찾는 것과 찾는 자 따위는 없다.
완전히 이해했을 때
찾는 것은 찾는 자와 하나가 된다.
-파드마 삼바하바
동양적 전통의 인식론은 뭘까요?
한마디로 할 수 있습니다.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 끝.
정말입니다.
동양철학 전통에서
이 말보다 인식이라는 도구에 대해
정확하게 표현한 말은 없습니다.
그만큼 동양철학에서의 인식론은
철학의 본질이 아니고
접근 방법에 불과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인식론이라는 말 자체가
서구철학의 한 분야로 정립된 것을
근대 이후 번역어로 만들어낸 것이기도 합니다.
동양사상의 주류인 유교에서
인식론 비슷한 것을 찾으려면
아마도 그 분량이 너무 적어서
‘론’이라는 이름을 붙이기가 쉽지는 않을 것입니다.
물론 앞서 본 서구철학의 합리주의, 경험주의의 필적하는
理와 氣의 사상 체계는 있지만
인식론에 대해서는 동양의 철학이라고 할 만한 유교에서조차
말할 수 있는 것이 별로 없습니다.
억지로 인식론이라고 비견을 할 수 있다면
사서삼경의 하나인 대학에 나오는
격물치지 정도가 있습니다.
-주자에 따르면 격물치지란
모든 사물의 이치를 끝까지 파고 들어가면
앎에 이른다는 뜻입니다.
-양명학에서는
마음을 다스려서 이치를 아는 것으로 보기도 하죠.
둘 다 진리에 이르는 방법으로 격물을 말합니다.
왜 이렇게 서구철학과는 다른 경향이 생겼는가에 대해서는
많은 연구들이 있습니다만
결론적으로 인식론이 중요한 주제가 될 수 없었다는 것으로 정리할 수 있죠.
그 이유를 탐구하는 것은
우리가 그리는 지도 범위 바뀝니다.
그렇다면 왜 ‘깨달음 전통의 인식론’이라는 제목으로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걸까요?
우리는 서구철학의 인식론이 매우 정교한 것으로 잘못 알고 있었습니다.
그 이유가 동양철학에는 그런 것이 사실상 부재하기 때문인데요.
그 때문에 우리는 인식의 틀 자체를 서구의 그것으로 채우고 있어서
매우 이원론적인 접근 방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깨달음 전통의 인식론’을 이해하기 전에
바로 그 점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걸 너무 당연하게 여기고 있거든요.
깨달음 전통에서는
달을 알고자 하는 추구는 있어도
손가락을 연구하는 학문은 없었습니다.
특히 종교적 색채가 강한 힌두이즘, 불교 도교로 들어가면
지식과 지혜는 엄격하게 구분되며
안다는 것은 직접적인 앎인 지혜를 말하는 것이지
결코 지식을 가리키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깨달음 전통의 앎은
오히려 인식론을 부정합니다.
도교에서는 도가도비상도라고 하고
아는 자는 말하지 않는다
말하는 자는 알지 못한다라고 합니다.
이것은 인식하고자 하는 데 쓰는 우리의 상징 체계가
실재를 아는데 오히려 방해가 된다는 의미이자
그것으로 실제를 안다는 것은 어불성설,
못한다는 말입니다.
에딩턴이라는 물리학자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본질적 지식은 성문화와 분석이 불가능하다.
오히려 분석하려고 시도할 때
본질은 사라지고 상징이 그 자리를 대신한다.”
서구철학이 현대물리학의 시기에 와서야
도덕경의 도가도 비상도의 의미를 이해한 셈이죠.
서구에서는 이런 식의 이해는
신비주의 전통에 맞닿아 있어서
과학으로 취급되지 않았습니다.
켄 윌버는 이것을 [앎의 상징적 방법]이라고 부릅니다.
‘지도는 영토가 아니다’라고 하죠.
본질적인 앎은
비이원적이라서
이런 상징을 사용해 표현할 경우
마치 그림자를 묘사하는 것과 같다고 합니다.
내 몸의 그림자를 보고 나를 알 수 있나요?
그런데도 서구철학은 그걸 안다고 했다는 거죠.
그나마 물 자체를 인식할 수 없다고 했던 칸트가
겸손해 보입니다.
인간의 언어와 이미지로 표현되는 개념과 관념은
실재하는 현실을 반영할 수 없다는 것을
천 년 전에 불교 유식론이 천명했음에도
그 말뜻을 우리가 가진 서구적 틀로 이해하는 데는
여전히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겁니다.
결국 이 어려움이
깨달음 공부에도 그대로 이어집니다.
켄 윌버의 표현으로 말하자면
우리는 주체와 객체를 분리하는
상징적이고 이원론적인 앎의 방식만 이용하기 때문에
인식하는 물체를 적절한 상징이나 이름으로 나타내려고 하죠.
현실적으로 그것에 의지할 수밖에 없다는 한계가 있죠.
