볼테르는 프랑스의 대표적인 계몽사상가다.
그는 평생 그체제와 싸우며 자유, 관용, 정의, 평화, 인권을 외치는
이성에 의한 진보를 믿고 희구했다.
그러나 리스본 대지진 등을 겪고 나서는
이성 또한 신의 자리를 대신할 수는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것은 자연의 잔인성과 무정함,
인간 세상의 악함,
그리고 무엇보다도 인간 자신의 불완전함을 꿰뚫어 본 결과다.
신과 인간사에 대한 혼돈과 체념을 지나
철학적 성찰에 위안을 받은 그는
세상에는 혁명을 가져왔지만
자신은 정직한 절망을 받아들인 것 같다.
(생각해보면 그에게는 무상, 고, 무아라는 불교적 인식의 그림자가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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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리스본 대지진으로 본
볼테르의 신, 이성, 그리고 인간에 대한 말씀을 나눠보도록 하겠습니다.
볼테르는 18세기 프랑스의 대표적인 개몽사상가이고, 백과전서파이고
프랑스 대혁명의 병장이 루소와 더불어 큰 영향을 끼친 사람이죠.
그가 살아있는 동안에 유럽의 지성계의 거의 왕으로 굴림하면서
편집 희곡 소설 등을 대단한 필력으로 써내서
큰 인기를 누렸던 사람입니다.
영향을 많이 끼쳤죠.
그이 삶이라고 하는 것은
사상의 자유라든지, 종교적 관용, 이성, 평화, 인간 행복, 불의와 억압을 폐기라고 하는 지금 우리 21세기에도 여전히 중요하게 통용되는 가치들을 주장하면서
그것을 억압하고 있다고 생각되던 당시의 교회, 앙시앵 레짐이라고 하는 구체제와 대립했던, 평생 대립했던 사람입니다.
그래서 그가 생각한 그 교회는 신의 온전함을 파괴한 자, 신을 괴물로 만든 자,
이렇게 매도를 하게 됩니다.
그래서 교회가 미신 광신과 다름이 없다.
그래서 이성과 선한 의지를 가진 인간이라면 이것을 받아들일 수가 없다.
그래서 우리는 혁명을 통해서 악을 제거할 수 있다는 희망을 되살려야 한다.
그렇죠, 그래서 진보를 믿는 계몽사상가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래서 그렇게 된다면 그리스도교는 좀 더 이성적으로 되고
또 박해도 줄어들 것이라고 희망을 하게 됩니다.
그렇게 보면 볼테르는 무신론자는 아니죠.
스스로 이런 표현을 쓰는데,
하느님을 진정으로 사랑하기 위해서 지금의 그리스도 교회를 반대한다
이런 표현을 했습니다.
그리고 신 자체는 당연히 믿어야 하는 거다.
그건 필연적이다, 이렇게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래서 특히 볼테르 등 계몽 사상가의 이 당시 신관을 이신론이라고 하는데
이신론이라고 하는 것은
신은 당연히 존재하고 세상을 창조했지만
창조한 후에는 삶과 벌을 스스로 주관하면서 인격신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입법으로 세계에 운영하는 존재다, 이렇게 생각하는 거죠.
그래서 볼테르도 신이 개인의 마음속에 우리들의 마음속에 스스로를 새겨놓았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감정이라든지 논리 등으로 신을 인식할 수 있다,
이렇게 생각을 합니다.
그런데 신에 대해서는 이렇게 인정을 하지만
신을 인식하는 인간 능력에 대해서는 제한이 있다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 신을 속속들이 알기에는 인간의 지적 영향, 이런 미약하다, 이렇게 본 것이죠.
더군다나 위험함도 있는데
그러다 보니까 신을 우리 인간의 시각으로 인간의 측면에서 규정할 위험 또한 존재한다 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완전한 신에 대한 지식 인식은 불가능하고
상상과 개연성으로 희박하게 추론할 수 있을 뿐이라고 겸손에 대한 다른 얘기를 했죠.
