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부처님 법을
제 경험을 가지고 공부를 하다 보니까
많은 절차를 지나가는 것 같습니다.
예를 들어서 처음 불법을 접할 때
108배를 하고 그다음에는 경을 계속 읽고
그다음에 또 천배, 3천 배를 한다든지
뭐 그런 하나의 단계를 거쳐 갔던 것 같은데
요즘에 들어서는 참선에
좀 열심히 하려고 노력하고 있는데
상당히 좀 힘듭니다.
그래서 제가 이런 경과를 거쳐가는 거를
스님의 경우에 비춰서 좀 여쭤보고 싶습니다.//
어떤 과정을 거쳤냐?
나는 마음 과정도 특별히 거친 게 없습니다.
저는 중학교 때 절에 들어와서
스님 말 듣고
불교 입문한 건 중학교 3학년 때 했고요.
절에 중으로 들어온 거는 고등학교 1학년 때 들어왔고
특별히 무슨 사연이 있어서 들어온 것도 아니고
그냥 스님이 들어오라고 해서 들어온 거고.
그리고 난 동국대를 나온 것도 아니고
선방을 간 것도 아니고
강원을 간 것도 아니고
그냥 세상에서 그냥 살았어요.
감옥도 두 번 갔고, 학원 선생도 했고, 연탄장수도 했고, 구두 닦기도 했고.
근데 나의 관심은 이래요.
왜 그럴까?
어떤 일을 볼 때
내가 어릴 때 늘 그 우주의 이치나 사물의 이치를 궁금해하고 연구하듯이
이게 불교에 들어와서는
인생의 이치에 대해서 늘 생각을 하는데
경을 읽어도
“왜 부처님이 이런 말씀을 하셨을까?”
“이 사람 왜 이런 질문을 했을까?”
“아, 이래서 부처님 이런 말씀을 하셨구나.”
“왜 화가 날까?”
“화를 덜컥 냈을 때 왜 화가 날까?”
“그 사람은 그런데 왜 내가 화가 날까?”
“왜 내가 괴로울까?”
“왜 내가 두려워할까?”
어두운 밤에 나가면 두렵잖아, 그죠?
그럼 두려움이 어둠에 있는 걸까?
두려움이 공동묘지 안에 있는 걸까?
왜 공동묘지 옆으로 가면 두려울까?
거 왜 그럴까?
분명히 여기 현상이 일어났잖아. 그죠?
그럼 이 현상이 왜 일어날까?
왜 밤에 어두운 길에 산모퉁이를 싹 돌면 머리가 왜 쭈뼛할까?
다시 가보자.
아까 그게 되는데 왜 이제는 괜찮지?
왜 그럴까?
이게 어둠에서 오는 걸까?
공동묘지에서 오는 걸까?
이게 산모퉁이에서 오는 걸까?
이게 어디서 오는 걸까?
어떤 불신의 의심이 아니라
거기에 대한 의문
“아, 이게 이래서 이런 거구나.”
경전을 뒤지니까
“체험한 것이 부처님이 이렇게 말씀하시는구나.
그렇지 내가 그 이유를 몰랐는데 그렇구나”
또 내가 반대로
경을 읽고 부처님이 이렇게 말씀하셨는데
내가 경험을 해보면서 어때요?
“그래서 부처님이 이렇게 말씀하신 거구나.”
그래서 나에게는 절하는 것도 수행이고
화내는 것도 수행이고
밥하는 것도 수행이고.
밥도 딱 해보면요.
죽밥이 됐다가 설익었다가 몇 번 해보면 아이디어가 생기거든요.
아시겠어요?
햅쌀을 갖고 할 때는 오래 담그면 안 돼요.
물에 10분쯤 담가놨다 밥을 해야 밥이 제일 맛있어.
묵은쌀은 한 30분에서 1시간쯤 담가놔야 돼.
햅쌀은 물을 조금 적게 부어야 되고
묵은쌀은 물을 많이 부어야 되고,
물에 담가놓은 쌀은 적게 부어야 돼.
안 그러면 많이 부어야 돼.
처음에 불을 강하게 했다가
바바바박 끓을 때 불을 줄여서 오래 작게 했다.
다다다다다다 소리가 날 때 해보면
어떤 때는 이게 딱 조금 더 세겠다.
