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륜스님/2001년 그 시절

[2010년 그 시절 젊은 법륜스님의 즉문즉설] 죽음에 대한 동경을 갖고 있습니다

Buddhastudy 2024. 9. 24. 19:55

 

 

 

현생에서 죽음을 맞게 된다면

다른 생이 시작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또 죽음 그 자체로 완벽한 평온을

의미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죽음에 대한 동경을 가지고

인생을 어떻게 바르게 살아갈 수 있을까요?//

 

 

저는 죽음에 대한 동경을 갖고 있습니다.

삶에는 기쁨, 행복도 있지만 슬픔과 분노도 있습니다.

삶은 고락의 연속입니다. 저는 불교의 교리를 존중합니다.

하지만 전생이라든가 내생이라든가 하는 것은 믿지 않습니다.

단지 현생만 있다고 믿습니다.

이 현생에서 죽음을 맞게 된다면 또 다른 생이 시작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죽으면 그것으로 끝이지

다른 세상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윤회라는 것은 현생에서 고락의 연속으로만 나타난다고 생각합니다.

전생, 현생, 내생으로 이어지는 윤회는 믿지 않습니다.

삶에서는 행복이라든가 고통이라든가 수많은 감정을 마음에 담아서 혼란스러운 반면,

죽음에서는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아무런 감정을 느낄 수 없기 때문에

죽음 그 자체로 완벽한 평온을 의미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점에서 삶보다 죽음이 더 좋은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때로 죽음이 저에게 빨리 오지 않는 것 같은 생각도 합니다.

이런 죽음에 대한 동경을 가지고 일생을 어떻게 바르게 살아갈 수 있을까요?

스님의 현명한 말씀 듣고 싶습니다.//

 

 

세상에는 두 가지 극단이 있다.

이걸 우리가 양극단이라 그러죠.

 

수행에서 말한다면

한 극단은 우리들의 욕구를 항상 쫓아가는 것.

욕구가 생기면 그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서 그것을 쫓아가는

이것을 우리가 쾌락주의다 그러고

근데 욕구를 쫓아가 보면

욕구가 만족되더라도 또 욕구가 더 커지고

또 만족되더라도 또 욕구가 더 커지고

그래서 이 욕구라고 하는 것은 채워질 수 없다.

밑빠진 독과 같다.

그래서 욕구를 오히려 억제하는 것이 행복으로 가는 길이다.

그래서 이 욕구를 무조건 억제하는 쪽으로 가는 것을

우리가 고행주의다, 이렇게 말하죠.

 

그래서 부처님께서 젊은 시절에는 쾌락주의로 살았고

출가해서는 고행주의로 살았습니다.

그러나 부처님께서는 6년 고행 끝에

고행으로도 해탈이 얻어지지 않자 반성을 했다.

그렇게 해서 돌아보니까

욕구를 따라가는 것만 욕구에 매여 있는 게 아니고

욕구를 억압하는 것도 욕구에 매여 있다.

욕구에 대한 하나의 반작용이었다.

두 길은 정반대지만 뿌리는 하나였다, 이런 얘기예요.

 

그래서 그는 욕구로부터 자유로워지는

 

즉 따라가지도 않고 억압하지도 않는

우리 말로 하면

뭐가 하고 싶으면 하든지, 참든지, 두 길이 있는데

하는 것도 아니고 참는 것도 아닌 제3의 길.

이걸 뭐라고 합니까?

중도다 이렇게 말해요.

 

그래서 그 제3의 길을 발견하시고

그 중도로서 새로운 수행을 하셔서

마침내 깨달음을 얻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 초전 법륜, 처음 설법을 하실 때

바로 맨 첫 번째 하신 말씀이 [중도]다 이거예요.

-수행자는 양극단을 떠나라.

-중도의 길을 가라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러면 담배를 피우고 싶은 사람이 피우는 것은 쾌락을 쫓는 거고

이를 악다물고 참는 것은 고행주의를 쫓는 건데

그러면 쾌락도 아니고 고행도 아닌 제3의 길은 도대체 어떻게 하는 건가

피우든지 안 피우든지 두 길밖에 없지 않느냐

하든지 안 하든지 두 길이 있지 제3의 길이 무엇인가?

