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도가 뭐냐고 단적으로 묻는다면
제1원인(實存)을 찾는 과정이라고 답할 수 있습니다.
어느 무엇에 의해 생성되지 않고 스스로 존재하는 實存(제1원인)
이것을 배제한 깨달음은 존재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세존의 무상정등각을 정의하자면 제1원인에 대한 깨달음이 됩니다.
그렇다면 이제부터 제1원인을 찾아보도록 합시다.
삼라만상 가운데 원인 없이 스스로 존재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수행자치고 자존의 문제를 가지고 씨름해 보지 않은 분은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익히 알듯 그 어느 것도 지전에서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하나님 역시 예외가 아닙니다.
어떻게 하나님이 원인 없이 스스로 존재하는지에 대한 논거를 대지 못하면 자존성이 깨지면서 하나님으로서 의심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이토록 우리 주변에서 제1원인을 찾기란 지난합니다.
심지어 생각이나 마음 같은 것도 매한가지입니다.
더 나아가 ‘참나’나 진아, 불성… 등도 그렇습니다.
이것들 역시 자존하는 근거를 대지 못하면 실존이 아닌 관념의 일종에 불과하게 됩니다.
제1원인을 찾을 수 없다면 다른 방식으로 접근할 필요가 있습니다.
주변에 있는 아무것이나 손에 쥐어봅시다.
눈으로 쳐다보아도 상관없습니다.
가령 책상 위의 연필 하나를 예로 들어보죠.
이 연필은 과연 제1원인인가요, 아닌가요?
분명한 건 제1원인에서 나왔다는 사실입니다.
그럼 제1원인에서 파생되어 나오면 그건 제1원인이 아닌가요?
다시 말해 제1원인에서 제1원인이 아닌 것을 만들어낼 수 있을까요?
제1원인의 정의는 ‘어느 무엇에 의해 생성되지 않은 실존’입니다.
이 말은 제1원인 외에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제1원인만 독존합니다.
따라서 독존하는 제1원인이 변화를 일으켜 삼라만상을 창조해도
제1원인이 아닌 새로운 것이 개입될 여지가 없습니다.
모조리 다 제1원인이라는 얘기입니다.
더 쉽게 말해, 제1원인+ 제1원인= 제1원인입니다.
이것을 제2원인, 제3원인 등으로 보면 천지창조에 의한 피조물이 됩니다.
물론 그렇게 볼 수도 있지만 근본적 속성을 보면 제1원인에서 변한 것이 없습니다.
이런 이유로 천부경에 보면 일시무시일(一始無始一)이 나옵니다.
제1원인에서 제2, 제3의 어느 무엇으로 갈라져 삼라만상이 창출된 것 같지만
사실은 그런 시작이 없이 제1원인만 있다는 뜻입니다.
그야말로 제1원인만 천상천하유아독존이란 얘기입니다.
이런 점에서 보면, 응시하고 있는 연필이 곧 제1원인입니다.
마찬가지로 보고 듣고 만지고 느낄 수 있는 모든 것들이 제1원인입니다.
심지어 상상하여 꾸며내는 관념과 탐진치에 의해 일어나는 번뇌망상도 제1원인 그 자체입니다.
결과적으로 제1원인이 아닌 것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런 논리라면 나= 제1원인= 붓다입니다.
그런데 왜 스스로 중생이라 생각하며 깨달음을 갈구하고 있는 걸까요?
그 답은 매우 간단합니다.
제1원인은 모든 것 자체이기에 범위가 없습니다.
그런데 ‘나’는 일정한 범위에 한정되어 있습니다.
이 말은 한정된 경계 안에 정보를 가두어 놓음으로써 제1원인을 망각하게 됐다는 뜻입니다.
연필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녀석은 매우 좁은 방향으로 자신의 영역을 한정하고 있습니다.
다른 정보가 개입될 여지가 없어 늘 이 모습뿐입니다.
이런 식으로 자신의 범위를 지니고 있는 것들은 모조리 제1원인의 속성을 깜빡 잊고 있는 것이 됩니다.