어떤 때는 조금 적게 돼.
밑에가 노르끼리하게 누를 때 밥맛이 제일 좋아
밥을 잘하면 맨밥만 먹어도 입이 착착착착착착 달라붙는 게
반찬이 별 필요가 없어요.
연탄불도 이렇게 딱 몇 번 갈아보면
요렇게 하니 탁 꺼져버려. 요렇게 하니 붙어.
그 연탄불을 갈아 넣고는 뚜껑을 열어놔야 불이 붙잖아.
근데 연탄이 불이 거의 다 돼서 갈아넣기 늦었어.
불이 조금밖에 안 남았어.
그때 연탄을 탁 갈아 넣고 불문을 탁 빼면 푹 꺼져버려요.
그 참 이상하다.
그럴 때는 오히려 불물을 조금 거의 막아놓다시피 하고
연탄을 딱 얹어놔야 돼.
그래야 이게 달아올라붙어.
나는 공부를 그렇게 했어.
남이 무라 하니까
나는 무라
화두는 든다 그러는데 안 들어져.
왜 안 떨어질까?
그럼 무라는 의미가 뭘까?
왜 무자 화두가 생겼을까?
그래서 옛날 경전을 뒤져봤어.
아, 이래서 의심이 이분들은 들었구나.
잡지를 봐도 공부거리
신문을 봐도 공부거리,
TV를 봐도 공부거리
벌거벗은 여자 몸을 봐도 공부거리
다 공부거리야.
내가 잘해도 공부거리, 내가 못 해도 공부거리
그 일체에 다 뭔가 원리가 있다.
잘했을 때는 잘못한 원리가 있고
못했을 때는 못 했던 원리가 있고
계획을 먼저 세우고
그다음에 수정을 하고
체험을 해보면서 수정을 하고.
인도가 살면 인도 사람을 연구하죠.
노 프라플럼 이라고 해놓고, 분명히 된다 해놓고 다음에 안 돼
또 된다 해놓고 다음에 안 돼.
성질이 나
자식들 인도놈들 왜 이럴까?
그럼 저희끼는 어떻게 살까?
그거 이상하잖아.
맨날 거짓말만 하면 저희끼리 어떻게 살겠어.
그래 생각해 보면
‘노 프라플럼’ 이 말이
‘문제없다, 꼭 할 수 있다’, 이런 말이라고 내가 나는 그렇게 인식을 했는데
이 사람들이 그 말을 쓸 때는 그런 의미가 아니야.
‘그냥 한번 해봐야겠다’ 이런 의미구나.
‘노 프라플럼’ 하면 내가 그 말에 대해서 집착을 안 하죠.
‘못 하겠다’ 하는 것보다는 듣기가 좋아요? 안 좋아요?
그러니까 내가 이제 딱 보고
할 수 있는 일인지, 없는 일인지
네가 무슨 말을 하든지
내가 가서 할 수 있겠다 싶으면 짐작하고
문제없이 하겠다 해도
내가 보기엔 좀 안 되겠다 싶으면
그래 한번 해봐라 이렇게 탁 하지만
내가 속으로 네가 9월달까지 한다 이래도
나는 속으로 12월달까지 계획을 딱 잡는 거예요.
9월달까지 못 했다
“한다고 했잖아” 이러지만은
내 속에서는 집착 안 해.
내가 처음부터 못 할 줄 알았기 때문에
“언제까지 할래? 인마”
그럼 10월까지.
그래도 10월달까지 못 하니까 12월달까지 해라 하면
12월달까지 못 하거든
알았다. 10월달 꼭 해야 돼.
그럼 10월달 가면 또 못 해놓고
그럼 그 말에 집착을 하면 사람이 속 뒤집어 지죠.
딱 살면서 ‘이렇구나 이렇구나’ 해서
내가 딱 잡아놓고 하면 돼요.
10월달까지 되면 다행이고
내 예측이 안 맞으면 뭐 어때?
맞는 게 뭐 그리 중요해.
그러나 실수는 안 하죠.
지금 몇 번 실수했어요.
올해까지 다 한다 해서
여기서 준공식 하려고 사람을 억수로 데려갔는데
준비가 안 됐어.
그럼 뭐라고 그러는지 알아요?
건물 짓다 놔놓고 준공식하고 나중에 지으면 된다는 거에요.