우리로서는 이해하기가 어렵다.

그 제3의 길이라는 게 바로 알아차리기.

 

담배를 피우고 싶은 마음이 일어날 때

담배를 피우고 싶어 하구나하고 알아차린다.

피우는 쪽으로 가지도 않고

피우지 않겠다고 결심도 안 하고

다만 피우고 싶어 하는구나 하고

찰나찰나 찰나찰나 알아차릴 뿐이다.

 

그러면 그것은 일정한 시간이 지나면 사라지게 된다.

또 일어나면 알아차린다.

다만 알아차릴 뿐이다.

 

그러면 이렇게 계속해 나가면 바깥으로 드러난 형태는 어떻다?

결과적으로 안 피우겠다 하는 사람과 똑같이 피우지 않는데

내면의 세계는 어떠냐?

안 피우겠다 하는 사람은

안 피우겠다 하는 의지로 참게 되는데

이 사람은 참는 것이 없다.

그러니까 긴장이 없습니다.

 

참는다는 것은 긴장이 되지 않습니까?

긴장이 되면 스트레스를 받죠.

그러니까 이건 스트레스를 받지 않는다.

다만 알아차릴 뿐이다.

 

그러면 마음이라는 것은

일어났다가 한동안 머무르다가 사라지고

일어났다가 머무르다가 사라진다.

 

담배를 피우지 않아도

담배 피우고 싶은 욕구가 하루고 이틀이고 3일이고

영원히 지속되지 않는다.

어떤 것도 일어난 것은

잠시 머무르다가 사라지고 또 새로 일어난다.

사라지면 영원히 일어나는 게 아니라

또 새로 일어나고 머무르다가 사라질 뿐이다.

 

그런 것을 관찰하면서

생겨난 것은 다 사라지는구나.

영원한 것은 없구나.

, 제행은 무상이구나

이렇게 법칙을 알아나갈 뿐이다.

 

그러니까 깨닫겠다고 긴장하고 악을 쓰는 것은

그것은 중도의 수행이 아니다.

 

돈을 벌어야 되겠다라고 생각하고 세상을 살다가

10년을 살았는데 돈을 못 벌게 되면

후회가 되죠.

내 인생은 실패다이렇게.

 

출세를 해야 되겠다해서 1020년을 정치를 했는데

시장도 못 해보고, 군수도 못 해보고, 국회의원도 못 해보고, 시의원도 한번 못 해봤다.

이러면 어때요?

인생의 실패가 되겠죠.

 

깨달음을 얻어야 되겠다하고

각오하고 결심하고 10, 20년을 공부했는데

깨달음을 못 얻으면

또 내 수행이 실패구나이래 되겠죠.

 

그럼 이건 3개가 똑같습니다.

-돈을 벌어야 되겠다.

-깨달음을 얻어야 되겠다.

이게 차이가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것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괴롭다 하는 현상도 똑같다.

 

그래서 돈과 돌은

ㄴ자가 하나 더 붙었다, 덜 붙었다 차이밖에 없다.

이거는 도를 얻는 행위가 아니다.

이것은 욕구를 따르는 행위다.

다만 그 욕구의 대상이 돈에서 도로 바뀌었을 뿐이다.

이것은 중도의 수행이 아니다.

 

이거는 도 얻는 것을 돈 구하듯이 욕심으로 한다

욕구를 따라서 도를 구하기 때문에

이것은 마음의 평화를 얻는 길로 가지 못한다.

이건 길이 잘못됐기 때문에.

그 길로는 아무리 가도 정상에 이르지 못한다.

 

이것은 잘못된 수행이다.

여러분들이 절에 와서 앞에서도 얘기했지만

기도를 할 때도

그 기도가 물고기가 낚싯밥을 무는 것처럼

삶을 구했는데 죽음을 자초하는 것 같이

복을 구했는데 결과는 재앙이 온다.