한마디로 스스로 피조물이며 중생을 자청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나’의 범위를 없애기만 하면 곧바로 제1원인을 깨닫게 되는 것이 아닐까요?
바로 그렇습니다.
그래서 세존은 ‘나’의 범위를 없애라는 의미에서 연기와 무아를 가르쳤습니다.
연기와 무아는 깨달음의 대상이 아니라 그 수단입니다.
이제 시청자들은 이 채널에서
왜 그토록 참나와 진아, 불성, 열반, 해탈… 같은 것들을 혹독하게 다루었는지 이해할 것입니다.
이것들 모두 ‘나’의 범위를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혹자는 힌두교의 브라만처럼 나= 삼라만상으로 놓으면 ‘나’의 범위를 해체한 것이 아니냐고 반문할 수 있습니다.
전혀 그렇지가 않습니다.
그것 역시 ‘나’의 범위가 무한하게 커져 있습니다.
무한한 것 역시 범위에 속합니다.
그래서 그런 ‘나’로는 제1원인을 깨달을 수 없습니다.
이것이 힌두교 수행의 한계입니다.
그럼 다시 초기불교로 돌아가서 무아를 들고 나오면 어떤가요?
‘나’를 철저히 없애 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면 언젠가는 ‘나’의 범위가 지워질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나’를 없앤다는 것 자체엔 이미 ‘나’가 있다는 관념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나’를 없앤 자리에 보이지 않는 ‘나’가 또다시 생겨납니다.
이런 이유로 초기불교의 무아로도 제1원인에 도달할 수 없습니다.
‘나’를 없애도 안 되고,
‘나’를 무한히 확장해도 안 되고,
‘나’의 바탕으로 몰입해 참나나 진아를 일깨워도 안 됩니다.
혹자는 그런 것들을 외면하고 그냥 ‘존재한다’는 의식만 가지면 어떠냐고 물을 수 있습니다. 그 ‘존재’라는 것 속에도 ‘나’가 은근슬쩍 내포되어 있어 효용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어떻게 수행하라는 얘기인가요?
‘나’의 범위를 없애기 위해서 할 수 있는 건 단 하나뿐입니다.
그냥 가만히 있는 것입니다.
있는 그대로 보고 듣고 느끼면 저절로 외계와 공명이 되어 ‘나’의 경계가 무너집니다.
범위가 증발하면 남는 것이 제1원인 뿐입니다.
그래서 그냥 깨달으라는 것입니다.
지금 당신의 현재 모습이 제1원인에서 왜곡되어 있다면
기존의 초기불교나 힌두교, 대승불교에서 제시하는 수행법을 따르는 것이 맞습니다.
하지만 실상은 당신의 지금 모습 그대로가 제1원인입니다.
그래서 어느 무엇을 가지고 전략적으로 접근할 수 없습니다.
이래서 불법을 가리켜 ‘법이 없는 법’이라 하는 겁니다.
당신은 실존(제1원인)에서 왜곡된 것이 없기에 그냥 깨닫는 수 외엔 없습니다.
가령 컴퓨터 프로그램에 빠져 허우적대는 사람이 있다고 칩시다.
이 사람이 프로그램의 설정값에서 벗어나는 건 매우 간단합니다.
컴퓨터에 접속하지 않으면 되니까요.
마찬가지로 중생으로 프로그램 된 생각에 접속하지 않으면 됩니다.
이것이 ‘그냥 있는 것’입니다.
당신을 비롯한 삼라만상 모든 것은 원래부터 ‘제1원인’이었고,
이것에서 찰나도 떨어진 적이 없습니다.
그렇기에 ‘그냥 깨닫는 방법’ 외엔 없습니다.
이런 이유로 불법은
세상에서 가장 쉬운 가르침이지만,
너무 쉽다 보니 가장 어렵게 여겨지게 된 것입니다.
당신은 아직도 불법이 어렵거나 심오하게 느껴지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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