그러면서 매우 독특한 신의 존재를 증명하는데
우리가 이렇게 감정적으로 만족하고 감사할 수 있다는 이 충만한 느낌
이것이야 말로 신의 은총이라고 하는 강력한 증거가 아니겠는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그러니까 논리 형이상학에 대해서는 대단히 소설에 불과하다라고 배척하지만
인간의 감정에 대해서는 굉장히 어떤 오히려 신이 준 선물로 존중하는 그런 태도를 보입니다.
그리고 사회 또는 정치에 대해서도 신의 모습은 나타날 수 있는데,
그가 희망한 신의 모습이란
정치을 통해서 나타나는 신의 모습이라고 하는 것은
범죄를 잔인하게 처벌하지 아니하고
착한 행위의 선으로 상을 주는 그러한 모습이죠.
그래서 사회질서를 위해서 신은 반드시 필요하다. 요구가 된다.
그래서 유명한 말을 하는데
“만일 신이 없었다면 인간은 기어코 신을 창조했을 것이다” 라고 할 정도로
사회의 질서와 진보를 위해서 신이 있어야 한다고 주장을 했습니다.
그런데 이 양반이 57세 무렵, 1775년에 포르투갈의 리스본에 어마어마한 재앙이 발생합니다.
그건 대지진인데요, 진도가 9 정도 된다고 하니까 엄청나죠.
이때 리스본의 인구가 20만 명도 정도였는데, 적어도 3만~5만 명이 죽었다고 합니다.
왕궁과 교회 하여튼 모든 건물의 85%가 파괴되었고
그런데 민망하게도 홍등가만 피해가 없어서
하여튼 교회는 무너지고 홍등가는 살아남고 이런 거죠.
더군다나 포르투칼 스페인 당시에 독실한 가톨릭 국가이고
리스본은 더더군다나 본산과 같은 독실한 가톨릭의 도시였죠.
그리고 만성절 축일에 일어난 재앙으로 말미암아서 대부분 사람들은 어마어마한 충격을 받게 됩니다.
볼테르도 마찬가지이고, 이때 굉장한 충격을 받았던 것같습니다.
그래서 자연이 매우 잔인하구나라고 생각한 것 같습니다.
신이 창조한 세계가 자연인데, 자연이 이렇게 잔인하다니
그럼 여기서 인간존재라고 하는 것은
오늘 죽을지, 내일 죽을지 모르는 비참한 도박판에 있는 존재 아닌가.
물론 노자도 비슷한 얘기를 했죠.
천지불인, 천지가 원래 자연인데 자연은 인자하지 않아서 하늘은 인자하지 않아서 인간을 풀로 만든 인형처럼 생각하는구나, 이런 표현이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볼테르가 그런 느낌을 느낀 것이죠.
그런 눈으로 보니 세상사에 회의가 들기 시작합니다.
이 세상도 보니까 악이 창궐하더라는 거죠.
질병, 무질서 파괴 등등.
그런데 인간은 또 그러면 어떠냐?
인간도 마찬가지다.
인간도 역시 서로의 악속에서 악의 대홍수 속에서 허우적거리고 있는 곳 같다.
그러면 역사는 어떠냐?
역사도 마찬가지다.
죄악과 우둔함의 덩어리이다.
이렇게 생각을 합니다.
그러니까 굉장히 회의적인 시각을 갖게 된 거죠.
그래서 행복이라고 하는 것은 꿈에 불과하고 고통이 현실이고
그러면 우리가 뭘 할 수 있냐?
견디는 수밖에 없다, 이렇게 이야기를 합니다.
그래서 인간은 평생 근심·걱정의 먹이가 될 뿐이다.
뭐 이런 표현을 쓰는 거죠.
