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 수행에 있어서
참선과 더불어 커다란 비중을 차지하는 것이 염불입니다.
염불에는 소원성취를 위해 부처님의 이름을 반복해서 부르는 ‘지명(指名)염불’이 있고
부처님을 닮아가기 위해 붓다의 상(象)을 마음에 비추는 ‘관상(觀象)염불’이 있습니다.
그리고 부처님의 성품과 공덕을 기리는 ‘관송(觀頌)염불’이 있고요.
어느 것이 되었든 궁극에는 부처님의 가피를 입는 것을 목적으로 두고 있습니다.
특히 염불 가운데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아미타불 진언’은 서방정토에 다시 태어나는 것을 발원하는 일종의 정토신앙으로도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염불은 참선에 비해 그 공효가 떨어지는 걸까요?
다시 말해 재가신자나 하근기의 수행자들에게 적합한 수행법이 맞을까요?
대개 참선이나 위빠사나, 간화선을 하는 수행자들의 입장에선
염불이 한참 낮은 단계의 수행으로 여겨지는 게 사실입니다.
비유를 하자면 교과서에서 빗겨난 참고서 정도라고나 할까요.
하지만 일부 수행승들은 염불의 공효가 다른 수행에 못지않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염불을 오만 가지로 흩어진 생각을 하나로 모아 삼매에 드는 쪽으로 활용하거나,
혹은 ‘실상염불’처럼 저마다의 마음 바탕에 있는 자성불을 깨우는 데에 쓴다면
이것 역시 훌륭한 수행법이라는 얘기입니다.
여기서 ‘염불삼매’라는 말이 나오고, 실제로 그 공효가 입증되면서
오늘날 불교의 주된 수행으로 자리 잡게 되었습니다.
정토종에서 남달리 염불을 높이 치는 건 사실이지만
다른 종파에서도 일정 부분 염불을 받아들이고 있는 현실이지요.
그렇다면 염불은 실제로 어느 정도의 효력이 있을까요?
염불이란 일종의 주파수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TV 채널을 돌리듯 상념의 주파수를 특정 정보에 맞추는 행위입니다.
가령 아미타불을 반복해서 부르면 아미타불의 정보에 연결되고
관세음보살을 지속적으로 찾으면 관세음보살의 정보에 가서 닿게 됩니다.
이런 식으로 불·보살의 정보 체계에 연결을 도모하는 것이 염불 수행의 전모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여러 가지 문제점이 생깁니다.
첫 번째, 신앙하는 마음으로 염불을 하면 주파수 설정이 잘 안 된다는 점입니다.
다시 말해 극락왕생을 바라는 심정으로 읊는 염불은
온갖 잡음이 끼게 됨으로써 그 실효가 떨어지게 됩니다.
두 번째, 염불을 일종의 주문처럼 외워 정신을 통일하는 데에 쓰면,
이것은 ‘소 잡는 칼을 닭 잡는 데에 쓰는 격’이 되고 맙니다.
염불이 지닌 가치를 살리지 못하고 일반적인 진언의 수준으로 격하하는 것이지요.
정신통일이 목적이라면
그냥 ‘나무막대기’를 반복해서 외워도 큰 차이가 나지 않는 이유입니다.
세 번째, 염불이란 그 구조상 의지하는 마음이 끼게 되면서
주변의 다른 神을 불러 모으는 부작용도 일으킵니다.
잡신이나 조상신, 혹은 힘깨나 쓰는 신들이 붙어
신통력을 일으키는 빌미가 되기도 합니다.
신통력이 문제라는 것이 아니라 그만큼 외도로 빠질 가능성이 높아진다는 뜻입니다.
이상과 같은 이유로 인해
염불 수행엔 여러 가지 장애가 놓이게 됩니다.
그렇다면 염불 수행을 하지 않는 것이 옳을까요?
수행자 본인이 상근기라면 구태여 염불 수행은 필요하지 않습니다.
원법대로 수행해 나가시면 됩니다.
하지만 상근기가 아니라면 염불 수행은 일정 부분 필요합니다.
왜, 말도 많고 탈도 많은 염불 수행이 도움이 된다는 걸까요?
그건 쉽게 말해 맹모삼천지교(孟母三遷之敎)의 논리입니다.
맹모삼천지교의 고사에서 보듯 가장 큰 교육은 /어울림/에서 나옵니다.
시장에서 어울리면 시장의 풍습을 배우고
학당에서 어울리면 학습의 문화를 익히게 되는 것이지요.
그렇듯 불·보살의 정보와 연결되면
자신도 모르게 형이상(形而上)의 고급 정보에 친숙하게 됩니다.
