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덕마음공부, DanyeSophia

[Danye Sophia] 조물주 놀음에 빠진 불교 수행자들

Buddhastudy 2022. 5. 4. 20:11

 

 

 

불교의 가장 큰 가르침은 無我 사상입니다.

無我의 지혜를 깨달음의 주춧돌로 삼은 것이 불교인 것이지요.

그리고 이런 無我에 역행해 어떡하든 有我를 꾸며내려는 심리를 我相이라 합니다.

그러니 불교 수행의 첫 발짝은 我相을 제어하는 데서 시작합니다.

 

그렇다면 수행자들은 불교의 가르침에 따라 我相을 멀리하는 것이 맞을까요?

물론 말로는 하나같이 我相을 외면하는 것은 기본이고

아예 그것을 송두리째 소멸시키려 한다고 합니다.

정말 그럴까요?

 

我相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그것의 전략부터 잘 따져봐야 합니다.

그래서 이번 영상에서는

我相이 구사하는 교묘한 자기 기만술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我相은 쉽게 말해 중심의 세계관이라고 보면 됩니다.

어떡하든 가 온 우주의 중심이 되어야 한다는 겁니다.

쉽게 말해 영화 속의 주인공인 것이지요.

 

그런데 현실을 보면 전혀 그렇지가 않습니다.

치열한 경쟁 사회 속에서 꽤 높은 사회적 지위를 얻더라도

주인공에는 턱없이 부족합니다.

뛰는 놈 위에 나는 놈이 계속해서 있기 마련이니까요.

 

물론 일론 머스크 같은 사람은 재력에 있어서는 세계 제일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주인공인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머스크보다 돈은 없어도 풍부한 지식을 지닌 학자들이 널려 있기 때문입니다.

 

이들 석학들의 눈에 비치는 머스크는

그냥 자본 경쟁에서 정점에 오른 생물학적인 범부일 뿐입니다.

그렇다면 석학 중에 노벨상을 거머쥔 분들은 주인공이 될 수 있을까요?

 

그렇지도 않습니다.

석학들이 지닌 지식은 기껏해야 우주 정보의 1% 남짓에 불과하니까요.

그리고 사실 제아무리 높은 지위나 학식을 지녔어도

생로병사의 장벽 앞에서는 그냥 보잘것없는 미물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런 사면초가의 상황에서 我相은 어떤 길을 모색하게 될까요?

 

어차피 부와 명예, 학식 등의 경쟁에서는 가망이 없습니다.

그리고 경쟁력을 갖췄다고 해도 거대한 時空을 맞닥뜨려서는 어찌할 도리가 없고요.

그래서 我相은 고차원으로 눈을 돌리게 됩니다.

즉 조물주가 사는 세상 말입니다.

 

천국이나 극락이라 불리는 곳의 구성원이 된다면

이생의 삶보다는 월등히 나을 것입니다.

조물주로부터 선택받은 사람이 되니까요.

 

하지만 달리 생각해 보면 그런 고차원 세계의 구성원들도 꽤 많을 테고

그러니 딱 잘라 주인공이라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我相은 다시금 조물주의 옆자리를 기웃거리게 됩니다.

만일 조물주의 오른편에 예수가 있다면

我相은 왼편의 빈자리를 노리게 될 것입니다.

 

我相은 이처럼 천국이나 극락을 기본 베이스로 깔고 넘버2나 넘버3를 꿈꾸지만

이 역시 주인공에는 미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주인공은 바로 창조주 단 하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라 부르지 않던가요.

 

불교에서는 천상천하유아독존이라고 멋지게 표현하고요.

그러니 我相이 큰 사람들은

스스로 조물주가 되는 길을 모색할 수밖에 없고

이런 사람들을 뭉뚱그려 수행자라고 합니다.

 

그런데 냉정하게 현실을 살펴봅시다.

과연 수행을 한다고 조물주가 될까요?

솔직히 자신의 현재 위치를 되돌아보면 초라하기 짝이 없습니다.

이미 사회적으로는 대부분 크게 뒤처져 되돌릴 수 없는 형편입니다.

그러니 어떻게 해야 할까요?

