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을 닦아야 깨달을 수 있다는 사실을 의심하는 수행자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어떻게 마음을 닦아야 할까요?
마음이 움직이는 현상을 심리학적으로 접근하면 어떤 공통점이 보입니다.
그건 知情意라는 세 갈래의 큰 흐름을 이룬다는 사실입니다.
知는 정보를 취합해 판단을 내리고
情은 정보에 대한 공명을 일으킵니다.
그리고 意는 知와 情의 반응에 따라 필요한 동력을 제공합니다.
마음이 오만가지로 갈라지더라도
크게 보면 知情意 세 방향으로 흘러가게 되는 것이지요.
그래서 마음 수행을 거론하려면
먼저 知情意에 대한 깊은 통찰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知情意에서 의는 知와 情에 수반되는 동력이기에,
크게 보면 知와 情의 양 갈래로 볼 수도 있습니다.
인간을 '지성적인 인간과 '감성적인 인간'으로 구분하는 것도 같은 맥락입니다.
흔히 지성적인 인간을 높이 치지만
그렇다고 감성이 부족하면 인간미가 떨어지겠지요.
그래서 지성과 감성이 균형 잡힌 인간상이 가장 적절하다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지성과 감성을 수행에 적용하면 어떻게 될까요?
지성은 알고 싶은 욕망을 일으킵니다.
반면에 감성은 무언가 되고 싶은 욕망을 자아냅니다.
알고 싶은 욕망은
존재의 근본 바탕에서 울려 나오는 보편적인 목소리입니다.
반면에 되고 싶은 욕망'은
'나'라는 것을 돋보이기 위해 나오는 편향적인 목소리입니다.
그래서 지성은 전체성에 바탕을 두고, 감성은 개체성에 근간을 둡니다.
이런 이유로 되고 싶은 욕망'은 결국 ‘我相 놀음'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기이하게도 수행자들은 예외 없이
감성이 조장하는 되고 싶은 욕망에 충실합니다.
그들은 마음을 비우고 싶고, 탐진치를 없애고 싶고, 번뇌를 소멸해 열반에 이르고 싶고, 그래서 결국 깨달아 붓다가 되고 싶어 합니다.
이에 비해 지적 영역인 '알고 싶은 욕망'을 지닌 수행자들은
가뭄에 콩 나듯이 드뭅니다.
수행자들은 초발심을 낼 땐
'나는 누구인가?', '존재란 뭐꼬?'를 화두로 삼으면서도
작심삼일이라는 말처럼 얼마 지나지 않아
'되고 싶은 욕망'으로 가득 물들게 됩니다.
그렇다면 세존은 어떤 길을 걸으셨을까요?
세존은 지성이 조장하는 ‘알고 싶은 욕망’에 의해 출가를 하게 됩니다.
생로병사가 일으키는 고통을 절감하고
그 고통이 왜 발생하는지 근원을 파헤치고 싶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당시 브라만교의 수행은 오로지
‘되고 싶은 수행’으로만 채워져 있었습니다.
현실의 고통을 소멸해 열반과 해탈의 '나'가 되는 길을 모색했던 것이지요.
그래서 세존 역시 브라만교의 수행에 몸을 담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세존은 브라만교의 수행에 대한 의심마저 놓지는 않았습니다.
이는 지성이 던지는 '알고 싶은 욕망'의 불이 꺼지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감성의 수행으로 이룬 경지를 늘 지성으로 점검하며 의심을 일으켰던 것이지요.
그 결과 세존은 감성 수행의 최고봉인 열반과 해탈에 이른 뒤에도
습관처럼 의심을 일으켰습니다.
그리고 열반과 해탈을 이루어도 實存을 알 수 없다는 사실에 절망하게 됩니다.
세존은 브라만교 수행으로는 절대로 깨달을 수 없다고 확신했고
그래서 홀로 독립해서 지성의 수행을 해나가게 됩니다.
‘아느냐 모르느냐’의 영역으로 되돌아와 화두의 끈을 놓지 않은 것입니다.
이렇게 되니 몸을 혹사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래서 우유죽을 비롯한 공양을 받았고
시간 날 때마다 숲속을 산책하며 건강도 챙겼습니다.
그러다 명상이 깊어질 때는 보리수나무 아래 좌정하여
앎의 궁극까지 치달았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실존이 왜 스스로 존재하는지를 풀게 됩니다.
알게 되는 순간 그 맑은 심리 상태마저 송두리째 바꿔 놓습니다.
'앎'과 '상태의 경계가 사라지면서
그는 인류 사상 최초로 붓다가 된 것입니다.
이후 세존은 '감성의 길'이 아닌 '지성의 길'로
가르침의 체계를 세우게 되니
그것이 바로 불교입니다.
그래서 불교는 전적으로 '아느냐 모르느냐'의 영역입니다.
초기경전의 대간을 이루는 사성제와 팔정도, 연기법과 중도론 등은
모두 지적 이해를 구하는 철학적 언어로 기술되어 있습니다.
그 이후에 나온 대승불교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불교는 다른 종교와 달리
신학이 아닌 철학의 부류에 들어갑니다.
이런 철학적 의문에 충실했던 것이 불교의 교종입니다.
하지만 교종은 ‘제1원인’을 탐구하지 않고
그것을 가리키는 손가락만 더듬거리다가 허송세월하게 됩니다.
그러다가 선종이 등장하면서 돈오(頓悟)의 기치가 올라갑니다.
선종은 교종의 무거운 짐을 벗어 던졌지만
점점 감성이 추구하는 ‘되고 싶은 욕망’ 쪽으로 기울게 됩니다.
빨리 깨우쳐 붓다가 되고 싶은 마음에 별의별 속성법들도 만들어 내지요.
‘선문답’과 ‘오직 모를 뿐’이 그 대표적 사례입니다.
말장난 몇 마디로 깨닫고, '몰라'로 최면을 걸어 또 깨닫는 해괴한 풍토가 나오게 된 것입니다.
결국 초기불교의 ‘알고 싶은 수행’을 버리고
힌두교의 ‘되고 싶은 수행’으로 빠지면서 불교 수행은 정체됩니다.
사실상 깨달아 붓다가 되고 싶은 마음이 일어나는 한
이런 시류를 막기는 어렵습니다.
붓다가 되고 싶은 마음이란 건 잠시 잠깐 간직하면 됩니다.
그런 걸 계속해서 염두에 둔다면 힌두교 수행으로 흘러갈 수밖에 없습니다.
불교는 한마디로 말해 理性의 도화지에
知性의 물감을 풀어 全知를 그려내는 가르침입니다.
당신은 불제자가 맞나요?
그렇다면 마땅히 知가 情과 意를 이끌어야 합니다.
열반에 이르고 해탈해 붓다가 되려는 욕망을 거두고
진리에 대한 갈증을 드러내야 할 것입니다.
진리의 세계엔 '나'가 들어설 자리가 없습니다.
진리는 오로지 온전한 앎만 존재하며
그렇기에 그 앎만이 당신을 자유롭게 할 것입니다.
당신은 이제 감성이 만든
열반이나 해탈, 본성이나 불성 같은 환영에서 깨어날 때가 되지 않았나요?
깨닫고 싶으면 깨달을 수 없습니다.
붓다가 되고 싶으면 붓다가 될 수 없습니다.
되고 싶은 욕망은 我相이 만든 한낱 환영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당신의 이성을 믿으세요.
당신의 이성은 全知에 이를 만큼
위대한 힘을 지니고 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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