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전에는 ‘일체중생이 다 성불할 수 있다’
이렇게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얼마 전에 보니까
‘누구나 다 성불할 수 없는 거다’라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실제로 성불을 할 수 있는 종자가 있는 건지
거기에 대해서 좀 알고 싶습니다.//
다 성불할 수가 있다.
누구나 다 성불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둘 다 맞아요.
그게 똑같은 말인데
근데 똑같은 말이 아니라 의미가 달라요.
콩을 밭에 심으면 다 싹이 난다.
콩 씨라는 것은 다 싹이 나도록 돼 있어요? 안 돼 있어요?
돼 있지.
그렇다고 콩을 밭에 심는다고 다 싹이 나는 건 아니다.
그게 뭐가 문제에요?
누구나 다 성불할 수 있다는 거는
어떤 콩이든 다 싹이 틀 수가 있어.
그렇다고 모든 콩이 다 싹이 트는 거는 아니야.
불에 떨어지는 거는 싹이 못 트고
공중에 매달린 것도 싹이 못 트고.
(수행이나 노력에 따라서
깨달음을 얻을 수도 있고, 못 얻을 수도 있다고
이렇게 정리해도 되겠습니까?)
깨닫기 싫은 놈은 안 되는 거지.
아무리 깨달을 수 있는 토양에 있어도
깨닫기 싫은 사람은 못 깨닫는 거 아니겠어요?
의미가 전달됐어요?
누구나 다 성불을 할 수가 있다.
누구나 다 성불할 수 있는 건 아니다.
누구나 다 성불할 수 있는 건 아니다는 말은
하기 싫은 놈까지 저절로 되는 건 아니다.
누구나 다 되는 건 아니다.
되겠다는 사람만 되지
안 되겠다는 사람이 어떻게 되겠어요.
그러나 누구나 다 성불할 수는 있다.
그러나 누구나 다 성불할 수 있는 건 또 아니다.
그 말의 의미가 전달이 안 됩니까?
돼요?
한국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서울 갈 수가 있다.
그렇다고 대한민국 사람이 다 서울 오는 건 아니잖아.
누구나 다 서울 가서 살 수 있죠.
근데 다 서울 가서 삽니까? 안 삽니까?
안 살잖아.
그 말의 의미가 전달이 안 됩니까?
누구나 다 성불할 수 있다, 이러니까
사람들은 가만히 있어도 그냥 성불하는 줄
이렇게 생각해.
...
그러면 누구나 다 성불할 수 있는 게 아니라
성불할 수 있는 사람도 있고, 성불할 수 없는 사람도 있다.
종자가 있는 사람도 있고, 없는 사람도 있다
이렇게 말한다면
그건 불법이 아니에요.
누구나 다 성불할 수 있는 종자가 있는데
그렇다고 다 성불하는 거는 아니다, 이 말이에요.
...
깨닫기 싫은 사람이, 자기는 못 깨닫는 건데
그게 뭐 좌절이 돼?
누구나 다 성불 할 수는 있는데
누구나 다 성불 하는 것은 아니다.
이 말이야.
...
누구나 다 서울 가서 살 수는 있는데
모든 사람이 다 서울 가서 사는 건 아니다.
근데 어떤 사람은
누구는 서울 가서 살고
누구는 서울 와서 못 산다고
법으로 정해놨다면
그건 법이 옳지가 않죠.
누구나 다 서울 와서 살 수 있다고
다 서울 와서 살아야 된다 해도
그것도 옳지 않잖아.
그런 거는 얼른 들으면 맞는 것 같지만
그거는 현실에 안 맞는 얘기에요.
누구나 다 서울 와서 살 수가 있어.
그러나 누구나 다 서울 와서 사는 건 아니야.
사는 사람도 있고 안 사는 사람도 있어.
누구나 다 성불할 수 있지만은
성불하는 사람도 있고 못 하는 사람도 있는 거요.
못하는 사람도 있으니까
이렇게 중생이 많지.
누구나 다 성불할 수 있다고 다 성불하는 것 같으면
성불 다 해버리지, 남은 사람 누가 있겠어?
아무도 성불 못 한다면
그럼 어떻게 부처님이 이 세상에 출연했겠어.
다 성불할 수는 있는데
성불하는 사람도 있고, 성불 안 하는 사람도 있는 거예요.
...
일체중생이 불성이 있다.
그게 뭐 그리 중요한 얘기에요?
