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히 알다시피 수행자들은 괴로움의 소멸을 목적으로 삼습니다.
그래서 어떡하든, 생각을 줄이거나 끊어내려 합니다.
왜냐하면 괴로움은 생각을 연료로 삼아 맹렬하게 타오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생각이 없어지면 어떻게 될까요?
그냥 길거리에 나뒹구는 돌멩이와 진배없게 됩니다.
그건 아무리 생각해도 허망하겠지요.
그래서 수행자들은 무생물 대신 식물을 떠올리게 됩니다.
식물은 생각이 극도로 줄어들어 있지만 그렇다고 아예 없지는 않습니다.
매우 잔잔한 상태에서 외부와 공명을 하고 있는 것이지요.
이런 점을 고려해 수행자들은
생각을 끊거나 대폭 줄여서 식물이 되는 걸 추구합니다.
그리고 식물의 의식 상태를 선정(禪定)
여기서 더 나아가 의식이 돌멩이처럼 굳어지면 삼매(三昧)라고 각각 부릅니다.
무생물의 삼매에는 그야말로 아무것도 없다 보니
점점 수행자들로부터 외면을 받게 됩니다.
그리고 식물의 선정(禪定) 상태에 관심이 부쩍 쏠리게 되었지요.
식물의 선정은 생각의 알아차림은 있지만 번뇌망상이 거의 없어
사람들의 바람과 딱 맞아떨어집니다.
쉽게 말해 ‘나’는 있으면서도
그 ‘나’가 괴로움에 물들지 않고 청정히 존재하는 것이지요.
결국 현세 인류인 호모사피엔스는
활발한 사유 활동의 부산물로 발생한 괴로움을 없애기 위해
동물과 식물, 그리고 무생물을 끊임없이 연구하여 얼추 결론을 내게 됩니다.
개나 돼지 같은 동물들은 생로병사에 대한 고뇌는 덜하지만
그래도 공포심은 여전합니다.
그래서 일찌감치 제외하고 식물과 무생물로 시선을 돌리게 됩니다.
무생물인 돌멩이처럼 되어도 봤지만 얻는 바가 없고
결국 식물의 선정(禪定) 상태를 이상향으로 꼽게 된 것이지요.
그런데 인간이 식물이 된다는 것은 진화 과정에 역행하는 것이 아닐까요?
퇴화의 수순을 밟는 것이니까요.
식물에서 더 나아가 돌멩이가 되면 완성된다고 떠드는 사람들도 있고요.
돌멩이가 되면 산채로 불구덩이에 들어가도
엷은 미소를 잃지 않게 되어
진정한 해탈이라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이런 어처구니없는 일을 겪게 되면서
새로운 수행에 대한 기대가 싹트게 됩니다.
기존 수행에 의심을 가진 수행승들 사이에서 새로운 수행법이 나오게 되니
그것이 바로 선(禪)입니다.
생각을 끊거나 마음을 비우는 것이 일체 부질없다는 사실에서 선(禪)은 시작합니다.
생로병사의 괴로움이 중요한 게 아니라 우리의 의식을 통찰하는 데에 있다고 본 것이지요.
보고 듣고 느끼는 것이 의식인데
문제는 외부에서 들어오는 정보를 해석하는 데에 있습니다.
그냥 인식만 하면 아무런 문제가 없는데
그 인식에 해석이 붙으면서 온갖 고통이 따라오는 것이지요.
가령 내가 죽을병에 걸렸다 칩시다.
이제부터 지옥 같은 고통을 겪으며 죽을 것이라는 생각이 일어납니다.
이건 사실에 대한 인식입니다.
그런데 그 사실을 다방면으로 해석해 나가면서
엄청난 허망함과 두려움이 연쇄적으로 따라옵니다.
이런 식으로 2차, 3차 해석이 연이어 일어나면서 괴로움이 발생하는 것이지요.
그래서 수행자들은 1차 인식만 고스란히 보존하는 데에 초점을 맞추게 됩니다.
이렇게 1차 인식만 작용하는 것을 일러 ‘순수의식’ 또는 ‘알아차림’이라고 합니다.
‘순수의식’은 70억 인구라면 70억 사람들이 모두 같습니다.
동물과 식물로 옮겨가도 정도의 차이가 있지만 똑같습니다.
무생물로 옮겨가도 마찬가지입니다.
무생물은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가 활성화되지 않은 것뿐이지 그 구조는 동일합니다.
삼라만상 모든 것들이 ‘순수의식’에서는 구별이 없는 것이지요.
그런데 여기에 해석이 일어날 때 그 차이에 의해 돌멩이와 소나무, 개와 사람이 나뉘게 됩니다.
이런 이유로 보고 듣고 느끼는, 그 자체의 ‘순수의식’을 유지하면
깨닫게 된다는 발상이 나옵니다.
‘순수의식’이 되면
첫 번째, ‘나’라고 할 것이 없어서 無我가 됩니다.
두 번째, ‘나’의 경계가 없으니 삼라만상 모든 것과 연결됩니다.