 

왜 그럴까? 죄가 많아서 그럴까?

그렇지가 않다.

몰라서 그렇다.

 

쥐가 죄악을 먹은 거는

전생에 죄를 많이 지어서 쥐약을 먹었나?

하나님이 벌을 줘서 쥐약을 먹었나?

쥐의 사주팔자가 나빠서 쥐약을 먹었나?

그렇지 않다.

쥐약인 줄 몰라서 쥐약을 먹은 것처럼

 

오늘 우리 인생이 고달픈 것은

부부관계 갈등이 있고, 애가 말을 안 듣고, 사업에 실패하고

그래서 내가 괴롭다 한다면

그것은 궁합도 아니고, 사주도 아니고, 전생 탓도 아니고, 하느님 벌도 아니고

무지, 알지 못함

무지로부터의 모든 괴로움이 생겨난다 이런 얘기예요.

그래서 그 무지로부터 벗어나야 된다.

그걸 깨달음이다 이렇게 말해요.

 

근데 여러분은 깨달음을

무슨 큰돈을 막 그 복권 당첨해서

막 큰돈을 노력 안 하고 한꺼번에 확 벌어버리듯이

수행을 해서 깨달음을 어느 순간에 확 터져서

복권 터지듯이, 풍선 터지듯이 팍 터져서

깨달음을 왕창 얻어버리는

이런 생각을 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절에서 깨달음을 얻는다고 수행하면서

복권 당첨되는 그 심정으로

그렇게 아무리 해도 애를 써도 안 이루어지니까

나중에 자포자기해서

도 닦다가 뜻대로 안 되니까 막 울든지

안 그러면 반작용으로 나가서 막 술을 먹든지

그냥 이것도 안 되니까 이거나 하자

이런 식의 반발 심리로 하든지.

 

이런 건 다 뭐냐?

공부라는 것은

지금 마음 내는 이 순간부터 공부인데

허황된 생각을 갖고 공부를 하고 있다, 이런 얘기에요.

그래서 그것은 길이 잘못됐다.

 

 

그런 것처럼

지금 질문하신 분도 한쪽으로 편향이 됐습니다.

극단에 치우쳤다. 이런 이야기에요.

지금 사고가 극단으로 치우쳤습니다.

 

어떻게 치우쳤느냐?

보통 사람들은 산다는 것에 집착합니다.

죽음을 두려워하고 삶에 애착을 너무 많이 느끼게 된다.

죽으면 안 된다이런 생각을 하게 되는 거예요.

죽음을 두려워한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이생을 영원히 살고 싶어 한다.

그래서 진시왕처럼 불로장수약을 구하고, 이렇게 한다.

 

그런데 세상의 원리를 잘 봐라.

세상의 원리라는 것은 생겨난 것은 사라지는 거다.

생겨난 것 중에 사라지지 않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저 태양은 생겨난 것 중에 사라지지 않지 않습니까?

저 바위는 사라지지 않지 않습니까?

저것은 영원하지 않습니까?

 

옛날에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것은 우리 인생은 짧고

저 바위의 인생은 길기 때문이다.

짧은 눈으로 보니까 저것이 영원해 보인다.

이런 얘기야.

 

그러니까 하루살이는

아침 해 뜬 뒤에 태어나서 해지기 전에 죽는다.

하루살이는 하루밖에 못 본다.

그러니까 또 내일이 있는 줄 알 수가 없다.

적어도 내일이 있는 줄 알면 며칠을 살아봐야 내일이 있는 줄은 알겠죠?

오늘이 가면 내일이 있다.

이걸 알지만

하루밖에 못 사는 생명은

내일 있는 줄은 알지 못한다.

 

봄에 나서 가을에 죽는 생물은 1년밖에 없는 줄 알아.

겨울이 되면 그것이 종말인 줄 알아.

그러나 몇 년을 살아보면 이듬해 봄이 또다시 온다 이거야.

 

단견이라 그래.

좁은 견해를 가지면

이것밖에 없다이런 생각을 하게 된다.

 

그래서 이 삶의 연속성을 모른다 이런 얘기예요.

