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네 인생이 그리 길지는 않지만
그 여정에 수없이 많은 함정을 만나게 됩니다.
그 함정들 가운데 가장 위험한 것을 꼽으라면 바로 신앙입니다.
왜냐하면 다른 함정들은
물질적인 것들만 손해를 입지만
신앙은 자칫하면 영혼까지 송두리째 빼앗겨 꼭두각시로 전락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올바른 신앙도 있지만
대부분 신앙이 그렇지 못한 방향으로 흘러간다는 사실에 유념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어떤 방식으로 신앙의 함정이 생기는 것일까요?
우리가 물건을 만들거나 팔 때는 먼저 소비자의 심리부터 알아야 합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사람들을 신앙으로 묶어놓기 위해서는
그들이 간절히 원하는 것에 초점을 맞춰야 합니다.
그렇다면 사람들이 가장 갈구하는 것이 무얼까요?
그건 바로 어떡하든 ‘나’를 돋보이는 것입니다.
‘나’ 잘난 맛에 산다는 말처럼
사람들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자신의 존재를 인정받고 싶어 합니다.
그리고 그 수단으로서 권력과 재물, 그리고 異姓을 탐하게 됩니다.
하지만 인간의 욕망은 끝이 없어 그것에 대한 만족은 성립하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대부분 종교는 신도들의 시선을 내생으로 돌립니다.
이생에선 안 되지만 내생에서만큼은 원 없이 잘살게 해준다는 논리입니다.
이것이 ‘구원받아 천국 간다’는 식의 발상입니다.
그런데 이런 단순한 주장만 가지고는 안 됩니다.
신도 개개인이 구원을 해주는 주체와 직접 연결돼야 합니다.
가령 목회자가 자신을 신도와 예수(하나님)의 중간 고리로 자처해선 곤란합니다.
그러면 신도들이 무척 싫어하니까요.
신도들은 예수와 직접 소통하기를 원하며
그래서 목회자는 옆으로 빗겨 이들을 축복해 주는 역할만 해야 됩니다.
그래야 신도들은 예수의 뜻을 거론하며 예수에게 직접 기도하고
자신은 늘 예수와 함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이렇게 사람들의 我相에 딱 맞춰 줘야 그 종교는 번성하게 됩니다.
불교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我相이 무엇을 원할까요?
당연히 붓다입니다.
그러니 ‘당신은 본래부터 붓다였다’라는 논리가 나와 줘야 합니다.
당신은 붓다인데 그 사실을 까맣게 모르고 있는 것뿐이지요.
이렇게 말해 줘야 사람들이 무척 좋아합니다.
그리고 붓다를 되찾는 길도 어려우면 안 됩니다.
속성 견성법이 이래서 필요합니다.
가령 사람들이 ‘몰라’를 주문처럼 외다가 멍 때리기라도 하면 곧바로 견성했다고 말해줘야 합니다.
참회를 하다가 눈물을 한 바가지 쏟게 되어도 견성을 즉시 인가해줘야 합니다.
그러면 사람들이 어떻게 반응할까요?
견성해서 붓다가 되고 싶은 我相이 발동해 그 말을 굳게 믿으려 합니다.
생물학적으로 한참 낮은 수준의 의식 단계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무작정 자신의 진화가 궁극에 이르렀다는 확신을 갖게 됩니다.
그리고 자신에게 견성의 인가를 내 준 사람을 하늘처럼 우러러 받들게 됩니다.
그래야만 자신의 견성이 진실이 되니까요.
이처럼 사람들이 원하는 것을 주면 충성도가 높아지고 조직은 번성하게 됩니다.
이런 의미에서 기독교의 ‘구원’과 힌두교의 ‘참나’는 대단한 상품임에 틀림없습니다.
我相의 구미를 확 끌어당기는 대단한 마력을 지니고 있으니까요.
세상에 종교는 수만 가지에 이르지만
거의 대부분이 ‘구원’과 ‘참나’를 변형한 것들입니다.
이 두 가지를 제외한 종교는 딱 세 가지밖에 없습니다.