그러니까 뭐, 비관적인 표현은 다 쓰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필연적으로 그러면
“왜 신은 존재하느냐”에 대한 회의감을 나타내는데요
그가 볼 때 인생이라고 하는 것은
소멸되기 위해 끊임없이 창조되는 것처럼 보인다는 거죠.
우리는 끊임없이 태어나서 시집장가가서 아이를 낳고
또 아이를 위해서 끊임없이 인생을 살다가
또 그 아이는 교육받아서 결혼을 해서 또 아이를 낳고
이게 어떻게 보면 소멸되기 위해서 끊임없이 창조되는 쳇바퀴다
이렇게 생각하는 겁니다.
그렇다면 그것보다는 아예 아무것도 없는 무가 낫지 않을까, 이런 생각도 하고요
그래서 그 신이 창조한 세계가 이렇게 의미 없고 악덕이 가득차 있다면
신이 선의를 가지고 있다라는 것을 우리가 어떻게 믿을 수 있는 것이지?
이런 회의에 빠지기도 합니다.
그래서 본인은 필사적으로 철학자이니까
이런 간극을 수습하려고 노력합니다.
그냥 신이 어떻게 생겼느냐를 생각하기보다는
위대한 건축가가 있다는 것만으로 만족할 수 있지 않냐.
그리고 선악은 인간이 판단할 수 없지 않을까?
그것은 판단할 수 없는 혼동같은 것일 것이다.
인간이 뭘 알겠느냐
인간은 체념도 해야 한다. 이렇게 하지만
결과가 수습이 안 된 거 아닙니까, 그죠?
그래서 정작 모든 것을 탐구하는 백과전서파이지만
자기 자신이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모르는
절망을 해결할 수 없었죠.
그래서 인생이 좀 덧없다.
이런 사형선고 받은 사형수가 들판에서 잠시 뛰노는 것 같은 느낌을 가집니다.
그래서 있지도 않은 것을 찾다가 결국 사라지는 것은 인간이 아닌가.
그래서 다시 철학으로 귀의합니다.
조용한 성찰만이 위로가 되고 영원의 고요를 주는 철학의 귀의하게 됩니다.
그렇지만 볼테르는 천성적으로 생기발랄하고 에너지가 넘치는 사람이어서
하지만 인간은 결국은 모험할 수밖에 없는 존재이다.
그리고 철학은 인간에게 모험할 수 있는 용기를 준다는 점에서 가치가 있다.
이렇게 생각을 정리하는 것 같습니다.
서양과 동양은 언행일치에 대한 개념이 조금 다른 것 같아요.
그러니까 동양에서 언행일치라고 하는 것은 말이라고 하는 것은 항상 도덕적인 거고,
도덕을 올바름을 실천하는 문제인데
서양에서 언행일치라고 하는 것은 생각한대로 사느냐, 소심것 사느냐
뭐 이 정도의 차이가 있는 것 같습니다.
생각한 것이 반드시 도덕적이거나 뭐 이래야 하는
교훈적인 것이나 성스로운 것은 아닐 수도 있는 것이죠.
볼테르는 성스러운 인간은 절대 아니지만
자기가 생각한대로 옳다고 믿는 것을 소심것 글로서 행동으로서 표현하면서
온몸으로 살아간 그런 사람이 아닌가 싶습니다.
볼테르는 참 정직했던 것 같아요.
구체제를 부정하고 이성적 세계를 소망했지만
인간 자체에 내재한 불완전성에 대해서 전혀 외면하지 않았던
정직한 절망을 통해서 바라볼 수 있는 세상을 만들려고 했던
그런 사람이었던 것 같습니다.
지금처럼 병이 창궐하고 그러면
사람들은 세상의 질서에 이성, 신의 선의, 그리고 인간에 대한 믿음
이런 것들이 흔들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옛날에도 생각이 깊은 사람들은 마찬가지로 고민했던 주제였던 것 같습니다.
오늘은 볼테르의 신에 대한 생각, 인간에 대한 생각에 대해서 알아보았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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