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소의 정신사적 의미는
이성에 의한 진보라는 계몽주의의 토대를 흔들어 놓았다는데 있다.
표방하는 이성, 진보이념, 자유는
자칫 자립적인 인간의 개별성을 파괴할 위험이 있다고 경고한다.
사회는 평준화, 관습, 동일화를 통해
자신의 기질과 이성(마음속의 판관)에 따라 살아가지 못하게 한다.
그 결과 인간은
헛된 추구, 겉의 행복을 위해 자발적 노예상태에 빠지거나 어릿광대가 된다.
철학
형이상학과 이성이 아니라 스스로의 마음에 물어볼 수 있도록 돕는 행위.
교육
인간의 본성적인 선한 기질을 격려하고, 강요하지 않으며, 자유를 허락하는 것이어야 한다.
사회
인간은 자유롭게 태어났으나 사회라는 사슬에 얽매여 있다.
해결 방법은 국가가 자유에 뿌리를 내려야.
자유로운 개인들의 상호계약 위에서 구성된 국가.
진정한 자유
인간이 스스로 동의하여 부과한 법칙에 복종하는 것.
치자治者 피치자被治者 동일성의 원리.//
루소에 이어서 하도록 하겠습니다.
지난 시간에 루소는 계몽시대의 대표적인 사상가이지만
또한 계몽시대의 한계와 부작용, 이성에 의한 진보에 대한 통찰을 가졌던 사람이다라고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럼 오늘은 이 루소가 정신사적으로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루소는 한마디로 계몽주의 사상의 토대인 이성에 의한 진보라고 하는 생각을 흔들어놓았던 사람입니다.
루소는 이성에 대해서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차갑고 메마른 이해력일 수 있다.
형식에 대해서는 굉장히 경직된 태도를 만들어낼 수 있다”고 이야기 했습니다.
“진보 이념은 환상이며 자유라고 하는 것은 그 속에 감추어진 노예상태가 있을 수 있다”고 이야기 했습니다.
아마 이런 것은 아까 모든 직업을 전전해 본 약간의 중하위층에서의 직업을 전전해 본
그 사람의 경험과 우울한 기질, 이게 합성일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마는
어쨌든 계몽주의 사상의 토대가 되어있는 이런 생각들은
자칫하면 인간의 개별적이고 자립적인 속성, 그 개별성을 파괴할 위험성이 있다,
이렇게 이야기를 합니다.
그래서 어떻게 파괴되냐?
이 사회라고 하는 것이 평준화 시킨다.
또 관습에 따르고, 또 동일화시킨다. 하는 그 속에서 보이지 않는 억압과 구속을 하게 된다는 거죠.
그러면 인간이 본래 타고난 근원적인 또는 자연적인 어떤 천성이 소멸된다.
계몽주의는 이런 부분에서 심각한 오류를 가질 수 있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러면서 무릇 인간이란
자신의 기질과 이성에 따라 살아가는 자연적인 인간이어야 한다.
그렇지 않은 모든 것은 헛된 추구에 불구하고 겉으로의 행복이고
이것은 자발적 노예 상태거나 어릿광대일 수 있다.
자, 우리가 21세기 현대사회에서 모두 다 저처럼, 저도 그렇지만 유튜브를 하고
자기를 알리는 이 시대에
자발적 노예의 상태, 어릿광대의 상태, 헛된 추구 이런 부분은
사실은 한 번쯤은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인데
루소는 이미 이런 얘기를 한 것이죠.
그래서 루소는 이런 생각으로 철학, 사회, 교육, 자유, 이런 부분에 대한 생각을 불어넣습니다.
루소에 있어서의 철학이라는 것은 형이상학적인 것은 아니었던 것이었습니다.
이 사람이 말한 철학이란
스스로의 마음에 물어볼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다.
그런 얘기를 합니다.
그래서 지성보다는 감정이 더 근원적이고 위에 있다.
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래서 진리라고 하는 것이 머릿속에 있는 것이 아니고
느낌, 그 분명하고 확실한 느낌 속에 있다, 이렇게 이야기를 합니다.
그래서 이 감정 위의 사상이 계몽주의의 지성을 누르고 시대의 어떤 정신이 되는데
계몽주의와 감정 위의 사상의 관계를 보면
계몽주의는 뭐라고 해도 혁명에 기초는 되었겠죠.
그러나 합리적인 세상을 만들겠다는 혁명의 사상을 구현하기 위해서는 엄청난 에너지와 열정과 행동이 필요한데
여기에 기름을 끼얹은 것이 루소의 감정 위의 사상입니다.
생각하는 것도 다 지성보다 머리보다 느끼고 행동하게 하는 감정이 더 중요하다.
이것이 혁명도화선이 될 수 있었던 것이죠.
그래서 인간에 대한 이런 인간의 천성, 그러니까 자신의 직접적인 감정을 신뢰하고
같이 살기 위해서 현혹당하지 않고 진실로 홀로 있을 때
인간은 원래 선할 수밖에 없다, 이렇게 이야기를 하는 것이죠.
그래서 루소 철학의 결론은 이렇습니다.
-인간은 원래 선악의 창조되었으나 인간의 선에 의해서 더럽혀졌다.
정확하게는 사회의 선에 의해서 더렵혀졌다,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인간은 자연이 자기 내면에 새겨놓은 양심이라는 판관이 있어서
정의와 덕의 원리를 알아차리고 행할 수 있다, 이렇게 이야기를 합니다.
그러면서도 루소가 경험한 자기 삶이라고 하는 것은
인간의 불안전성과 이중성을 철저하게 느낀 삶이죠.
