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래에 힌두교 성자 가운데 가장 높은 깨달음을 얻었다고 일컬어지는 마하리쉬와
불교의 싯다르타를 비교해 보면 어떨까요?
전자는 힌두교 수행으로, 후자는 불교 수행으로
각각 깨달음을 얻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그렇다면 누가 더 높은 깨달음을 얻은 걸까요?
만일 둘의 경지가 같다면
힌두교와 불교는 조금도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불제자들은 과거불 못지않게 현세불인 마하리쉬를 스승으로 떠받들고
그의 가르침을 뼈에 새겨야 할 것입니다.
그렇기에 불제자 입장에선 깨달음에 차이가 있다는 쪽으로 답해야 하는데
그렇다면 도대체 무엇이 어떻게 다를까요?
마하리쉬를 비롯해서 수많은 힌두교의 영적 지도자들의 가르침은
놀랍도록 분명하고 간결하고 정확하여 감탄을 금하기 어렵습니다.
그들의 수많은 가르침 중에 깨달음에 관한 대목만 추려 보면 대략 다음과 같습니다.
참된 깨달음이란
‘나’라는 자성이 없어 무아이지만 그렇다고 ‘나’가 없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나’의 本性이 있어 진아이지만 그렇다고 ‘나’가 있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나’와 ‘너’가 不二이지만 그렇다고 그 둘이 같은 것이 아니다.
이것은 일체의 머무름이 없지만 그렇다고 머무름이 없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당신이 알고 있는 모든 法과 理가 통하면서도 일체 성립하지 않는다.
이것이 바로 참된 자아, 즉 本性(참나)의 경지이다.
이상은 힌두교의 깨달음에 대한 정리입니다.
그렇다면 이것과 붓다의 깨달음이라는 무상정등각과 무엇이 다른가요?
당신은 그 답을 찾을 수 있나요?
힌두교의 깨달음과 불교의 깨달음의 차이
여기에 경천동지할 성불의 열쇠가 숨어 있습니다.
그래서 뭇 화두의 백미라 할 만합니다.
꿈속의 비유를 들어보겠습니다.
당신이 귀신에게 쫓기는 꿈을 꾸고 있다고 가정합시다.
심한 공포심에 의해 괴로운 상태입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꿈이 사라졌습니다.
꿈이 없는 상태가 얼마 동안 지속되다가 다시 귀신의 꿈이 이어집니다.
이때 당신이 ‘꿈이 없는 상태’를 떠올려 귀신의 꿈을 희석시키면
공포심이 잦아들면서 어느 정도 마음의 평정을 찾게 됩니다.
그러다 어느 순간 ‘귀신의 꿈’이 한낱 꿈에 불과하다는 사실이 알아졌습니다.
자각몽의 상태가 된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꿈에 대한 집착이 거의 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연이어 꿈속의 모든 것들이 자신과 不二라는 사실도 알아집니다.
모든 것이 내가 아닌 것이 없습니다.
그야말로 천상천하유아독존입니다.
이렇게 되니 어떤 꿈에도 매여 있지 않고
그렇다고 꿈에서 벗어났다는 사실에도 머무르는 바가 없습니다.
당신은 ‘꿈이 없는 상태’를 떠올리면서 무아를 보았고
‘꿈이라는 사실’을 알면서 진아를 찾았습니다.
그리고 ‘꿈이 곧 나라는 사실’을 알면서 不二의 절대가 되었고
‘꿈과 꿈이 아닌 것’에 머무름이 없게 되면서 해탈을 이루었습니다.
당신은 정녕 깨달은 것인가요?
꿈속에서 꿈이라는 것을 안 것과 꿈에서 깨어 현실이 된 것은
어둠과 빛처럼 확연히 다릅니다.
누군가 아침이 되어 잠에서 깨어 눈을 떴습니다.
꿈에서 현실로 돌아왔는데, 이것을 가지고 깨달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렇듯 깨달음에 연연하는 것은 꿈속에서나 가능한 일입니다.
이런 이유로 꿈속에서 깨달으면 성인(聖人)이나 붓다가 되어 거룩하게 빛나지만
꿈에서 실제로 깨어 현실로 돌아오면
그냥 기지개를 켜고 하루 일과를 시작하는 평범한 사람이 됩니다.
왜냐하면, 꿈에서 깨면 현실이란 것이 너무 당연해
그것에 대한 어떤 머무름도 없기 때문이다.
이처럼 온전히 깨닫게 되면 그것이 너무 자연스러워 그 무엇보다 평범해집니다.
꿈 안의 깨달음과 꿈 밖의 깨달음
이것이 바로 힌두교의 깨달음과 불교의 깨달음의 차이입니다.
전자는 특출나고 위대하고 거룩하지만 후자는 평범하고 무난하고 담백합니다.
세존은 무상정등각을 얻기 직전에 위대함과 평범함에 대해 생각을 하였습니다.
돌이켜 보면 이 생각이 그가 중생으로 있으면서 일으킨 마지막 생각인 것 같습니다.
이렇게 자신이 그동안 걸어온 수행의 발자취를 상기한 뒤
일체의 의지처를 잃고 그냥 있게 됩니다.
그리고 마침내 일찍이 없었던 대각을 이루고는
수행자로서의 독특한 모습을 잃고 보통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때부터의 세존은 어느 누구보다 평범합니다.
다섯 명의 비구에게 자신이 경험하고 깨달은 바를 가감 없이 얘기해 주고
이후에 인연 닿아 찾아오는 수행자들에게 각자의 근기에 맞는 가르침을 전합니다.
그러다 제자들의 수가 늘어나자 좀 더 큰 그림을 그리게 되니
그것이 바로 불교입니다.
불교를 만들어 후대에까지 이어지도록 여러 가지 방편도 설하고
틈틈이 지역 유지나 권력자와의 친분도 다집니다.
이렇게 평범한 수행자의 모습으로 한평생 살다가
말년에 위염으로 고생 좀 하다 죽었습니다.
이랬던 세존이 죽은 다음부터
한량없이 존귀하고 거룩하고 위대한 존재로 거듭납니다.
힌두교의 브라만처럼 꿈속의 제왕으로 이미지를 탈바꿈하게 된 것입니다.
가끔 떠올려 보지만 한편으론 재밌기도 하고 다른 한편으론 씁쓸하기도 합니다.
요컨대 불경에 나오는 깨달음이나 옛 조사들로부터 내려오는 깨달음…,
그런 것들은 죄다 힌두교의 깨달음으로 치장되어 있습니다.
다시 말해 꿈속의 깨달음입니다.
따라서 그런 몽중각(夢中覺)에 미련이 있다면
“나는 누구인가?”의 화두를 풀 수 없을뿐더러
깨달음을 기약할 수 없습니다.
붓다의 깨달음!
무상정등각!…
그건 여러분들이 생각하는 그런 깨달음의 범주를 크게 넘어서 있습니다.
‘無’나 ‘모름’의 화두를 통해
멍때리는 정도의 체험으로 얻을 수 있는 경지가 아닙니다.
위빠사나의 알아차림과 삼매의 멸진처, 참선의 열반과 無住의 해탈로도
범접할 수 없는 경지입니다.
한량없이 높게만 보이는 붓다의 경지
그곳은 바로 우리 주변에 흔히 널려 있는 평범함에 있습니다.
평범은 ‘그냥 있는 상태’에 들어가는 열쇠입니다.
당신은 정녕 평범하신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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