덜 지었는데 뭐 때문에 준공식을 하냐?
그래서 캔설을 해고
이듬해 1년 있다 하니까 준공식 충분히 할 수 있었지.
근데 이번 케이스는 어떻게 됐냐?
나도 저희 말을 따라 했어요.
다 지어놨다고 그랬는데 가보니 덜 지었어.
근데 저희는 그래놓고 페인트 칠하고, 천막치고 준공식 하는 거예요.
좋다. 나도 그랬어요.
준공식 하고 난 뒤 요새 계속 짓고 있어요.
그러니까 그 사람들 말을 믿은 것만 문제가 아니라
그거 틀렸다고 할 것 없어.
또 그런 방식으로 또 그 사람들은 하니까
그래도 또 문제가 없어요.
다 지어놓고 준공식 하나
기둥식 세워 놓고 하나
그 사람들은 말이 맞아.
처음에는 막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라 해서
준공식을 1년 연기하고 그랬는데
나도 요새 조금 더 열려서
그래 됐다 하자
준공식 하고
내가 안 됐는데 남을 속이는 게 아니라
덜 지어놓고 막 속여가 준공식 하는 게 아니라
저희가 준공식 준비하니까 말 안 한다 이거야.
전에 같으면 ‘안 돼’ 이랬는데
‘해라’
그러면 좀 덜 고친 거 있으면 끝난 뒤에 고치면 되지.
그래서 올여름 내내 준공식 한 건물을 내내 고쳐주고 있죠.
이렇게 살면서 지혜가 생긴
내 마누라하고 살면서
처음에는 모르고 싸우더라도
몇 번 싸워 보면서
이 성질이 어떻구나, 뭘 좋아하고 뭐가 문제고
이래서 깜냥이 딱 잡히면 거기 맞춰 살면 되잖아.
연구 안 하니까
연구 안 한다는 말은
수행 안 하니까 갈등이 생긴다.
수행을 하면
몇 번 해보면서
처음에는 몰라서 실수를 하지만
한두 번 해보면서
자꾸 원리를 찾으니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가 되는 거예요.
실수가 나쁜 게 아니에요.
실수를 함으로 해서
계속 바른길을 찾아나갈 수가 있다.
실수를 두려워할 필요는 없죠.
준비를 안 해야 실수를 하는 게 아니라
준비를 해도 예측이 안 맞을 수가 있잖아.
--
그 길만 있냐?
이래 저래도 안 되면 또 길이 있다.
무슨 길이?
안녕히 계십시오 하는 길이에요.
아시겠어요?
아이고 이렇게 시간 낭비하느니
딴 일 하자
포기해 버리는 길도 있다.
“아이고 내 능력 부족이다.
네가 문제다가 아니라 내 능력 부족이다.
현재 내 수준은 안 되겠다.
그래 미안하다” 하고 항복하고 나가버리는 것에요.
어떤 과정을 거쳤냐?
나는 그런 과정을 거쳤습니다.
아시겠어요?
나는 학교 가서 배워본 것도 별로 없어요.
나는 공부했다 하면
책 보고, 신문 보고.
나는 지금도 예를 들면
내가 이슬람 역사를 공부한다, 이런 사람 아니잖아.
그거 할 시간이 어디 있어요?
원고도 산더미처럼 쌓여서 교정도 못 보는데.
사건이 생기면 “어디서 저럴까? 저 사람, 이 왜 저런 저
개인이 저렇게 힘이 날까? 저 배경이 뭘까?”
이런 생각이 들면
그러면 거기 따른 자료를 구해서 보는 거예요.
“아, 사우디아라비아 배경이 이렇고
여기 나라의 국경의 배경이 이렇게 그렇구나.”
그래 내가 얘기하면
사람들이 “아, 스님, 이슬람 역사 언제 그래 공부했습니까? 박사네요” 이래.
박사는 무슨 박사야, 관심 있으니까 보지.
그러니까 여러분들은
책을 한 권을 다 읽어도 잘 모르는 반면에
스님 몇 장만 봐도 아는 거는
스님 무슨 신통력이 있는 게 아니라
나는 그게 열렬한 관심을 갖고 보기 때문에 몇 줄만 딱 읽어보면 어때요?
대충 짐작이 돼.
