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못이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죄를 범하면
참으로 나쁜 사람일 것입니다.
가령 어떤 도둑놈이 가난한 사람들의 삶을 뻔히 알면서도 그들의 금품을 훔친다면
절도죄에 더해 양심불량이라는 비난을 받게 됩니다.
한마디로 벼룩의 간을 빼먹는 파렴치한 짓이 되겠지요.
그래서 흔히 죄인 줄을 뻔히 알면서도 범행하는 사람이
더 많은 사회적 지탄을 받게 됩니다.
이에 비해 모르고 죄를 지으면 단순 실수였다며 관용의 대상이 됩니다.
사람이 살다 보면 실수로 잘못을 저지를 수도 있으니까요.
이런 이유로 ‘모르고 짓는 죄’보다 ‘알고 짓는 죄’가 훨씬 크다고 여깁니다.
그리고 실제로 재판 과정에서도 ‘모르고 짓는 죄’의 형량을 대폭 낮춰주기도 합니다.
그런데 불교에서는 ‘모르고 짓는 죄’가 ‘알고 짓는 죄’보다
열배 백배 큰 것으로 말합니다.
왜 불교의 관점에선 사회의 일반적 시각과 다른 걸까요?
그건 ‘알고 짓는 죄’는 양심이라는 브레이크가 작동하지만,
‘모르고 짓는 죄’는 그것이 전혀 작동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더해 죄의 有無를 안다는 것은
그만큼 지성이 발달되었다는 뜻도 포함됩니다.
결과적으로 어떤 살인자가 자신의 범행이 죄업이라고 안다면
2차 3차 범행에 브레이크가 걸립니다.
하지만 죄업을 인식하지 못하면
그 살인자는 계속해서 살인을 저지르고 결국 연쇄살인마가 되고 맙니다.
더 쉽게 예를 들면, 악마가 있다고 칩시다.
그 악마가 자신의 범행에 대해 문제의식을 가질까요?
악마라면 당연히 자신이 행하는 범행이 죄가 된다는 생각을 갖지 못합니다.
그러니 악마인 것이지요.
따라서 ‘사람은 참 착한데 잘 몰라서 죄를 지었다’라는 말엔 어폐가 있습니다.
모르는 것 자체가 착한 것이 아닌 까닭입니다.
이처럼 ‘알고 짓는 죄’와 ‘모르고 짓는 죄’는
그 업보에 있어서 천양지차로 갈라지게 됩니다.
그래서 세존께서 ‘모르고 짓는 죄’에 대한 경고를 소홀히 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자, 그러면 우리가 자신도 모르게 짓는 죄에는 어떤 것이 있을까요?
오늘날은 사회의 윤리와 법적 체계가 잘 갖춰져 있기 때문에
‘모르고 짓는 죄’를 찾기란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잘 찾아보면 모르고 짓는 엄청난 죄가 있습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종교에서 종종 발생합니다.
가령 어떤 사이비 종교의 신도가 있다고 칩시다.
그 신도는 자신의 전도 행위가 올바른 것으로 믿습니다.
그래서 눈이 오나 비가 오나 세상을 구하기 위해서 전도 행위에 몰두합니다.
자신을 희생하며 대의를 위해 매진하지만
결과적으로 피해자만 양성하여 그 죄업이 눈덩이처럼 커지게 되지요.
이처럼 자신은 옳은 일을 한다고 믿고 실천하지만
그 결과는 정반대로 나옵니다.
그래서 그 신도는 마음이 선량한 것 같지만
그것은 선량한 것이 아니라 사악한 것이 됩니다.
왜냐하면 죄에 대해 모르는 것이 선과 악을 판별하는 기준이 되니까요.
잠깐 인류사를 되돌아볼까요?
토인비(Arnold J Toynbee) 박사가 말했듯
인류사는 전쟁의 역사이고
그 전쟁의 근본 원인은 대부분 종교가 차지하고 있습니다.
오늘날에도 종교로 인한 전쟁은 끊임없이 벌어지고 있지 않습니까?
신도들은 종교의 틀 가지 안에서는 지극히 선량하지만
타 종교와의 이해관계가 발생하면 순식간에 악마로 돌변합니다.
죽고 죽이는 살육이 수천 년 동안 이어져 내려오는 이유입니다.
이렇게 종교 신자들이 선악을 동시에 뒤집어쓰고 있는 이유는
바로 죄에 대한 無知 때문입니다.
그러면 도대체 불교 신자로서 어떻게 해야 ‘모르고 짓는 죄’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요?
불교는 깨달음의 종교이기에 그 구조상 죄업을 발생할 여지가 거의 없습니다.