세 번째, 無我를 ‘나’라고 부르는 것이 가능해지고, 이것을 참나, 진아(眞我), 불성 등으로 불러도 무관합니다.
네 번째, 나고 죽음이 없이 영원히 순수 정보의 형태로 존재하게 됩니다.
다섯 번째, ‘나’의 경계가 없어 일체의 걸림이 없고 시간과 공간에 구애되지 않습니다.
이상과 같이 개체로서의 ‘나’가 지닌 모든 문제가 해결됩니다.
마음을 무작정 비우려고 할 것이 아니라
층층이 있는 의식을 구분해서 순수의식의 결을 알아차리는 것이
깨달음의 열쇠가 된다는 것이지요.
이것을 이루기 위해서 생각을 분리하는 획기적인 방법이 등장합니다.
그것이 바로 조사선(祖師禪)입니다.
얼핏 보면 동문서답처럼 우습게 보이지만
엉뚱한 질문과 답을 이어가면서 생각을 분리하는 획기적인 방법이지요.
간화선(看話禪) 역시 공안(公案)을 잡아 참구하면
그 궁극엔 답을 모르게 되면서 생각이 분리됩니다.
사실 초기불교의 위빠사나 역시 생각을 관해 ‘순수의식’만 남게 하는 수행법인 것이지요.
아무튼 생각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생각을 분리해 ‘순수의식’을 찾는 방법
이것이 달마로부터 시작되어 오늘날 한국 불교의 대간을 이루고 있는 선(禪)입니다.
그렇다면 禪을 이루면 견성이고 깨달음이 맞을까요?
‘순수의식’을 유지하게 되면 앞서 말한 것과 같은 절대적 경지가 펼쳐집니다.
응무소주(應無所住)하고 사사무애(事事無碍)한 최고의 경지인 것이지요.
그런데 그런 것이 깨달음이랑 무슨 연관이 있다는 걸까요?
그래서 도대체 무얼 알았다는 것이죠?
존재가 어디서 어떻게 생겼는지에 대한 답을 찾았나요?
실존(제1원인)도 모르면서 기분이 최고로 좋게 된 상태가 무슨 의미가 있다는 것인가요?
물론 초월하고 해탈하여 범인들이 범접할 수 없는 어마어마한 경지가 된 것은 맞습니다. 그런데 장님이 아무리 주변 사물을 더듬어서 통달한다고 해도
장님은 장님입니다.
그렇듯 그런 초월과 해탈을 백날 한들 결국엔 아는 것이 전혀 없습니다.
실존에 대해, 존재에 대해, ‘나’에 대해 아는 것이 전혀 없지 않나요?
결국 ‘오직 모를 뿐’ 상태의 연장선에 있는 것이지요.
아는 것이 없기에 ‘불립문자’, ‘언어도단’ 속으로 숨는 것이고요.
꿩이 도망가다가 숨을 때 머리만 감추는데, 이와 다르지 않습니다.
역사상 내로라하는 도인들이 하나같이 이 패턴에 걸려 있습니다.
깨달음이 그런 거라면 사실상 세존도 불교도 필요하지 않습니다.
힌두교에서 더 쉽고 정확하면서도 빠르게 가르치고 있지 않던가요?
수행승들은 禪의 경지에 오르고도 늘 부족한 것을 느끼고 있습니다.
그래서 성불했다고 자신 있게 얘기하지 못합니다.
늘 붓다 바로 밑의 경지만을 얘기하지요.
이처럼 식물로 퇴화하려는 안타까운 행위가 수천 년 동안 반복하는 이유는
수행자들이 깨닫는 것에 관심이 없기 때문입니다.
오로지 관심 있는 건 괴로움을 소멸해 ‘나’를 최고의 반열에 올리는 것뿐이지요.
진리에 관심이 있다면 세존처럼 끊임없이 수행해 나가게 되고
결국 깨닫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호모 사피엔스의 지능이라면 누구나 깨달을 수밖에 없는 것이지요.
진리에 대한 궁금함을 놓지 않는다는 전제에서 말입니다.
당신은 지금도 禪을 닦고 있나요?
그 禪으로 무엇을 얻으시려는 건가요?
괴로움이 소멸된 열반에 이르면 과연 당신의 문제가 해결될까요?
'현덕마음공부, DanyeSophia' 카테고리의 다른 글
[현덕마음공부] 불교의 관점에서 바라본 행복, 욕망으로부터의 자유 (0) | 2022.10.10 |
---|---|
공(空)으로 보는 금강경 제1장 수행은 낮은 마음에서 비롯된다 (0) | 2022.10.06 |
[현덕마음공부] 무상함이 삶의 기본 인식이 되어야 한다 (0) | 2022.10.04 |
[현덕마음공부] 불교에서 바라보는 괴로움은 인지적인 것이다 (0) | 2022.10.03 |
[Danye Sophia] 당신이 잘못 알고 있는 불교의 '보시행(布施行)' 이것이 진짜 불교의 '보시행'이다!! (0) | 2022.09.2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