그래서 내 영화관에 잘 안 가잖아.
앞에서 딱 시작하는 거 몇 개만 보면
과정이 보이고 결과가 딱 보이니까
그냥 자잖아.
끝에 가서 딱 보면 맞나 안 만나 보면 비슷해.
이리저리 시작하는 거 보니까네
그냥 끝나면 재미가 없잖아. 그죠
중간에 또 반전이 있겠지.
주인공은 늘 두드려 맞아야 되나? 안 두드려 맞아야 되나?
두드러 맞고 치고 죽을 뻔하고
그래도 또 죽나? 안 죽나?
안 죽어야 돼.
그러다 줄거리가 좀 살이 붙고 뭐가 생기고
끝에 가서 어떻게 되겠지.
그래도 요즘 나오는 영화는 또 그래 재미없다고 끝에 가서 주인공을 죽이죠.
저 작가가 주인공을 죽이는 게 생겼구나.
어떤 사람은 지난번에 독일 갔더니
누가 쓴 소설이든가 무슨 소설을 보고
거기 신들이 싸우는 그런 얘기 나오는 거 보고
그게 진짜냐? 가짜냐? 그래.
그래서 그 제목이 뭐냐?
소설이래.
소설을 갖고 누가 진짜냐 가짜냐 얘기하냐?
소설은 소설이지.
읽고 재미있으면 되지.
그러면 읽지 말아야 됩니까? 읽어야 됩니까?
소설은 그냥 소설이니
재미있으면 읽고 재미없으면 안 읽고
그런 걸 갖고 진의를 논하는 게 아니지.
소설을 갖고 진짜 가짜를 논하는 사람이 세상에 어디 있어?
TV연속극 보고 여러분들 요즘 역사 공부하지?
그게 역사면 역사스페셜이지 왜 TV연속극이겠어.
재미있으라고 없는 것도 만들고
그렇다고 완전히 또 가짜로 할 수는 없으니까
대충의 줄거리만 해서
그 안에서는 전부 뭐 한다?
재밌으라고 그냥 끝나면 아무 재미가 없잖아. 사람이 안 보잖아.
그러니까 거기다가 온갖 것을 집어넣어서 한다
그리고 나중에 책 보면
“아니 책에 있는 내용하고 틀리던데요.”
틀리는 게 너무 당연하지.
책대로 하면 누가 보겠어? 아무도 안 보는데.
근데 그런 생각을 하는 사람 아직도 많아.
순진해.
어이보면 순진하고 어이보면 어리석고.
그렇게 사시면 됩니다.
나는 그랬어요.
이게 옳다는 뜻이 아니라, 아시겠어요?
요새 참선 많이 하세요.
하고 싶으면 실컷 하세요.
다리가 그냥 오글어 비틀어지도록, 허리가 굽도록 한번 해봐요.
실컷 해봐야 뭐가 없다?
후회가 없어.
술이 먹고 싶거든 그냥 코가 비틀어지도록 한번 먹어봐.
속이 뒤집히도록
자제하지 말고
그러고 그게 안 좋다 싶으면 두 번 쳐다보지 마라.
그저 찔끔 찔끔
괴롭다면서도 하고 괴롭다 면서도 또 하고.
남편 ‘나쁘다’
나쁜 거 하고 뭐 하러 사노?
난 이해가 안 돼. 발로 차버리지.
이게 모순이잖아.
“아이고 제가 아직 좀 부족했어요.”
지가 부족하니까 자기가 앞으로 발전될 가능성이 있으니까
같이 사는 건 의미가 있지.
이미 나쁘다고 단정해 버렸는데 나쁜 거고 뭐 때문에 살아?
안 그래요?
바보지.
그러니까 이 말이나 생각에 늘 모순을 가지고 있어요.
근데 그게 모순인지 몰라.
그런 모순을 안고 아무리 앉아 있다고 해결이 안 되고
아무리 절해도 해결이 안 돼요.
엎드려 절하면서 그 모순을 발견하고
앉아서 명상을 하면서 그 모순을 발견해
아까 그리 괴롭히더니
왜 가만히 앉아 있으니 아무 일도 없을까?
앉아 있는 게 중요한 게 아니야.
그래서 그걸 가지고 ‘그게 왜 그럴까?’
