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기 전에 한이라도 풀고 싶습니다.
10년 전에 남편이 바람을 피워서 헤어졌습니다.
사과하여도 받아들일 수가 없었습니다.
제가 가진 재산은 시숙이 다 팔아먹었습니다.
현재 저는 위암 말기 환자입니다.
자식들에게 없어진 재산에 대한 얘기를 해주어도
지난 일이니 잊으라며 협조해 주지 않습니다.
그래서 더욱 억울하고 없어진 재산도 너무 아깝습니다.
스님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이분은 결국 [남편]을 잃고
두 번째는 [재산]을 잃고
세 번째는 [건강]을 잃고
이렇게 돼 있는 상태인데
왜 이렇게 됐을까?
부처님 말씀에 이런 얘기가 있습니다.
“비구들이여 제1의 화살을 맞을지언정
[제2의 화살]은 맞지 말라” 이런 말이 있어요.
내가 어리석어서 한 번의 화살은 맞을지언정
두 번, 세 번 화살은 맞지 않다.
남편을 잃을지언정 재산은 잃지 않던지
재산은 잃어버렸다 하더라도 남편을 잃지 않던지
재산과 남편을 잃었다 하더라도
건강은 더 이상 잃지 않던지.
남편 잃고, 재산을 잃고, 건강을 잃었는데
지금 또 무엇을 잃을 것인가?
예를 들어
지금이라도 지혜롭다면 아직도 하나 있는 무엇인가를 잃지 않을 것이다.
남편을 잃었을 때는
세상을 다 이름 같고 더 이상 잃을 게 없을 것 같지만
재산을 잃었을 때는
다 잃어버리고 더 이상 잃을 게 없을 것 같지만
그러나 그때는 건강이라도 있었다.
건강을 잃고 보니
그때라도 지혜로웠다면
이것이라도 내가 지킬 수 있지 않았을까.
만약에 이분이 처음에 현명하셨더라면
남편이 바람을 피우지 않게 할 수도 있다.
남편이 바람을 피우지 않게 하는 것은
남편의 요구가 뭔지를 잘 알아 살펴야 한다.
바람을 피웠다 할 때는
나름대로의 뭔가 부족함이 있기 때문에 그렇다.
그것이 어떤 성격의 부족함인지는
사실은 우리로서는 알 수가 없다 이거야.
그러나 같이 살면 조금만 관심을 가지면 알 수가 있다.
성적인 불만인지
그렇지 않으면 어릴 때 어떤 사랑의 결핍인지
부모에 대한 사랑의 결핍인지
무엇인가 부족함이 있기 때문에 방황을 했을 거다.
그것을 잘 살폈더라면
미연에 방지 할 수가 있다.
두 번째 미처 그것을 살피지 못했다.
그래서 바람을 피웠다.
이렇게 바람을 피웠을 때
내 옳다는 생각에만 사로잡혀 있었기 때문에
좋은 기회를 오히려 놓쳐버렸다.
그때 “나는 잘한다고 했는데 무엇인가가 부족했구나.
그것이 무엇이었을까?”
이렇게 자신을 깨달을 수 있는 어떤 기회를 가질 수 있었을 거다.
그때 내가 남편이 ‘자기가 정말 잘못했다’라고 할 지경에 있고
나는 정말 큰소리 칠 그럴 지경에 있었을 때
오히려 내가 엎드려 저를 하면서
“여보 미안해요.
내가 이게 참 나름대로 노력은 했는데
이게 당신을 만족 못시켜서 미안합니다.”
이렇게 했더라면
이 문제는 한 번의 화살로써 끝이 났을 거다.
그런데 내 잘했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기 때문에
용서를 할 수 없었다.
그래서 끝까지 결국은 미워함으로 해서 누가 괴로워졌느냐?
내가 괴로워졌다.
결국은 나와 함께 산 내 남편을 내가 평생 미워해야 되고
그것도 자식이 없으면 덜한데
자식이 있으니까 자기 자식의 아버지를 미워해야 하고
그 속에서 아이들은
엄마 아빠의 갈등 속에서 방황해 하고
이래서 제1의 화살을 맞는 것에서 끝난 게 아니라
제2의 화살을 만들었다.
