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 사람들이 좋아하는 말 가운데 하나가 비법입니다.
비법이란 효능이 뛰어나서 다른 사람들이 모르게 꼭꼭 숨겨 놓은 기술이나 방법을 일컫습니다.
비법이 오래되면 신비감까지 더해져 상품의 가치가 훨씬 높아집니다.
그래서 전통비법, 원조비법이란 말도 등장합니다.
비법에 있어서는 불교도 예외가 아닙니다.
비법을 전수하는 것이 법통처럼 인식되기도 하고,
심지어 비법만 가지고 하나의 종파를 세운 ‘티벳 밀교’도 있으니까요.
비법은 싯다르타의 성불 과정에도 적용됩니다.
왜냐하면 싯다르타는 기존에 없던 수행법으로 깨달음을 얻게 되니 말입니다.
만일 싯다르타에게 비법이 없었다면 사람들은 그의 가르침을 싱겁게 생각할 테고, 그만큼 불교의 전파력은 떨어졌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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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싯다르타의 비법은 뭘까요?
불교에서는 그것을 중도라고 부릅니다.
중도의 구성 성분은 팔정도나 연기로 이루어졌고, 이런 비법으로 깨달으면 그 경지도 어마어마하다고 합니다.
그래서 무상정등각이란 단어가 나오고,
그 내용은 절대의 반야와 열반의 적정, 그리고 해탈의 무주로 채워지게 됩니다.
이쯤 되니 붓다는 천상천하유아독존이 되어 경배의 대상으로 우뚝 서게 됩니다.
이처럼 비법은 수행과 깨달음을 멋지게 포장하여 상품의 가치를 극대화합니다.
그런데 정말 비법은 그만한 가치가 있는 것일까요?
미안한 말이지만 깨달음에 비법이 들어가면 한낱 짝퉁이 되고 맙니다.
비법 자체가 동화 같은 상상력의 산물인 까닭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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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존이라 일컫는 제1원인은 가장 단순합니다.
비유하자면, 그림의 세계에서 도화지보다 단순한 게 없는 것과 같습니다.
도화지에 물감이 칠해지는 것처럼
제1원인이 점차 복잡해지면서 삼라만상이 창출됩니다.
따라서 붓다의 깨달음은 마치 도화지처럼 가장 단순해야 하고,
그 수행법 역시 그래야만 합니다.
사람들이 좋아하는 오묘한 비법과는 정반대인 셈입니다.
싯다르타는 어느 무엇에 의지하지 않고 그냥 깨달았습니다.
이것이 中道입니다.
여기서 ‘가운데 中 자’는 ‘치우침이 없다’는 뜻으로 쓰였습니다.
모든 着을 놓아 버림으로써 순수 본연의 상태가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따라서 세존의 中道는 곧 ‘그냥 있는 상태’로 정의 할 수 있고,
깨닫고자 한다면 그냥 깨달으면 됩니다.
어떤 특별한 방법이 없기에 누구든지 마음만 먹으면 그 자리에서 깨달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말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말도 안 되는 소리라며 손사래를 칠 것입니다.
깨달음을 마음대로 이룰 수 있다면 세상에 부처 아닌 사람이 어디 있겠냐고 반문하겠지요.
그런데 거듭 말하지만 깨달음은 깨닫고자 하는 마음만 있으면 그 즉시 이루어집니다.
깨닫고자 하는 마음이 전혀 없어서 깨달음이 요원하게 된 것입니다.
세상엔 금강발원을 세우고 목숨을 바쳐가며 정진하는 수행자들이 셀 수 없이 많습니다.
하지만 진심으로 깨닫고자 하는 사람을 보기란 매우 어렵습니다.
과거를 거슬러 올라가도 마찬가지입니다.
문헌을 아무리 뒤져도 깨달으려는 마음을 지닌 수행자는 찾기 어렵습니다.
이것은 결코 과장된 얘기가 아닙니다.
물론 용수나 달마, 원효 같은 극소수의 수행자들은 예외겠지만
대부분의 수행자들은 죽을 때까지 단 한 순간도 깨달음을 구하지 않습니다.
오늘날에 이르러서도 이런 사실엔 변함이 없습니다.
수행자들은 으레 참된 자아를 찾아 진리를 깨우치고 나아가 붓다가 되려고 합니다.
중생에서 붓다로 업그레이드하려는 것입니다.
이렇게 자신의 존재 가치를 높이는 쪽으로 방향을 잡으면 깨달음과 역행합니다.
2018년 6월에 독일의 만하임 대학, 홈볼트 대학, 하이델베르그 대학과 영국의 사우샘프턴 대학의 연구진들이 공동으로 발표한 논문이 화제가 되었습니다.
그들은 요가나 명상 같은 마음 수행을 한 수행자들을 대상으로 조사했는데
공통적으로 에고가 커진 것으로 나왔습니다.
마음 수행을 할수록 자기고양감(Self-Enhancement)이 증대한다는 연구 결과는
수행자들에게 충격과 더불어 강한 의혹을 불러일으켰습니다.
‘절밥 20년이면 괴물이 된다’는 얘기가 논문으로 가시화된 것입니다.
잘 생각해 보십시오.
진리를 깨우쳐 붓다가 되려는 발원이 깨닫고자 하는 마음일까요?
그건 그냥 적자생존의 원리에 따라 남보다 우위를 점하려는 아상의 발로일 뿐입니다.
생각이란 건 착을 먹고 생존하는데,
수행자의 구미에 맞춰 붓다라는 着을 미끼로 걸은 것입니다.
진리, 깨달음, 붓다 같은 미끼에 달싹 붙어서
평생을 정신없이 헤매다 허송 세월만 보내는 것이지요.
불경의 온갖 이론과 수행, 그리고 붓다의 환상에 홀려
상상 속에 함몰한 모습은
낚싯바늘에 걸려 허둥대는 물고기와 다를 바 없습니다.
요컨대 ‘깨닫고자 하는 마음’은
‘가장 단순한 상태에서 가장 보편적인 구조를 이해하려는
가장 순수한 마음’입니다.
그래서 비법만 없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방법도 없습니다.
방법이 없는 것이 방법이고,
그래서 불법을 가리켜 ‘법이 아니 법’이라 하는 것입니다.
이런 이유로 누구나 깨닫고자 하는 마음이 생기면
그 순간 깨달음은 그냥 열립니다.
왜냐하면 당신 자체가 깨달음이며 붓다이기 때문입니다.
당신은 아직도 비법을 찾고 있지는 않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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