그래서 딱 한 가지만 조심하면 됩니다.
그것은 종교라면 으레 지니게 되는 신앙입니다.
신앙은 無知를 먹고 사는 까닭에
이것만 조심하면 죄업의 수레바퀴에 갇힐 확률이 대폭 낮아지게 됩니다.
깨달음이란 게 뭔가요?
그건 ‘깨서 안다’는 뜻입니다.
그냥 아는 것이 아니라 본질을 직시해서 제대로 안다는 것입니다.
이 얘기는 이성적으로, 이치적으로, 합리적으로, 본질적으로 이치를 온전히 터득한다는 의미입니다.
깨달음은 理性의 극대화이고 신앙과는 전혀 다른 방향에 있는 것이지요.
그래서 불교는 그 태생부터 신앙과는 상극으로 이루어진 종교인 셈입니다.
사실 세존의 생전에는 그를 신앙하는 풍토가 거의 없었습니다.
하지만 세존의 사후에 불제자들이 교단을 확장하기 위해 신도들의 수를 늘릴 필요가 생깁니다.
그래서 방편으로 신앙을 조금씩 주입했고
그러다가 대승불교가 나오면서
힌두교의 신앙 문화를 적극적으로 도입해서 포교하기 시작합니다.
여기서 부처님이 기독교의 하나님처럼 경배의 대상으로 떠오르게 된 것이지요.
물론 불교의 교세를 불리기 위해 신앙이란 것이 일정 부분 필요한 건 사실입니다.
그리고 어차피 佛法을 이해조차 못하는 민초들에게
신앙심을 고취시켜 선업을 쌓게 하는 장점도 충분히 있고요.
하지만 문제는 문명이 극도로 발달한 오늘날에 와서도 신앙을 줄기차게 강조한다는 점입니다.
물론 수행승들의 법문을 들으면
대부분 불교 철학을 이해시키고 반야를 쌓게끔 가르칩니다.
하지만 일부 불제자들이 유독 신앙에 방점을 찍으며
기독교식 복음을 전파하는 데에 열을 올리고 있습니다.
그것이 소위 말하는 ‘부처님께 모든 것을 바치라’는 것입니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예수님께 모든 것을 바치라’, ‘내 마음자리에 주님을 영접하라’는 것과 전혀 다르지 않습니다.
이렇게 신앙으로 유도하는 것도
불교의 교세를 늘리는 것이니 납득할 점도 있지만
그것이 불교의 정신에 위배된다는 사실은 명백합니다.
더 가혹하게 말하면 불법을 훼손하는 중죄를 범하고 있는 것이지요.
이것이 바로 불교에서 행해지는 ‘모르고 짓는 죄’에 해당합니다.
신앙을 전파하는 불제자는 자신의 행위에 부처님이 크게 기뻐하실 것으로 생각하겠지요. 그러니 순수하고 양심이 있어 보이지만
이것이 ‘모르고 짓는 죄’에 해당하여 더 큰 죄업을 양산한다는 사실에 유념해야 합니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신앙에서 우러나오는 순수, 양심, 순종, 선량… 같은 단어는 적합하지 않습니다.
모르는 것 자체가 문제이니까요.
이런 이유로 노자는
“세상이 알고 있는 善이란 것은 善이 아니다”라고 단언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善이란 것은 근본적으로 ‘알고 모르고’에서 나오기 때문입니다.
요컨대 불교는 시종일관 앎을 추구합니다.
그 앎이 완성된 것이 全知이고 깨달음입니다.
그리고 그 앎의 행진에 족쇄가 되는 것이 신앙이고요.
부처님을 존경하고 본받는 마음은 다다익선이지만
부처님께 모든 것을 바치는 신앙은 매우 위험한 결과를 초래합니다.
불교의 깨달음
그건 모든 사람들이 부처님과 같아지는 데서 나옵니다.
따라서 부처님을 신앙하는 대신 본받아 같아지려 해야 합니다.
예수님도 “내가 온 이유는 세상 사람이 나와 같아지게 하기 위함이다”라고 말했는데
하물며 불제자들이 부처님의 어린양이 되려 해서야 쓰겠습니까?
거듭 말하지만, 부처님은
당신의 모든 것을 바친다고 흡족해하시는 그런 형편없는 잡신이 아닙니다.
부처님은 당신이 진리적으로 부처님과 같아질 때
비로소 미소를 띠실 것입니다.
그래야 진짜 거룩하신 부처님이 아니겠습니까!
당신은 혹시 부지불식중
부처님을 하나님처럼 섬기고 있지는 않으신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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