선을 추구하면서도 악을 행하고
노예이면서도 자유인이고, 자유인을 추구하면서도 또 노예상태에 스스로 묶이고
이성과 열정 능동과 수동 이런 것들이 교차하는
불확실하고 불완전하고 이중적인 속성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단순한 성선설은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그냥 이것은 그렇다는 것이다,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그 가능성을 구현해 내는 것은 의무다, 이렇게 이야기하는 것이죠.
그래서 그렇게 하지 않으면 항상 사회가 그 사람을 잡아먹을 것이다,
그런 위협 속에 있다, 이렇게 이야기를 합니다.
그래서 루소에게 있어서는 자연스럽게 사회는 조금 적대시하고 투쟁해야 할 대상이 됩니다.
이 사회라고 하는 것이 그 인간의 천성적인 선할 수 있는 가능성을 죽이고 삐뚤어지게 하고 방해한다,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그래서 모든 악의 뿌리는 이기심에 있는데
이 이기심을 만들어 낸 것이 인간의 사회화로 인해서 생기는 것이다.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그래서 사회화라고 하는 것은 인간을 틀에 가두는 것인데
그 속에서 이기심이 생겨나고 인간의 천성이 삐뚤어진다, 이렇게 이야기를 합니다.
사실은 이 모든 게 다 사회 때문이라고
루소가 책임을 사회에 돌린 최초의 사람이다, 이렇게 말할 수 있겠습니다.
그래서 혁명의 시조로 떠받들라기도 하죠.
자연스럽게 루소는 교육이론에서 거의 정해진 얘기를 합니다.
교육이라고 하는 것은 사회화시킨 것이 아니다.
틀에 가두어놓고 찍어내는 것이 아니고
사람의 선한 기질을 격려하고 보호하는 것이며
어떠한 경우에도 강요나 규정해서는 안 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자유를 허락해야 한다
이런 얘기를 하는 겁니다.
사실은 현대심리학에서도 너무 강하게 지도받고 요구받고 자란 아이는
자기 세상에 대한 실감이 없다고 얘기를 하거든요.
그래서 자기 자신에 근거해서 존재하고 행위할 수 있게 되는 것
그리고 마주치는 모든 것을 자기 것으로 자기의 경험으로 자기 것으로 만들 수 있는 것
이것을 교육을 통한 인간의 육성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사실 이 부분에서 아주 충격적인 반전이 하나 있는데요
우리가 흔히 루소는 <에밀>이라고 하는 교육론을 썼지만
자녀가 없었다, 이렇게 이야기를 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부모들이 “아이를 한번 키워보고 그런 얘기를 해라” 이런 말도 할 수 있는데요
사실은 더 정확하게 이야기하면 자녀가 없었던 것이 아닙니다.
하녀였던 여인과 23년 동안 동거를 했고, 마지막에 나이 들어서는 결혼도 했는데
그 사이에 5명의 아이를 낳았습니다.
낳았는데 엽기적인데, 저도 충격받았는데
아이가 태어나는 쪽쪽 고아원에 보내버립니다. 5명 다.
그래서 결국은 친구가 아이가 어떻게 됐는지를 찾아봤는데 결국은 어떻게 됐는지 알길이 없었죠.
이거 ㅎㅎ 여러분은 어떻게 이해가 됩니까?
루소의 변명은 삑삐거리고 울고 떠들고 정신없게 한다, 이런 것이었습니다.
아, 이거 정말 소화하기 정말 힘들었습니다.
어쨌든 그렇지만 이 사람의 교육관은 이거이고
교육관은 사회화와 연결되어있고
사회화는 긴장 관계를 가질 수밖에 없는데
도대체 그러면 인간은 국가나 사회를 이루고 살고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것은 개인의 자연적인 천성을 억압하는 성향이 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냐?
자유롭게 태어난 인간이 사회의 사슬에 얽매여 있는 부분을 어떻게 깰 것인가?
그래서 사회의 일원이 생깁니다.
그것이 바로 유명한 사회의 계약론입니다.
그가 생각하기에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방법은
국가가 자유에 뿌리를 박고 있어야 한다.
그럼 국가라고 하는 것은 어떻게 구성되어야 하느냐?
자유로운 인간들의 상호체결한 계약 위에서 성립되어야 한다.
그래서 오직 동의에 의해서만, 강제가 의해서가 아니라 동의에 의해서만
자신의 의지, 피플스 윌이라 하는 인민 의지라고 하는 번역되는
자기 자신의 의지에만 복종하는 것, 그러면 동일해진다.
국가에 복종하는 것이 아니고 자기 자신이 동의한 것에 대해서
자신의 의지로 복종하는 것이니까 이것은 괜찮다,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그래서 자연상태로 언제까지 남아있을 수는 없으니까
그렇다고 4발로 기는 짐승이 되자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그 상태는 포기하고
모든 사람을 자발적으로 동의한 법률에 결속시켜서 국가를 만들자 하는 것이 되는 것이고
이것이 그냥 그대로 혁명의 도화선이 되는 것이죠.
그래서 이 사람이 생각한 자유의 개념이 어떻게 우리가 가장 기여를 했다고 할 수 있는데
참된 자유라고 하는 것은 인간이 스스로 규정하여 부과한 법칙에 복종하는 것이다.
인간이 동물과 다른 것은 또는 그 위대한 것은
스스로 규정해서 법칙을 부과할 수 있고
그 규칙을 부과한 것에 스스로 복종할 수 있다는 것.
이것이 위대한 것이다.
이것은 강제와 억압에 굴종하는 것과 다르다,
이렇게 이야기한 것입니다.
그래서 루소의 자유개념은
오늘날에 더 굉장히 새겨볼 만한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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