그런데 이렇게 생한 것은 멸하게 되고

생멸이 거듭되는 게 이 세상인데

한 번 생한 것이 영원하기를 바라는 것은

그것은 법칙에 맞지 않다.

 

지구상에 있는 모든 물체는

지구 중력을 받기 때문에

무게가 있는 것은 떨어지는 성질이 있다.

그런데 어떤 물체가 위로 떠오르기를 바란다면

그것은 어리석은 생각이다.

떠오르게 하려면 어떤 힘을 가해야 된다.

힘을 가한다 하더라도 그것은 일시적으로만 가능하지

결국은 다시 떨어지게 된다.

 

그것처럼 생겨난 것은 사라지게 되고

다만 그것이 머무르는 시간이

어떤 것은 찰나도 있고, 어떤 것은 한 시각도 있고

어떤 것은 한 달도 있고, 어떤 것은 천년도 있고

어떤 것은 만년도 있고, 어떤 것은 1억 년도 있고

이럴 뿐이지 그것이 영원한 것은 없다.

 

짧은 시간밖에 보지 못하는 사람은

긴 시간의 변화는 알아차릴 수가 없기 때문에

생각이 영원하다, 이런 잘못된 인식이 생기는 거지

실재가 영원한 것은 아니다.

 

저 바위는 천년이나 지금이나 다름없는 것 같지만

그러나 억년을 두고 보면

바위는 깨져서 돌이 되고, 돌은 깨져서 자갈이 되고

자갈은 깨져서 모래가 되고, 모래는 깨져서 흙이 되고

그것이 다시 굳으면 또 암석이 되고, 또 바위가 되고

이렇게 변해가고 있다.

 

그러니까 이런 법칙을 알면

바위 따로 만들고, 자갈 따로 만들고, 돌 따로 만들고

모래 따로 만들고 흙 따로 만들고

이렇게 누가 열심히 안 만들어도 된다.

그것은 이 우주의 법칙이다.

 

저 태양이 저렇게 영원히 있는 것 같지만

저건 수명이 한 60억 년 정도 된다.

우주에 보이지 않는 작은 미세한 성간물질들이 모여서

별을 형성하고, 그 별은 일정하게 유지되다가

저것도 언젠가는 다시 붕괴되고 사라진다.

 

이 세상의 물질로 이루어진 것은 그 어떤 것도

이루어지고, 머무르고, 흩어져서 사라지는 것을 벗어나는 것은 없다.

이거를 성주괴공이다, 이렇게 말해요.

 

그다음에 생명은 다 그렇다.

생명은 어떠냐?

태어나고, 늙고, 병들어 죽는다.

그것은 작은 미물도 그렇고, 인간도 그렇고, 나쁜 놈도 그렇고, 선한 사람도 그렇고, 범부도 그렇고, 성인도 그렇다.

 

생명이 태어나고 늙고 병들어 죽는 것을

벗어나는 존재는 없다.

그래서 이걸 뭐라고 한다?

생로병사다.

 

우리들의 정신 작용은 어떠냐?

이 정신 작용

너하고 나하고 이 사랑하는 마음을 변치 말고 영원히 맹세하자.”

이것도 다 헛소리예요.

좋아서 어쩔 줄 몰라서 입을 맞추다가 입술이 상대에게 깨물리면

성질이 팍 내는 게 마음이다.

그러니까 너무 좋았던 마음이

순식간에 미운 마음으로, 찰나 순간에 변하는 게 마음이다.

 

그래서 옛날에 선사들 중에 이런 얘기가 있죠.

어떤 높은 관리가 스님한테 찾아와서

스님, 천당이 있습니까?” 이래

천당과 지옥이 있느냐 이거야.

 

그래서 스님께서 그 사람 이름을 딱 부르면서

당신은 참 충신이고, 훌륭하고, 인격도 고매하시고..”

이렇게 착 칭찬해 줬단 말이야.

그러니까 입이 떡 벌어져서 기분을 좋아하고 있으니까

이것이 천당이요.”