그걸 경상도 사투리를 하면 뭐 한다?
“이 뭐꼬”가 되는 거예요.
아시겠어요?
중국말로 하면 “시삼마”
자,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열심히 하세요.
인생살이 다 연구하고 사세요.
그게 수행이다. 수행.
늘 수행하고 살아야 된다.
그러면 어떤 일을 당해도
인생은 늘 좋은 일만 생긴다.
좋은 일이 밖에서부터 온다는 뜻이 아니고
어떤 일이, 세상 사람이 말하는 재앙이라는 게 생겨도
나한테는 늘 좋은 공부거리
새로운 걸 발견하는 계기,
나를 성숙케 하는 소재가 된다.
세상 만물이 다 그냥 공부소재에요.
오나 가나
책 들고 따라다닐 거 없이.
내가 보기에
‘저놈 새끼 미쳤다’ 하는 사람 만나면
이제 큰 고민거리가 하나 생긴 거죠.
만만한 것 갖고 내 공부가 좀 덜 되어도 넘어 왔는데
이제 내 공부가 안 되고 넘어가기 좀 어려워.
참 좋은 공부거리가 생겼다.
처음에는 그것도 몰라서 내가 미쳐서 욕을 하고 했는데
다시 자기를 딱 돌아보니까
그래 일체유심조지, 내 문제지.
큰 공부거리가 하나 생겼구나.
저런 놈하고도 잘 지내면 세상 누구하고 못 지내겠냐
이렇게 되면
세상 누구하고도 다 지내는 공부를
다 안 지내보고도
그놈 한 놈하고 지내고 해결할 수 있는 거잖아.
인도에서 아주 열악한 조건에 사는 이유가 뭐에요?
여기서 일이 가능하다면 세상 어디 가서도 가능하다.
그러니까 여기서 10년 정도 세월을 보낸다 해도 헛세월이 아니에요.
여기서 되면
다른 건 딱 그 모델만 밀어 붙여버리면 되는 거란 말이야.
사물을 긍정적으로 보면서 연구하는 게 수행이다.
부부간에도 연구하세요.
애들도 연구하고
세상사도 연구하고
요새 ..보살님 연구를 많이 해서 도가 티여서 잘하잖아.
모금할 때
‘남이 나를 본다’ 이렇게 생각하면 못 해요.
세상 사람 나한테 아무 관심이 없다.
나는 그저 길거리에 서 있는 전봇대같이 세상 사람이 생각한다.
그렇게 생각하면 모금이 잘 돼요.
내놔라. 이렇게 하는 거
주고 안 주고 내 탓이다?
지 탓이야.
나는 그냥 뭐만 하면 된다?
내놔라.
근데 내가 상대가 주고 안 주는데 신경이 팔려서
그러면 내 마음에 조마조마
주고 안 주고는 그 사람 문제에요.
나는 그냥 뭐만 하면 된다?
“내 놔라” 이렇게만 하면 된다.
이렇게 생각하면 아무 힘도 안 들고
힘도 안 들고 다가가니
그 사람도 주고 싶으면 주고, 주기 싫으면 안 주고
편하니까 또 주고.
한 번 안 주면 두 번 달라고 그러고
그러면 되죠.
이렇게 그런 것 속에서도 공부가 된다. 이거야.
상대가 막 욕을 하니까 내가 막 화가 난다.
그것도 다시 한 번 생각해 봐라.
자기가 돈 나한테 맡겨 놓은 것도 아니고
내 지금 바쁘게 길 가는데 자꾸 돈 내놔라 그러니까
그것도 내 미워하는 놈, 북한 놈 준다고 그러니까
성질 나겠어? 안 나겠어?
나겠지
“아따, 저 사람 성질 나겠다” 이렇게 이해하면
그 사람 한풀이 좀 들어주면 되잖아.
이렇게 생각하면 그것도 또 넘어갈 수 있고,
이렇게 뭐든지 경험하면서 이렇게 돼.
그러면 이런 원리가 있단 말이야.
그럼 “법률 스님, 너는 다 뇌나?”
나도 안 될 때가 있어.
왜?
나도 깜빡해서 내 성질에 탁 사로잡히면
안 된단 말이에요.
그렇게 해나가시면
인생에 두려울 게 없습니다.
'법륜스님 > 2001년 그 시절'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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