사실 [단예소피아] 채널에서는
반복해서 ‘제1원인’을 화두로 잡아 참구할 것을 주장합니다.
그런데 달마나 원효 정도의 상근기가 아니면
그 답을 깨우치기가 쉽지 않은 것이 사실입니다.
이때 반야의 완성을 포기하고 마음을 비우는 중급 수행으로 선회하거나
그것도 힘들면 극락왕생을 염원하는 하급 수행으로 낮춰야 할까요?
바로 이런 부족한 점을 메울 수 있는 해결책으로 유용한 것이 염불수행입니다.
수행자의 부족한 부분을 맹모삼천지교처럼 환경을 조성해서 해결하는 것입니다.
그러려면 염불에서 두 가지만 명심하면 됩니다.
첫 번째는 정토신앙을 빼야 하고
두 번째는 그 뺀 자리에 반야증득을 채워 넣어야 합니다.
반야증득을 위해 염불을 하면
그 주파수도 불·보살에 그만큼 잘 연결되고
고차원의 정보를 은연중에 공유하게 됩니다.
가령 어느 수행자가 불·보살들이 계신 장소에 함께 머무른다고 가정하면 어떨까요?
저절로 법신(法身)에 감화되어 정보를 공유하고
달마나 원효 같은 상근기의 수행자가 될 것이 분명합니다.
반야를 완성하는 지적 능력이 최고도로 발달할 테고
그러니 ‘제1원인’의 화두를 푸는 것은 시간문제가 될 것입니다.
이렇듯 염불이란 쓰기에 따라서 그것에 대한 평가는 바뀌게 됩니다.
당신이 반야증득을 위해 염불을 쓴다면 간화선 못지않은 공효가 분명히 있습니다.
불·보살을 깊이 존경하고 본받는 마음으로
그분들의 고급정보를 공유하고자 하는 바람으로
지극정성으로 염불을 한다면
필히 도움을 받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불·보살의 마음은 언제나 활짝 열려 있으니까요.
그렇다면 염불을 어떻게 외워야 효율적일까요?
수행승이 아니라면 구태여 경전을 달달 읊을 필요는 없습니다.
그래서 ‘지명(持名)염불’이 간단하면서도 그 효과가 좋습니다.
불·보살의 이름만 따서 빠른 속도로 독송하면 되니까요.
가령 소리를 입 밖으로 내다가 어느 순간부터 그것이 힘들어지면
소리를 입안에서 웅얼거리고
그것도 지루하다 생각되면 마음으로 외우면 됩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그것도 하기 싫어지면 저절로 선정에 잠기게 됩니다.
이때 간혹 가다 생각이 일어나는데 그때는 화두를 떠올리십시오.
바로 ‘제1원인’의 화두 말입니다.
‘만일 내가 관세음보살이라면 이 화두를 어떻게 풀까?’라는 식으로
지명염불의 대상과 합일된 상태에서 화두를 떠올리는 겁니다.
그러다가 생각하기가 귀찮아지면 다시 선정에 들면 됩니다.
생각이 동시다발로 올라와서 선정이 흐트러지면 또다시 염불을 빠르게 외우면 되고요.
그리고 염불을 좌선한 상태에서만 할 필요는 없습니다.
의자에 앉아 업무를 보다가, 취침을 위해 누운 자세에서, 산책 하면서 주변 경관을 음미하면서 해도 전혀 지장이 없습니다.
불·보살에 가까워지는 훈련이 바로 염불이기에
때와 장소에 특별히 구애되지 않는 이유입니다.
정리하면
하근기 혹은 중근기의 수행자가
자신의 부족한 점을 메우기 위한 방법으로 등장한 것이 염불입니다.
그리고 염불은 극락왕생을 목적으로 둔 신도용이 있고
반야증득을 원력으로 삼는 수행용이 있습니다.
후자를 선택해서 불·보살과 벗이 된다는 일념으로 염불을 한다면
그 공효가 반드시 있게 됩니다.
얼핏 보면 타력 수행처럼 보이지만
좋은 벗을 사귀는 능력은 엄연한 자력입니다.
자력으로 불·보살의 감화를 입는 것이니 타력이란 딱지는 적합하지 않은 것이지요.
당신은 혹시 염불수행을 하시나요?
서방정토에 왕생하는 목적으로 염불수행을 하시나요?
아니면 정신통일이나 마음을 비우기 위한 수단으로써 염불을 하시나요?
‘제1원인’의 화두를 풀어 반야를 완성하기 위한 보조 수단으로써
염불을 활용해 보시는 건 어떠신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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