 

그런데 그런 줄 알았는데

내가 알고 봤더니 당신은

완전히 사기꾼이고, 이중 인격자고, 나쁜 놈이다 이러니까

막 성질이나서 칼을 빼들고 덤비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것이 지옥이다이랬단 말이에요.

 

그러니까 인간의 마음이라는 게

요래 묘사해서

찰나의 천상 갔다가 찰나의 지옥 갔다가

찰나의 성인 됐다가 찰나의 악인이 됐다가

이런 게 인간이에요.

 

그렇기 때문에 마음은 뭐다?

무상한 것이다

이걸 마음은 생주이멸한다, 이렇게 말해요.

 

그러니까 이런 법칙을 확연히 깨닫고 있으면

저 별이 사라진다 해도 슬퍼하지 않고

새로운 별이 생겼다 하더라도 기뻐 날뛰지 않게 된다.

태어난다 해도 기쁜 날뛰지 않고

죽는다 해도 슬퍼 울부짖지 않는다.

 

이런 것을 잘 알면

누가 칭찬을 한다 해도 기뻐 날뛰지 않고

비난한다 해도 화내고 괴로워하지 않게 된다.

 

마음이라는 건 늘

경계에 따라 변하는 거다라고 알고 있으면

자기가 세운 마음을 유지시켜 낼 수가 오히려 있다.

 

 

그런데 우리가 이런 것에 무지해서

이 생을 늙지 않으려 하고, 병들지 않으려 하고

죽지 않으려고 하고, 발버둥 치고 하면

결국은 늙을 수밖에 없고, 병들 수밖에 없고, 죽을 수밖에 없는 인생에서

결국은 고통을 느낄 수밖에 없다.

 

늙는 것이 괴로운 게 아니라

늙지 않으려고 하는데 늙으니까 괴롭다.

 

병들기 때문에 괴로운 것이 아니라

병 안 들려고 하는데 병드니까 괴롭다.

 

그 사람하고 헤어지기 때문에 괴로운 게 아니라

사랑해서 함께 있고 싶어 하는데

헤어지기 때문에 괴로운 거예요.

 

그 사람을 미워해서

제발 좀 꼴을 안 보고 싶다할 때는

헤어지면 괴롭습니까? 기쁩니까?

기쁘죠.

 

그러니까 헤어지는 게 괴로움을 주는 것도 아니고

만나는 게 괴로움을 주는 것도 아니다.

좋아하고 사랑하면 헤어지는 게 괴로움이 되고

미워하고 싫어하면 만나는 게 괴로움이 된다.

 

이 세상은 다만 인연을 따라 만나기도 하고 헤어지는데

거기에 내가 어떤 마음을 내느냐에 따라서

그것이 괴로움이 되기도 하고

괴로움이 안 되기도 하는 거다.

 

그런데 우리가 이런 법칙을 알지 못하게 되면

때로는 생에 치우치고, 때로는 멸에 치우친다.

그런데 대부분은 다 이 생에 집착을 해서 괴로움을 만드는데

지금 이 질문자는

쾌락주의에서 어느 쪽으로 간 것처럼?

고행주의로 간 것처럼

이제 또 생의 예찬자가 아니고 무슨 예찬자가 됐다?

사의 예찬자가 됐다.

이것은 치우친 생각이다.

극단으로 생각이 치우쳐졌다.

 

살아있을 때 삶을 만끽하고

죽으면 죽음을 만끽해야 되는데

살아있을 때 삶을 싫어하고 죽음을 동경한다.

 

세상 사람들이

살아있을 때는 삶을 오히려 싫어하고 죽음을 동경하다가

죽을 때가 되면 또 거꾸로 어떻게 한다?

삶을 동경하고 또 죽음을 싫어한다.

 

그래서 옛날 도인이 뭐라 그랬냐?

도라는 건 어려운 게 아니다.

밥 먹을 때 밥 먹고, 똥 눌 때 똥 누는 거다.

배고프면 밥 먹고

싸고 싶으면 똥 누면 되는데

그거 누가 못하느냐?” 하는데

중생은 거꾸로 한다.