이미 재산은 어떤 이유에든 팔아치워져 버렸다.
이것이 제1의 화살이다.
그런데 그것을 아까워해서 속상해하기 때문에...
결국은 제2의 화살인 건강을 해치는 화살을 받게 됐다.
돈을 찾을 수 있다면
다만 찾기 위해서 애쓰지, 속상해할 필요는 없다.
이미 찾을 수 없는 재산이 있을 때는
아무리 애를 써도 찾을 수 없기 때문에
찾을 수 없는데 노력 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이미 그것은 사라져 버린 것이다.
그런데 거기에다가 노력하는 것은
마치 꿈속에서 뱀에게 쫓기는 것과 같고
신기루를 주는 것과 같고
허공에 헛꽃을 잡게 해주는 것과 같다.
그래서 결국은 자기의 건강을 해쳐버렸다.
이제 죽음이 눈앞에 가까이 오는 경지에 이르렀다.
여기에서 계속 집착을 하게 되면
그나마 현재 있는 미움도 더욱더 단초를 하게 된다.
내 아내가 사랑을 다든지
내 재산을 누가 또 뺏어갔다든지
이렇게 생각하기 때문에
이분이 겪는 것과 같은 어때요?
그런 한을 맺게 되고
그 한이 또 갚음이 있을 때 나에게 돌아온다면
나는 지금 겪었던 인생의 고통보다도
훨씬 더한 고통으로 얻어 또 겪게 됩니다.
원수를 갚고 원수를 갚고 하는 것이
과연 현명한 삶이냐?
그래서 부처님께서
“원망을 원망으로 갚지 마라” 이렇게 말하는 거예요.
내가 앞으로 이 사람들에게 할 그 행위를 생각한다면
그 사람들이 나에게 한 행위도 예외가 될 것이다.
이러한 과보가 내가 바라는 바가 아니라면
이제 내가 다시는 이런 인연은 짓지 말아야 한다.
그런데 이 질문하신 분은
이런 과보를 받기가 너무나 억울해.
지은 인연을 모르기에 이 과보를 받아들일 수가 없고
동시에 이런 과보를 너무나 억울하게 생각하면서 거부하면서도
또 이런 과보가 자처 될 인연을 또 짓고 있어.
그러니 이것은 정말로 어리석다.
그러니 지금이라도
자신의 어리석음을 뉘우치는 게 중요하다.
“결국 이렇게 해서 내가 내 자신을 헤쳤구나.
내 젊은 한 평생을
결국 그 제1의 화살을 맞았어.
결국은 거기에 원결을 일으킴으로 해서
결국은 모든 나머지 화를 연속적으로 자처했구나.”
이렇게 해서
이 어리석음에서 벗어나는 게 중요하다.
근데 여기서 또 공부가 한 건 잘못되면
“왜 내가 이렇게 바보같이 살았느냐?
나 같은 놈은 죽어야 돼.”
이렇게 다시 또 자기를 학대하는 쪽으로 가면 안 된다.
다만 “내가 어리석었구나.
부처님 말씀 듣고 보니 내가 다 같았구나.”
이걸로 끝나야 돼.
다미니가 브라만의 얘기를 듣고
“아무리 죄를 많이 지어도
강가강에 가서 목욕을 하면 죄가 다 사라지고 천상에 태어난다”
하는 그 얘기를 듣고 야 그거 참 쉽다.
근데 왜 우리 부처님은 그런 얘기를 나한테 안 해줬을까?
그래서 부처님께 가서
“그 말이 맞습니까?”
하고 물었을 때
부처님께서
“그 말이 맞다면 갠지스강에 사는 물고기가 가장 먼저 천상에 태어나겠구나” 할 때
“내가 어리석었구나.
부처님 그렇습니다. 알겠습니다.”
이러고 다 끝났다 이거야.
