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 철학에 보면
‘안이비설신의’ 육근과 ‘색성향미촉법’ 육경이 나옵니다.
전자는 정보를 받아들이는 내적 창구이고
후자는 외계에서 들어오는 정보의 여섯 갈래를 각각 가리킵니다.
그런데 안이비설신의와 색성향미촉법이 활성화되기 위해서는
이 열 두 장소에 마음이 머물러야 합니다.
다시 말해 ‘나’라는 인식이 자리해야
그것들이 제 기능을 발휘하게 됩니다.
‘나’라는 것이 정보의 기준이 되고,
‘나’라는 것이 정보를 분류하고,
‘나’라는 것이 정보를 취사해서 활용하게 되니까요.
이것은 적자생존의 생태계에 꼭 필요하지만
반면에 ‘나’라는 관념을 고착시켜
생로병사와 번뇌망상의 괴로움을 유발하게 됩니다.
그래서 불교 수행은 예외 없이
12처에 ‘나’가 머무르지 않는 방향으로 나아갑니다.
그리고 이것에 성공하면 ‘나’가 어디에도 머무르지 않는다는
‘응무소주(應無所住)’의 경지에 이릅니다.
머무름이 없다는 말은
결국 12처에 ‘나’가 없는 상태인 것이지요.
마치 허공에 정보 창구만 휑하니 뚫려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렇다면 12처에 응무소주(應無所住)가 되면
구체적으로 어떤 마음 상태일까요?
여기에 대해 아난다의 경에서는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습니다.
/깨달은 자는 눈이 있고 형상도 있지만 그 처(處)는 경험되지 않는다.
귀가 있고 소리도 있지만 그 처(處)는 경험되지 않는다.
코가 있고 냄새도 있지만 그 처(處)는 경험되지 않는다.
혀가 있고 맛도 있지만 그 처(處)는 경험되지 않는다.
몸이 있고 감촉도 있지만 그 처(處)는 경험되지 않는다.
공무변처, 식무변처, 무소유처에 들어 이런 의식을 가진 자도 그 처(處)는 경험되지 않는다./
이상의 얘기를 종합하면,
응무소주(應無所住)가 된 상태에서는
정보에 대한 인식은 있지만 ‘나’가 없다는 뜻이 됩니다.
가령 어떤 사물을 인식할 때
보는 작용은 있지만 보는 주체가 없는 것입니다.
듣는 작용에 있어서도 듣는 주체로서의 ‘나’는 인식되지 않습니다.
이 얘기는 존재는 하지만 ‘나’가 없다는 뜻이 됩니다.
한마디로 無我의 상태로 존재하며
다양한 정보활동을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어떤 수행자가 ‘나’가 있다는 것을 전제로 말하면
깨달은 것이 아니라는 결론에 이릅니다.
가령 누군가 ‘불성을 봤다’, ‘내가 곧 붓다이다’, ‘내가 알고 보니 조물주(神)였다’, 라고 말하면
깨달은 것이 아니라는 얘기입니다.
왜냐하면 이런 얘기들엔 주체로서의 ‘나’가 개입되어
결과적으로 無我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런 주장엔 논리적 어폐가 있습니다.
‘나’를 인식하든 인식하지 않든 존재하면 ‘나’가 있기 마련이니까요.
‘나’를 느끼지 못해 無我의 상태로 있더라도 ‘나’가 있는 건 분명합니다.
그래서 ‘나’를 인식하지 않고
순수하게 존재만 하는 의식을 가리켜
‘참나’, ‘불성’, ‘본성’ 등의 이름을 가져다 붙이게 됩니다.
이렇게 되면 ‘無我’와 ‘참나(본성)’가 같은 개념이 됩니다.
결국 수행자들은 당면한 ‘나의 문제’를,
‘나의 머무름’을 소멸시키는 방식으로 풀었습니다.
‘나’를 없애고 남게 되는 인식작용,
다시 말해 바탕에 남는 순수의식을 깨달음으로 연결한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나’의 머무름이 없어 無我가 되고,
동시에 순수의식만 남아 참나(본성)가 됩니다.
허망하게 소멸되지 않으면서도
열반의 상태에서 영원히 존재할 수 있게 된 것이지요.
그렇다면 진짜로 깨달은 사람은
無我의 상태에서 정보에 대한 인식만 하게 될까요?
다시 말해 ‘나’에 대한 관념이 사라지고
오로지 관찰하는 기능만 남는 걸까요?
창조주가 삼라만상을 굽어보는 것처럼 말입니다.
사실 ‘나’가 없이 인식만 한다면
그것이 열반이고 해탈일 것입니다.
‘나’가 있음으로서 번뇌망상과 생로병사가 발생하는 것이니까요.
그런데 마약을 해도 그런 비슷한 현상을 경험하게 됩니다.
마약에 취하면 ‘나’라는 관념이 줄어들다가
최고조에 이르러서는 아예 사라집니다.
이렇게 되면 ‘나’는 없고 감각기관만 활성화되어
엄청난 희열에 휩싸입니다.
‘나’가 없으니 환희가 밀려오고,
감각기관만 살아 움직이니 모든 것이 창조이고 열반인 것이지요.
이것이 마약이 일으키는 환각상태입니다.
無我의 상태에서 인식 작용만 활발히 움직이고
이것이 너무 황홀하다 보니 중독성이 강할 수밖에 없는 것이지요.
그런데 이런 상태에서 과연 깨달음이 일어날까요?
선정(禪定)에 들어 한 無我의 경험과 마약을 통해 한 無我의 경험이
도대체 뭐가 다를까요?
여기에 대해 불제자들은
마약은 有爲法이어서 無爲法인 수행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유위법이든 무위법이든 그 결과는 똑같습니다.
가령 부산에서 서울에 갈 때,
경부고속도로 대신 서해고속도로를 타고 우회해서 가도
도착지는 같으니까요.
그래서 훗날 뇌과학이 좀 더 발달하면
‘無我의 상태에서 인식하는 불교의 깨달음’을
붕어빵처럼 마구 찍어낼 것이 뻔합니다.
결론적으로 12처에 마음이 머무르지 않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닙니다.
왜 자꾸 마음이 ‘부산에 있다’, ‘서울에 있다’, ‘우주 전체에 충만하다’와 같은 얘기가 나오는 걸까요?
마음의 머무름을 왜 따지냐는 겁니다.
정작 중요한 것은 ‘마음이 뭐냐’는 것입니다.
마음이 뇌세포가 일으키는 전기적 신호인지
아니면 물질 이전에 어떤 상질(象質)로 이루어진 고차원 에너지망인지
그것도 아니면 온 우주의 바탕을 채우는 어떤 초월적 존재인지
그리고 그런 것이 어떻게 존재할 수 있는지에 대한 이유를
조목조목 아는 것이 관건입니다.
마음에 대해선 전혀 모르면서
왜 마음의 머무름을 그토록 따져대는 걸까요?
장님이 눈을 뜰 생각은 하지 않고
코끼리의 코와 꼬리의 위치를 가지고 논쟁하는 것과 뭐가 다르겠습니까.
이러니 無我가 뭔지 모르고
심지어 無我와 참나가 같다는 얘기까지 나오는 것입니다.
마음을 제대로 알면
저절로 ‘나’를 알고 ‘우주’를 알고 ‘존재’를 알게 됩니다.
이렇게 ‘全知에 의해 자유롭게 된 경지’가
바로 불교의 깨달음입니다.
그러면 불교의 깨달음을 얻으면
‘나’는 어디에 머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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