난 그런 거는 그냥
하느님이 있냐 없냐는 얘기하고 비슷한 얘기 같아.
하느님이 있냐? 하는 없냐?
하느님이 있다, 하느님이 없다
이런 거나
중생이 불성이 있냐? 불성이 없느냐?
있다 없다
이런 논쟁하고 똑같아.
그러니까 개에게 불성이 있냐니까
선사가 없다, 이래 버리지.
그러니까 화두가 됐죠.
그래서 진지하게 탐구를 해봤다는 거예요.
우린 지금 자꾸 이 관념 놀음을 해.
다시 말하면
이 보살님이 전에 자기를 중심으로 해서
뭐든지 자기가 옳고, 자기가 잘났고, 자기가 똑똑하고
이런 관점에서 가지고 있으면
부부간에 갈등이 생기겠어? 안 생기겠어?
생기겠지.
부부간에 갈등이 생기니까 자연히 인생이 한탄스러울 거 아니야.
“어쩌다가 내가 저런 남자를 만났나”
이렇게 생각해 보면 그렇단 말이야.
그게 더 심해지면 이유를 모르니까
그러면 결국
“전생에 내가 무슨 죄를 지어서
저런 인간을 만나가 내가 이렇게 고생을 하나”
이 생각 갖고는 해석이 잘 안 되니까.
그래서 이 세상에서 가장 불행할 뿐만 아니라
그 불행의 뿌리가 전생부터 연결이 돼.
전생부터 연결이 돼서 왔다, 이렇게까지 간단 말이야.
근데 자기의 고집을
‘자기가 옳다’ 하는 걸 놔버렸어.
그래서 남편 말을 마치 스님 법문 듣듯이
“예, 그러죠, 그러네요”
이렇게 하니까
부부 관계가 좋아지나? 나빠지나?
좋아지겠지.
좋아지니까 어떤 생각이 들겠어?
“무슨 복이 있어서 저런 남자 만났을까?” 이런 생각이 들 거 아니야.
그거 잘 모르겠으니까 이제 어디까지 간다?
또 전생까지 가겠지
“전생에 내가 무슨 법을 지어서 저런 남자 만났을까?”
이런 생각이 든단 말이야.
그러니까 현재의 이 부부관계가 좋고 나쁨도
내가 옳다 할 것이 본래 없는데
그걸 있는 줄 착각하니까 고가 생겼고
그걸 진실로
없는 걸 없는 줄 알아서
나를 고집할 게 없는 줄 알아서
놔버리니까 관계가 좋아졌단 말이에요.
/현재가 좋아지니까
과거 인연까지도 다 어떻게 보인다?
좋게 되잖아./
이 좋아진 인연을 따져보니
좋은 인연을 지어서 좋은 과거가 왔다고 보여지잖아.
근데 현재가 나쁘니까
나쁜 인연을 지어서 나쁜 과거가 왔다고 되잖아.
그러니까 이 해탈은
삼생이 다 해탈되는 거예요.
그건 뭐예요?
누구나 다 그렇게 될 수 있다, 이거야.
그럼 이 사람만 되고 저 사람은 안 된다.
그게 아니고, 누구나 다 자기를 놓아버리면 다 좋아진다.
그럼 동의하시죠?
그걸 이름하여 다 부처가 될 수 있다 이 말이에요.
근데 그게 또 잘못 왜곡돼서
부처라는 종자가 구슬 같은 게
이 안에 가슴속에 박혀 있냐? 안 박혀 있냐?
이런 식으로 가면
그거는 아설이 된단 말이에요.
종자설이 된다 이 말이야.
그건 불법이 아니잖아.
그건 우파니샤드 철학서의 범아일여설이지.
불법은 무슨 소리다?
무아설이잖아.
종자가 있냐? 없냐? 하면
벌써 불법이 아니란 말이에요.
...
그렇게 말해도 되지만
여기서 누구나 다 부처가 될 수 있다는 거는
부처라고 하는 어떤 씨앗이 있다.
이런 뜻으로 와전이 된 건데,
누구나 부처가 될 수 있다는 건
자기의 어리석음을 깨우치면 다 좋아지는 거는
이건 다 체험해 봐야 되는가? 안 되는가?
다 되지.
완전히 이거는 다생겁래로 악연으로 만났다 하는 사람들도
한 생각 바꿔지면 천생연분이다
이렇게 돼버린다니까.