근데 오늘 우리는 딱 듣고
“아, 이게 내 바보 같은 짓이었구나.
결국 내가 내 화를 계속 자처하고 있구나”
이렇게 딱 끝이 나야 된다.
그래서 서로 빚지고 빚 갚고 하는 이러한 행위의 반복을
여기서 멈춰야 한다.
남편에 대한 미움을, 원망을, 여기서 멈춤으로 해서
시숙에 대한 억울함을 여기서 멈춤으로 해서
그 멈춘다는 것은 참고 견디는 것이 아니라
시숙에 대해서는
“이것으로 빚을 갚으면 얼마나 좋을까?”
남편에 대해서는
“내 부족함을 참여함으로 해서 여기서 끝내야 된다.”
그랬을 때 비록 오늘 죽더라도
“나는 인연의 과보, 이 윤회의 바퀴에서 벗어날 수가 있다.
재물이라고 하는 적은 이
남편이라고 하는 그 수많은 인연 중에
한 생애 잠시 정한 그 인연으로 인해서 해탈을 한다면
이것은 참으로 작은 이익을 잃고
큰 이익을 얻는 것과 같다.”
그런데 이 작은 이익에 집착하는 것은
마치 물고기가 낚싯밥을 무는 것과 같고
쥐가 죄악을 먹으려는 것과 같다.
결국은 그 작은 먹거리로 인해서
그 잠시의 배고픔으로 인해서
자신의 생명도 받쳐버리는 그런 어리석은 행을 하는 것과 같이
여기서 지속이 된다.
인생이 이것으로 끝나는 게 아니다.
인생의 삶은 찰나에 불과하고
우리가 살아야 할 삶은
앞으로도 그보다 수억만 배로 더 진행되는 과정에
매일 찰나에 집착을 해서
그 나머지 생마저도 버리려고 하느냐.
남편이 그 한 행위에 집착해서 인생을 괴롭게 보내듯이
그 재물에 집착해서
결국은 한 평생을 한으로 보내듯이
결국은 남아 있는 자기의 수명마저도 지키지 못하고
병든 몸으로 생을 마감하듯이
그것이 어리석은 것처럼
또한 이 순간에도 이 한을 갖고 가게 되면
사막도에서 벗어날 수가 없게 된다.
살아온 삶의 어리석음을 돌이켜 깨우치면
앞으로 행복하게 살 수가 있다.
그러니까 병든 몸도 한탄할 것이 못된다.
지금 이 부처님의 말씀을 듣고
뉘우쳐 깨우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그렇게 될 때
이미 마음속에 상처를 입은 아이들의 상처를
치유할 수 있다.
나에게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얘들아, 엄마가 지난 몇십 년 동안 생각을 좀 잘못했네.
지금 내가 돌이켜 보니
너희 아빠가 잘못했다고 말할 수가 없다.
내가 참 부족한 게 많았다”
이렇게 해줌으로 해서
그들 가슴속에 맺혀 있던 아빠에 대한 원망을 풀어줄 수가 있다.
일가친척들에 대한 서먹서먹한 한을 풀어줌으로 해서
그 아이가 큰아버지, 작은아버지, 일가친척들을 자유롭게 만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 준다.
엄마가 이렇게 한을 맺고 죽게 되면
그들은 일가친척의 모임에서도
그 사람이 나타나면 가지도 않으려 하고, 가도 괴롭다.
이렇게 해서
내 사랑하는 아이들의 삶을 제한하고 속박한다.
나로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아이들의 삶마저 속박한다.
그 아이들이 자라서 그 가슴 속에 맺힌 한은
또 손자들에게 넘겨주게 된다.
이렇게 할 때
속에 맺힌 것이 사라질 때 오히려 건강은 나아지게 된다.
설령 육신에 집착하지 않는다면
이렇게 풀면
내일 죽어도 아무런 한이 없어지게 된다.
그럴 때 어쩌면 병은 기적같이 나을 수도 있다.
그러니 그렇게 기도를 하셔야 합니다.
'법륜스님 > 2001년 그 시절'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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