정말 의탁하는 거죠. 우주에 나를 의탁하는 그 마음.
그 믿음으로서 깨달음에까지 갈 수 있는 겁니다.
그냥은 못가요.
쉽게는 간다고 얘기는 못 하겠어요.
그냥 카더라,
이렇게 하면 되지 않겠느냐, 저 사람 말을 듣고 어느 정도까지는 간다니까요.
밀어주고 끌어주고 당겨주고 해서 어느 정도 선까지는 가는데
나머지 그 이후에는 깨달음까지 가는 것은
자기가 갖고 있던 모든 것들을 내 내던져야 해요.
여기까지는 어떻게 자동으로 와요.
끌고 올 수 있어요.
그런데 여기서부터 깨달음까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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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우리는 사랑받고 있어요.
생각해 보세요.
우리가 심장을 뛰게 하고, 숨을 쉬게 하고,
밥을 먹으면 자연스럽게 소화되는 이 힘은 우주의 힘이잖아요.
이것은 우리의 힘으로 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닙니다.
이미 혜택받고 있는 존재였고
이미 비호 아래 있고
이미 보호받고 있는 존재입니다.
깨달음이 어느 정도의 선까지라는 게 있는 게 아닙니다.
그냥 과정에 불과한 겁니다.
만약에 우리가 오감만 있다면 여기까지였겠지만
십감이라든가 이십감을 갖고 있는 존재는 어느 선일까요?
그건 알 수 없는 겁니다.
그냥 계속 가는 여정이고, 과정에 있는 것인 거지
그냥 인간의 눈으로 봤을 때, 오감의 눈으로 봤을 때
요 정도 선까지라면 그때도 깨달음의 범주에 들 수 있지 않을까요?라고
그냥 짐작만 할 뿐이지
이게 딱 “이건 그거다”라고 그렇게 얘기할 수 있는 존재는 아닙니다.
여기까지 가기 위해선
나의 모든 잠재의식, 무의식, 에고, 내 상이 에고,
이것마저도 다 내려놔야 하는 거고, 내가 알고 있는 지식?
내가 가진 것들?
카더라 이런 것들?
믿음 체계?
다 내려놔야 해요. 다, 무장해제 시키고
다시 본래 내 참나로, 내가 있던 자리로 돌아가기 위해서.
그런 여정인 거죠.
어찌보면 이게 수행이지 않을까?
이 상태가 진짜 수행이지 않을까? 싶어요.
1단계와 2단계가 있다면
1단계는 내 육신을 갖고 가는 수행이라면
2단계, 그런 깨달음까지 가는 여정은 내 목숨을 걸고 하는 것이라고나 할까?
그만큼 굉장한 가치가 있는 거죠.
마치 꼭, 이역만리 타향살이를 하고 있는데
고향으로 돌아가려고 하는 회귀본능이라고나 할까?
그런 무의식의 외침들이 있습니다.
끓어오르는 외침들.
“거기로 가고 싶다!”라고 하는.
제가 좋아는 그런 내용이 있는데
저는 기독교를 믿지 않습니다만
식탁 앞에 앉아서 하나님 아버지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그 기도문 있지 않습니까?
하늘에서 이루었었던 것들이 땅에서도 이루어진다는
그런 기도문이 있습니다.
그 내용을 듣는 순간
“아, 맞다, 우리 수행자가 정말 해야만 하는, 외워야만 하는 그런 기도문이 아니냐?”
본래가 이루었던 그런 일들이
우리 인간세계, 이 지구별에 그대로 이루어진다면
이게 정말 천국이고, 이게 정말 파라다이스이고, 이게 극락이 아니냐
이 몸을 통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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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는 것들을 그대로 받아들이세요.
나머지는 ‘자동’입니다.
괜히 제가 처음부터 그냥 겁을 잔뜩 들인 것 같네요.
에고를 내려놓다 보면 자연스럽게 천천히 내가 몸이 상하지 않는 안의 범위에서
천천히 천천히 에너지가 빠지고 새로운 에너지가 들어오고
나쁜 것들 뺏어나가고 좋은 것들이 내 속 안을 차츰차츰 채우게 될 겁니다.
아주 자연스럽게요.
아주 자동으로요.
수행하다 보면 어떤 걸 느끼게 되냐하면
“아, 이게 오토매틱이구나, 진짜 자동이구나
우리가 일부러 이렇게 애써서 할 필요가 없구나.
이미 인지하지 못 했지만
본래는 내 옆에 와서 참나가 내 옆에 있어서
바로 내 옆에서 자동으로 뭔가 다 이미 해주고 있었구나”라는 것을
아시게 될 거예요.
수행하면서 매번 그런 것들을 많이 느끼거든요.
거듭되면 될수록 마음이 편안해지고 자동으로 되고 있다라는 믿음을 더 갖게 되고
이런 것들이 더 단단해질수록 믿음은 더 커지는 거고
좀 더 거기까지 가기 위한 그런 내가 된다고나 할까?
몸과 마음이 그런 식으로 더 단단해지고, 바운드리가 넓어지고, 품이 커진
인식이 넓어지는 그런 사람이 됩니다.
그래서 무의식을 정화하시고
내 잠재의식에 어떤 것들을 가졌는지
하나씩 하나씩, 조금씩 조금씩 열어서 정화하시다 보면
언젠가는 그렇게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아요.
그렇지만 용기는 내셔야만 해요.
“나 가겠다”라고.
한번 해보겠다.
우리가 돈을 벌러 이 별에 오진 않았고
우리가 싸우러 이 별에 오진 않았습니다.
우리가 이렇게 된 것은
저 사람 때문이 아니고, 쟤 때문이 아니고, 하늘 때문이 아닙니다.
그 과정을 겪으면서 우리가 얻어야만 하는 교훈으로 삼아야만 하는 것들
배우기 위해서 이런 일들이
카르마와 더불어서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나는 겁니다.
호란스러울 필요가 없어요.
그냥 본래를 믿고, 참나를 믿고, 나를 내던지세요.
이러면 원하는 목적지에 어느 순간, 가 있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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