근데 뭘 보러 다녀, 사주는 뭐 하러 보러 다녀
지가 지금 잘못 알고 있으니까
사주가 나쁘게 나오지
자기가 잘하면 사주도 좋아지고
자기가 나쁘게 하면 사주도 나쁜 거지.
나 같은 성격에 중 되어서 살기에는 괜찮아.
여러분들도 다 법륜 스님같으면 중으로서는 뭐 특별히 하자가 많이 있나?
근데 내가 내 성격대로 만약에 결혼해서 산다면
여자가 아마 못 살 거예요.
그러면 업이 나쁜 게 되잖아.
이렇게 사니까 업이 나쁜 게 되는데
“스님은 전생부터 수행자였나?” 뭐 이런 생각하잖아.
자기가 어떻게 현재 자기가 하느냐?
거기 달린 거란 말이야.
그러니까 같이 살려면 자기를 숙여야 돼.
혼자 살려면 숙일 게 있나? 없나?
없어.
여자가 없고 남자가 없는데 숙일 게 뭐가 있어?
여자가 아주 똑똑하고 딱 부러지는데
남자도 똑똑도 딱 부러지는 남자를 좋아할 거 아니야, 그런 여자는
흐리멍텅한 남자 좋아하겠어? 안 하겠어?
안 하겠지.
그럼 둘이 칼 갖고, 칼 싸움 하겠어? 안 하겠어?
하지.
그건 악연이 되지.
딱 부러지는 여자가 예를 들어서 혼자 산다.
그래서 절에 들어와 우리 정토회나 이런 데 사회 활동을
혼자서 여자가 똑 부러지게 한다.
그럼 그 여자 똑똑해? 안 똑똑하겠어?
똑똑하겠지.
아무 하자가 없어.
근데 그런 여자가 만약에 결혼해서 고대로 살면
완전히 그건 못 살아.
지만 못 사는 게 아니라
남편 제명대로 못 살게 하고 죽이는 거야.
그러니 같이 살려면 누구나 다 뭐다?
남자든 여자든 뭐 해야 된다,
맞춰야 돼, 상대하고
내가 식사를 나 혼자 먹으면
내가 짜게 먹든, 싱겁게 먹든 상관없는데
한 밥그릇을 놔놓고 같이 퍼먹으려면
상대하고 식성을 맞춰야 되나? 안 맞춰야 되나?
맞춰야 돼.
그게 세상 아니야.
근데 “전에는 나보고 다 똑똑하다 그러고
다른 사람도 다 나 보고 좋다고 그러는데 왜 당신만 그래?”
이런 얘기는 안 맞아.
그런 여자들이 천지일 거야.
“밖에 가면 나보고 똑똑똑하고 좋다고 그랬는데
처녀 때는 잘 나갔는데
왜 시집 와서 내가 이렇게 기가 꺾이고 이게 살아야 되나?”
마치 모든 죄가 다 남자한테 있고
여자 이해 못하는 남자한테 문제가 있는 것처럼
이렇게 생각하면 안 돼.
다 거기에, 거기에, 거기에, 거기에 따른 인연을 맞춰야 된다.
내가 만약에 무인도에서 혼자 산다면
옷 입을 필요 있어요? 없어요?
매일 거꾸로 물구나무서서 다녀도 누가 뭐라 그러는 사람 있어요? 없어요?
없잖아.
거기는 옳고 그른 게 있겠어? 없겠어?
없어.
벌거벗고 다니든, 거꾸로 누워 있든, 나무 위에 가 자든, 바위 위에가 자든
아무 거기에는 옳은 것도 그런 것도 없어.
옳은 것도 없고 그런 것도 없으니까
여기 와서 그렇게 하면.
그럼 그게 도인이냐?
아니다 이 말이에요.
목욕탕 가면 옷 벗고, 밖에 나가면 옷 입고
법문 들어올 때는 앉고, 밤에 잘 때 눕고
그 인연을 따라서
거기에는 옳은 것도 있고 그런 것도 있다.
아시겠어요?
인연을 따라서 옳은 게 그런 게 있다 해서
그럼 꼭 그래야 된다 하는
그런 또 무슨 옳은 게 있나? 없나?
없어.
다리가 아프면 이런 법문 들을 때도
벽에 기대고 들어올 수도 있는 거고
누워서도 수도 있는 거야.
그런 이치를 깨치면
누구나 다 괴로움 없이 행복하게 살 수 있고
그런 걸 모르면 괴롭게 사는 거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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