바로 ‘구원’과 ‘참나’를 대놓고 부정한 불교가 첫 번째이고
자연의 순리에 따라 우주와 공명하는 길을 제시한 仙道가 두 번째입니다.
그리고 사람 사는 세상의 온전한 도리를 가르치는 유교가 세 번째입니다.
정리하면
3차원의 현생에서 바른 삶을 가르치는 유교와
4차원의 기운을 끌어와 無爲自然의 이법을 터득하는 仙道
그리고 5차원의 실존을 깨달아 존재 그 자체로 化하는 불교가 있습니다.
예로부터 유불선을 합해야 참된 道라는 말이 전해져 옵니다.
현생의 삶에 충실하면서 자연의 순리에 따를 줄 알고
그러면서도 궁극의 깨달음에 대한 화두를 놓지 않는 삶을 가장 이상적이라고 본 것입니다.
만일 호모사피엔스보다 좀 더 진화한 영성인류가 나와 준다면
그들은 과연 어떻게 수행하게 될까요?
추측컨대 유불선을 두루 닦지 않을까요?
道 닦는다고 부모 자식을 버리고 산속에 들어가지도 않을 테고
신선이 된다고 허구한 날 산속에서 나무 열매만 따 먹으며 유유자적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또한 도덕군자가 된다며 현실에서의 삶에 지나치게 탐닉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물론 사람마다 적성이 다르기에 유불선 가운데 어느 하나에 치중할 수는 있습니다.
그렇더라도 유불선이 어느 정도 균형을 유지하며 어우러져야
가장 보기 좋은 수행의 모습이 아닐까요?
그리고 사실 유불선이 하나의 유기체로 작용해야
수행의 함정에 빠지는 일도 줄어들게 됩니다.
가령 선도 수련에서 이런저런 신비체험을 겪게 되어도
유교의 현실 감각이 그것을 제어해 줍니다.
불교 수행에서 느닷없이 ‘참나’에 빠져 견성으로 포장하려 하면
仙道의 무위자연이 그런 作爲의 동력을 빼앗아 버립니다.
유교를 실천하는 과정에 자칫 현실적 탐욕이나 환락에 쏠리게 되면
불교에선 그것의 허망함을 일깨우고
선도에선 더 높은 차원의 재미인 자연의 맛을 솔솔 불러일으킵니다.
이런 식으로 유불선을 합하면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거나 함정에 빠지는 것을 막아주면서
상승효과를 일으킵니다.
그러니 유불선의 삼합은 꽤 중요한 가치를 지녔다 할 수 있습니다.
짐작컨대 미래의 불교는
현실 생활에 충실하면서 틈틈이 호흡을 연마하고
더 나아가 궁극의 깨달음을 추구하게 될 것입니다.
미래의 仙道는 현실을 자연의 일부로 보고
깨달음을 목표로 한 축기와 운기 수련을 해 나가게 될 것입니다.
미래의 유교는
현실 생활에서 我相을 다스리며 격물치지하여
중용의 이치를 터득해 나가게 될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유불선의 경계가 사라지며 하나의 道로 합일되겠지요.
이 道는 너무 명확하고 온전하면서도 그 범위가 없어
딱히 어떤 이름조차 붙여지지 않을 것입니다.
삶 자체가 道이니까요.
말하고 행동하고 즐기는 삶 자체가 수행이니까요.
사람들은 마치 상태공존처럼
중생과 붓다의 경계가 없는 삶을 살아가고
어느 순간 양자가 도약하는 것처럼 저절로 깨닫게 될 것입니다.
이렇듯 가장 온전한 가르침을 꼽으라면
유불선 삼도의 융화입니다.
물론 시대가 바뀌었기에
유교의 여러 폐습은 없애고 좋은 점만 추려야 합니다.
선도 역시 중국 류의 기공이나
이원론적 음양론 같은 것은 개정해야 합니다.
불교 역시 참나로 왜곡된 부분들을 빼서
초기불교의 원형을 되살려야 합니다.
이렇게 유도와 선도와 불도의 제 모습을 살려
하나로 어우러지게 한다면
이것이 가장 온전한 가르침이 되지 않을까요?
당신이 상상하는
가장 이상적인 도의 모습은 어떤 것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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