왜냐하면 뭐가 뭔지 일단
개념적으로 알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깨달음 공부의 어려움은
바로 이런 손가락에 대한 개념
... 형성이 어쩔 수 없이 필요한데
그것이 실재를 가리키는 도구일 뿐이기 때문에
결국은 달을 보는 것을 방해할 가능성이 높고
거의 대부분 그런 일이 일어난다고 보면 됩니다.
그것은 개념 형성의 문제에 그치지 않습니다.
이원적인 접근은
자신이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견고한 에고를 형성합니다.
우리 자신이 우주와 근본적으로 서로 다르고 동떨어져 있다고 느끼고
우리의 역할과 자아에 대한 이미지를 형성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스스로 만들어낸 상징을
자신의 주체성으로 생각하게 됩니다.
사실 인식의 방식은
의식의 수준과 일치합니다.
앎의 방식의 변화는
의식의 수준에서 변화와 일치하고
공부하는 사람의 주체성의 변화와 일치합니다.
공부가 완전히 끝나기 전까지는
우리는 이원적 방식을 버릴 수 없습니다.
하지만 처음에는 주관적인 [보는 자]로만 읽던 내가
점점 옅어지기 시작해
일종의 분기점인 [수분각, 초견성]에 이르면
[보는 자와 보이는 것이 하나]인 경험을 처음으로 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것은 점점 더 하나의 상태가 되어가면서
나라는 에고가 완전히 해체되는
실재로의 통합인 궁극의 깨달음으로 이어집니다.
“진리를 어떻게 알게 되는가?
진리가 되는 것이다.”
이게 깨달음 전통의 실제에 대한 인식론입니다.
궁극으로 가는 길에 대해서는 더 자세한 설명이 필요 없습니다.
그냥 스스로 가는 수밖에 없죠.
거기에는 인식론 따위가 필요하지 않습니다.
다만 우리는 공부를 하기 위해서는
이원적 인식 방법도 쓸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인식론이라는 주제를 가지고 설명을 하고
이해를 해야 한다고 하는 겁니다.
언어로 된 개념과 관념을 잘 이용할 수 있어야 합니다.
언어는 비록 상징이고 암시이지만
그 역할을 잘할 수 있게 해야 합니다.
이원적인 언어, 상징에는
분석, 논리적인 것과
그 반대의 상상적이고 이미지적인 것이 있죠.
전자에는 과학적 서술이 있고
후자에는 예술적 표현이 있습니다.
사물을 쪼개서 논리적인 인과를 설명하는 것이 과학이고
관찰된 사실을 전체적으로 전달하는 것이 예술입니다.
둘 다 공부에 사용됩니다.
우리는 이런 언어를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지에 대해
켄 윌버의 설명을 이해해야 합니다.
이것을 통해서
손가락을 잘 쓰는 방법
손가락에 현혹당하지 않는 방법
손가락을 통해 시선을 달로 옮겨가는 방법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세 가지 활용 방식은
유추적, 부정적 명령적인 것입니다.
1) 유추적인 방법은
실재를 ‘그것은 어떠하다’는 관점에서 묘사합니다.
‘뭔가 있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전지전능, 무소부재, 하느님 같은 식의 상징적 용어입니다.
이것은 실재의 본질을 암시하는
단정적이고 제한된 요소라고 할 수 있죠.
제한된 묘사이자 상징이라는 점에 주의해야 합니다.
2) 부정적인 방법은
실재를 철저하게 부정적인 방법으로 묘사합니다.
없다, 아니다, 비었다 같은
부정성의 용어를 통해
설명을 통해서는 실재를 묘사할 수도, 실재를 이룰 수도 없다는 것을
강조하는 언어 방식입니다.
아마 “Neti, Neti”로 표현되는
“아니다 아니다”로 표현되는 수행법을 들어보셨을 겁니다.
3) 명령적 방법은
레시피 같이 활용하는 겁니다.
미역국 끓이는 방법을 말로 설명하는 겁니다.
다소 실용적인 느낌으로 전달될 수 있는 형태로
언어와 상징을 사용하는 것이죠.
이런 지침을 따라가면
전달자가 원래 의도했던 것에 가깝게
경험을 재현해 낼 수 있도록 하는 겁니다.
세 가지 방법들은 각각
실재는 어떠하다,
실재는 어떠하지 않다.
실재에 도달하기 위해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를 의미합니다.
그러나 실재가 무엇이라고 말하지는 않습니다.
우리는 이 세 가지 언어 사용 형태를 이해함으로써
언어가 가진 특성을 잘 활용하고 함정을 피할 수 있습니다.
달을 가리키는 세 가지 방법을 이용해서
우리는 선각들이 남겨주신 이야기들을
보고, 듣고, 이해하기 시작할 수 있습니다.
깨달음 공부를 하는데
어떨 때는 개념을 익히라고 하다가
어떨 때는 버리라고 하는 곡절을
많이 겪었을 것이고, 겪을 겁니다.
그때마다 이 세 가지 접근 방법을 기억하면 좋겠습니다.
이 정도로 깨달음 공부의 인식론을
정리하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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