밥 먹을 때는 똥 생각하고

똥누면서는 밥 생각한다.

 

여러분들은 집에 있을 때는 산을 그리워하고

산에 가면 집을 그리워하고

다른 사람하고 같이 있으면 귀찮고, 헤어지고 싶고

혼자 있으면 외롭고, 만나고 싶고

늘 이렇게 해서 이래도 괴롭고 저래도 괴롭다.

 

혼자 있으면 혼자서 있어서 좋고 외롭지 않고,

둘이 있으면 귀찮지 않고

이게 도다.

 

그러니까 살아있는 삶의 현실에 만족하지 못하고

결국은 죽음을 동경한다.

이것은 극단에 치우친 생각이다.

살아있는 삶에 괴로움이 없는 것이 해탈이지

살아있는 삶을 없애버린 뒤에

괴로움이 없는 세계를 추구하는 것은

그것은 망상에 불과하다.

 

죽음을 동경하는 것도

삶이 있기 때문에 죽음이라는 동경을 하고

죽음면 아무것도 없다

그 생각도 지금 누가 하고 있다?

지금 내가 살아서 하고 있지

죽으면 그런 생각도 못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죽으면

이렇다 저렇다 하는 생각은 내지도 마라.

죽으면 나쁘다는 생각도 내지 말고

죽으면 좋다는 생각도 내지 마라.

?

그것은 아무런 근거가 없는 생각이에요.

 

그 생각도 지금 누가 하고 있다?

살아서 누가 하고 있다?

내가 하고 있는 내 망념에 불과한 거지

그것은 아무런 실체가 없는 거다.

 

그러니까 죽으면 고도 없고, 죽으면 낙도 없고

죽으면 편안하지 않느냐?

그건 죽음이 그런지 안 그런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것도 다 언제 한다?

살아서 하는 생각이다.

그러니까 이게 얼마나 꿈 같은

앉아서 지금 꿈꾸고 있는 거예요.

 

천당 가면 이런 세상일 거다. 거기는 좋은 세상이다.

그것도 다 환상이에요.

그냥 생각, 망상에 불과하다.

그냥 여기 살아서, 이 생에서 그냥 꿈으로 그렇게 그리는 거지.

그것이 그런지 안 그런지 하고

아무 관계가 없는 거다.

 

그래서 이 세상에 제일 큰 사기꾼은

종교를 하는 사람들이 치는 사기꾼이에요.

이 사람들은 주로 사람에 대해서 유혹을 할 때

-죽은 뒤에 어떻게 된다

천당 간다, 극락 간다 유혹하고

-또 죽은 뒤 지옥 간다 하고 협박하고

그래도 이것이 들통이 안 나는 이유는

확인할 수가 없기 때문에 증거가 없다.

 

요즘 재판할 때도 증거가 있잖아요. 그렇죠

돈봉투를 줬니 안 줬느니 증거가 있는데

이건 아무리 거짓말을 해도 증거가 없다.

그런지 안 그런지, 확인할 길이 없는 거다.

 

어젯밤에 내가 꿈을 꿨는데

, 내 극락 갔다 왔다이래도

그건 거짓말인지 진짜인지 확인할 수가 없다.

그 사람의 공상 속에서 그려진 거기 때문에.

 

그런 것처럼 이런 것들은

있다 하는 것도 공상이고

없다 하는 것도 공상이고

있는지 없는지 생각할 필요도 없다.

 

그런 것들은 지금 내가 앉아서 상상하는 것에 불과한 거지

이렇다 해도 저렇다 해도

있다 해도 상상이고

없다 해도 뭐다? 상상이다.

 

그러니까 있다 해도 단정이고

없다 해도 단정이다.

 

그래서 있고 없음도 버리고

그런 것은 놓아라.

 

이분은 없다는 데 치우치고 있다, 없다는 데.

그러니까 그런 생각을 하는 거지.

그런지 안 그런지 하고 아무 관계가 없다.

 

그래서 극단에 치우쳐 있으니까

그런 공상 그만하시고

찰나찰나 지금에 충실해야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