 

我相은 여기서 기가 막힌 생각을 짜내게 됩니다.

현재의 별 볼일이 없는 를 부정하는 것입니다.

현재의 를 가짜라고 치부해 버리면 모든 문제가 봄 눈 녹듯이 해결됩니다.

 

오온(五蘊)의 정보들이 만들어낸 가짜 이기에 신경 쓸 일이 전혀 없는 것이지요.

그리고 가짜 의 먹구름이 사라지면

태양과 같은 진짜 가 훤히 드러나게 됩니다.

이런 발상을 하면 가 주인공이 되는 고속도로가 닦이게 됩니다.

 

여기서 한 가지 주의할 점은

가짜 를 털어내는 일이 어려우면 안 된다는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하루속히 진짜 를 찾아 주인공이 되어야 하니까요.

 

그래서 몰라를 주문처럼 외면서 멍 때리고

울컥하는 감정에 카타르시를 짜내고

생각을 지워 무아지경에 빠지면

진짜 가 짠하고 나타나 줘야 합니다.

이렇게 현재 를 가짜로 돌리고 참나를 쉽게 찾음으로써

조물주로 등극하는 시나리오가 완성됩니다.

 

이 시나리오를 경전으로 삼아 탄생한 것이 바로 힌두교입니다.

그리고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전 세계 수행자들의 열화와 같은 지지를 받게 됩니다.

물론 대부분의 불교 수행자들도 포함해서 말입니다

 

힌두교는 我相을 털어버림으로써 참나를 찾을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하지만 사실은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참나는 我相이 고도로 진화한 아집의 결정체입니다.

그래서 참나로 깨달은 분들은 일면 거룩해 보이지만

달리 보면 마치 뭔가에 홀린 사람들처럼 취해 있습니다.

 

이성의 나사가 풀려있는 광신도들의 의식 상태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이 현상은 기이하게도 유명세를 탈수록 심화됩니다.

 

오늘날만 그런 것은 아닙니다.

과거의 내로라하는 조사들도 이런 범주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합니다.

가뭄에 콩나듯 불교의 무아로써 깨달은 각자들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우리가 알고 있는 것처럼 그 수가 많은 것은 아닙니다.

아무튼 이런 我相의 참나 장난으로 인해

깨달아 괴물이 된다는 말까지 나오게 됩니다.

 

난세에 영웅이 난다고 했나요?

이런 심각한 참나(아트만)의 병폐를 타파하면서

세상에 혜성처럼 등장한 분이 바로 싯다르타입니다.

 

그러니 싯다르타의 법문의 핵심은

아트만(참나)이 없다입니다.

그래서 무아입니다.

 

참나가 없다는 무아의 선언은

我相의 꿈을 무참히 짓밟는 가혹하기 짝이 없는 행위입니다.

 

잘 알다시피 사람들은 저마다 제 잘난 맛에 살고 있습니다.

그 잘난 맛에 궁극엔 참나를 부정하니

당시 수행자들의 심정이 어떻겠습니까!

 

싯다르타의 법력에 밀려 당시 불제자들은 무아를 따랐지만

세존의 입멸 후 어떻게 되었나요?

 

부파불교가 난립하면서 참나로 회귀하는 저항이 잇따르지 않았던가요?

결국 불교의 역사는 무아를 고수하려는 쪽과

그것을 부숴 힌두교에 편승하려는 쪽의 대립으로 얼룩지게 됩니다.

그리고 그 대립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횡행하고 있고요.

 

삼가 수행자들에게 묻겠습니다.

가 꼭 있어야 하나요?

가 없으면 안 되는 건가요?

가 없으면 깨달음도 없고 존재할 이유도 없다고요?

가 없으면 존재하지 못하는 건가요?

가 있어야만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건가요?

 

여러분!

존재가 뭔가요?

 

결국 존재를 모르니

我相이 원하는 대로 생각이 흘러가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니 불성이나 참나 타령을 하며 허송세월을 보내고 있는 것이고요.

 

그렇다면 존재란 과연 무얼까요?

여러분은 존재의 실제 모습!

실존(1원인)에 대해 궁금하지 않으신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