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스님이 절의 스님들과 함께 절 바깥으로 나가다가
절 문 앞의 돌기둥을 보고 합장했다.
“안녕하십니까? 세존이시여.”
곁을 따르던 스님이 큰 스님에게 말했다.
“스님 이건 돌기둥입니다.”
큰스님이 말씀하셨다.
“목이 터지도록 울어도 쓸 데 없으니
입을 다물고 봄을 보내는 게 좋겠구나.”
이 선문답 일화에서는
큰스님이 돌기둥에게 인사를 하고
그 인사하는 뜻을 몰라보는 제자를 나무라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사물을 가리켜 무언가를 보여주고자 하는 방법을
[지사이문]이라고 합니다.
초기 선종에서 사물을 가리켜 묻는 방식은
순간적으로 깨닫도록 개발된 것이었습니다.
물론 이렇게 가리키는 것을 보고
알아차리는 경지에 와 있어야 효과가 있겠죠.
그러다 보니 쉽지 않은 일이라
여기서 조금 시간을 들이는 간화선 방식도 개발됩니다.
“뜰앞의 잣나무를 의심해 보라”고 화두를 줍니다.
임제 스님이 군대를 방문했을 때였다.
문 앞에서 어떤 장교를 만났는데
그에게 문 앞의 기둥을 가리키며 물었다.
“범상한 것입니까? 성스러운 것입니까?”
장교가 말이 없자
스님은 기둥을 두드리며 한마디 하고서는
군영으로 들어가 버렸다.
“말할 수 있다 하더라도 그저 나무 말뚝일 뿐이지”
이렇게 지사이문의 방식은
아는 사람이면 곧바로 답할 수 있도록 형상을 이용해 가리키고
그런 경지에 이른 이에게는
보는 자와 보이는 것을 그 상황에서 직접 드러내
질문하는 바로 그 자리에서
생각과 분별을 벗어나 알도록 이끄는 방법입니다.
임제가 기둥을 보고
성스러운지 범상한지 물은 것은
쉽게 말해 기둥이라는 것이 하나의 형상으로 보이는지
아니면 성품의 드러남으로 보이는지를 물었던 겁니다.
나뭇잎 한 장에서도 전 우주가 담겨 있음을 본다는
어느 스님의 연기법 말씀처럼
항상 드러나 있는 그것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거기에 무슨 성스럽고 범상한 것이 있겠습니까?
성속을 묻는 것 자체가 보는 자를 묻는 것입니다.
나무 기둥을 볼 때
나무 기둥을 있게 하는 그것을
동시에 보고 있는지를 묻는 것이죠.
너무나 사실적입니다.
단순한 비유가 아닙니다.
“움직임은 법왕의 싹이오,
고요함은 법왕의 뿌리인데
어떤 것이 법왕입니까?”
대사가 기둥을 가리키면서 물었다.
“왜 저 대사에게는 묻지 않는가?”
제가 깨어남의 한순간을 지나쳐
잠에 들었던 다음 날 아침이었습니다.
집에서 내려오던 길에 발걸음이 너무 가벼워 놀라고 있는데
매일 다니던 길 가로등 곁에
못 보던 나무가 서 있는 것이 보였습니다.
가끔 그 가로등 아래서 빙글빙글 돌며 묵상을 했던 적이 있던지라
그 나무가 정말 낯설었습니다.
저는 다가가 나무에 손을 짚었습니다.
갑자기 눈물이 터지며 저는 주저앉아 속삭였습니다.
“네가 여기 있는 줄을 내가 몰랐구나, 몰랐구나”
저는 그 나무를 끌어안고 한참을 그렇게 있었습니다.
제 몸과 나무는 모두
제가 보고 듣고 느끼는 같은 형상이었습니다.
그 느낌을 이렇게 말로 하는 것이 참 가여워 보입니다.
다만 모든 사물과 사건의 실제 모습은
내 마음이 이해하고 인식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있는 것을 아는 것은 오직 내 마음이고
내 마음이 곧 그것이 있음의 증명입니다.
그래서 돌기둥이 돌기둥이라는 생각을 벗어나면 내 마음이고
문기둥이 그 생각을 벗어나면 내 마음이며
가로수가 곧 내 마음으로 들어와 생생한 성품이 됩니다.
지사이문의 방식은
바로 그런 이치를 활용해
너무나 평범했던 눈 앞의 사물을 마음자리에 옮겨놓는 선문답 방식입니다.
그날 저녁 집으로 돌아오던 저는
같은 길의 반대 방향을 걷고 있었습니다.
아침에 끌어안았던 그 나무가 눈에 들어와 미소를 지었습니다.
그런데 그 나무를 제가 볼 수 있게
불빛을 비추어주는 가로등도 함께 눈에 들어왔습니다.
저는 가로등의 차가운 쇠기둥의 손을 가져갔습니다.
저는 한참을 말없이 가로수와 가로등 사이에 서 있었습니다.
미혹이 변하여 깨달음이 됩니다.
보이고 들리는 모든 것이
모를 때는 미혹이었다가 알면 바로 깨달음 그것 자체입니다.
보이고 들리는 것이 변한 것이 아니라
그것이 형상이라는 미혹이었다가
그것이 처음부터 깨달음임이 드러난 것뿐입니다.
“가로등아, 미안하다.
내가 너도 몰라보았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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