뇌는 현실을 있는 그대로 알아보지 못하며
나의 선택을 정당화하는 기계이다.
-로저 스페리
우리는 인식론이라는 것이
서구철학에 있다는 것을 확인했고
동양철학에는 거기에 필적할 것이 없다는 것도 알았습니다.
아는 방법에 대한 고민이 없어서라기보다는
앎이라는 것에 대한 초점이 많이 다르다는 것도 확인했습니다.
그리고 만약 앎이라는 것이
지식이 아닌 진리 그 자체를 아는 것이라면
동양철학에도 인식론이 있으며
깨달음 전통의 인식론이란
우리가 인식의 도구로 쓰는 개념이나 관념, 언어를 믿지 말고
지혜롭게 도구로 쓰라는 의미라는 것도 봤습니다.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이 그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서양 인식론의 실재론, 경험론을 넘고
동양철학의 손가락을 넘어서
깨달음을 향해 가는 지도로서의 인식의 문제를 이해해 보고자 합니다.
주체와 대상, 그리고 그것에 대한 지식이
인식의 메커니즘이라고 생각했던 것을 내려놓고
오히려 주체와 대상을 나누지 않는
깨달음 전통의 인식론에 대해 이해해 보고자 합니다.
일단 서구적 인식론의 틀을 다시 한번 되새겨 봅시다.
과연 우리가 [안다]고 하는 것은 뭔가요?
가장 쉬운 설명은 이렇습니다.
우리 두뇌는 감각을 통해 외부의 신호를 수용한다.
그리고 지각 작용을 통해 공간과 사물, 움직임과 변화를 인지한다.
우리가 상식으로 아는 사람의 인식 작용입니다.
이렇게 알고 세상을 사는 것에는 큰 문제가 없습니다.
왜 이걸 문제라고 생각하는지 납득하기 어려울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이기 때문에 문제를 삼는 겁니다.
사실이 아니거든요.
어쩌면 우리는 인식하는 방식에 대한 설명만큼은
아직도 천동설을 믿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감각을 통해 외부사물을 수용해
지각하고 인식한다는 인식 이론을
반영론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런 상식적인 인식 모델은
현대과학이 새로이 발견한 것들을 대입하면
너무 유치한 설명입니다.
최신의 뇌과학은 아주 다르게 설명하거든요.
그리고 많이 복잡합니다.
사실 서구의 인식론은
근대 학문입니다.
겉보기에는 꽤 체계적인 것 같지만 깊이가 없습니다.
서구 인식론은
실재론과 경험론을 종합한 칸트 이후로 계속 발전하기는 합니다.
그중 객관적 유물론의 경향의 하나로
[반영론]이 제시됩니다.
그게 바로 우리의 상식인
외부대상- 감각- 지각으로 이어지는 인식모델입니다.
반영론으로 대표되는 유물론적 인식론은
거의 변화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미국식 실용주의가 대두하면서
인식론은 쓸데없는 형이상학으로 치부됩니다.
파블로프의 조건반사, 무조건 반사 같은
생리학이 제공하는 이론으로 충분한데
선험적이니 경험적이니 하는 논쟁은 불필요해 보였습니다.
그 바람에 인식론은
유물론적 뇌과학, 생리학으로 정리되고 맙니다.
물론 정신현상학같이
주객 분리 이전의 근원을 탐구하는
인식론적 경향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주류를 이루지는 못하죠.
우리는 그 계통의 학자들의 이름을 잘 알지 못합니다.
주류가 아닌 것이죠.
그나마 실존주의에 흡수되면서
우리에게는 상식 밖의 학문으로 지워지고 맙니다.
서구 철학사를 공부하자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우리가 상식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그저 취급하기 편해서 주류가 된 이론이지
그게 확정된 사실이 아니라는 걸 이해하자는 겁니다.
그런 점에서 켄 윌버가
초월적 의식 영역을 다루는 것은
서구심리학의 시각에서는 현상학과 비슷하게 받아들여집니다.
서양 철학자들을 제가 문제 삼는 것은
이런 경향이 결국
열심히 고민하다가 도루묵인 상황이라서입니다.
칸트 이후로 서구철학은
자신들의 인식론의 허점을 통해
오히려 실제에 접근할 기회를 얻었습니다.
그런데 도무지 길을 찾지 못하더니
오만 가지 주장들만 난무하는
철학의 부재를 연출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정신현상학, 유물론적 변증법, 프로이트와 신 프로이트,
기호론 분석철학, 실존주의, 구조주의, 포스트 모더니즘
지표를 잃고 표류 중이던 서구철학은
산업혁명과 과학기술, 실용주의의 물결에 휩쓸려 조난 당하고 맙니다.
철학이 지혜로운 현장의 모습이 아니라
꼴통 꼰대로 연상되는 것에는
이유가 있었던 겁니다.
이제 편향된 유물론으로 인해
거꾸로 알게 된 우리의 인식론을 바로잡아볼
접근 방법을 알아보겠습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불교의 인식론]입니다.
불교는 다른 동양철학과 달리
인식론이 매우 정교하게 다듬어져 있는데
이른바 외도와의 논쟁이 계속되면서 이론 정비도 필요했고
초기 불교부터 불교가 파악하려고 했던 인식의 문제는
곧 깨달음의 문제였기 때문이었습니다.
일단 쉽게 접근해 보죠.
불교의 기초적인 인식론이라 할 수 있는 것은
[오온]과 [18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온은 사건을 받아들여 인식하는 과정을 설명한
색수상행식의 체계이고,
18계는 감각과 지각의 인연 작용을 모두 합해보니
18개의 인연이라는 설명입니다.
오온의 온이라는 말은
덩어리, 집합, 구성요소 등의 의미로 해석할 수 있는데
인간의 구성 요소입니다.
불교는 처음부터 인간을 ‘인식 덩어리’라고 선언해 버린 것입니다.
더 확장해서 해석하면
현상세계 전체가 하나의 인식덩어리라는 겁니다.
가히 혁명적인 선언입니다.
그 인식덩어리가 우리가 아는 세상이자 나인데
그게 인연 화합으로 이루어진 거라
실체가 없다.
이게 반야심경의 오온개공의 의미입니다.
도대체 뭘 믿고 이런 거창한 선언을 하는 걸까요?
깨달아서 알고 보니 그렇다는 겁니다.
하지만 일단 그런 전제 없이 내용을 한번 탐구해 보도록 하죠.
[색]은 물질 요소로서의 육신 또는 외부 세계를 가리킵니다.
[수]는 고통과 쾌락을 받아들이는 감수 작용입니다. 감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상]은 표상 개념을 일으키는 작용이며, 지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행]은 수와 상을 토대로 의지를 일으키는 작용, 생각을 만들어 내는 것을 말합니다.
마지막으로 [식]은 이 모두를 아우르는 이해와 판단을 말합니다.
오온설은
끊임없이 생겨나고 사라지는 것이어서
사실상 변하지 않는 그 무언가는 없다는 것을 역설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오온으로 이루어진 인식 현상이라는 것 자체가
사실상 현상적 세계를 드러내는 것이며,
이 세상은 실체가 없는 현상적 존재라는 설명인 것입니다.
오온이 다소 추상적인 지시물을 가지고 있다면
18계는 감각과 시각을 6개의 요소들로 나누어
그 발생 현상을
인식의 인연 작용으로 못박습니다.
6가지 인식 대상, 6가지 인식 기관이 화합하는 곳을 12처라고 합니다.
그리고 거기서 발생하는 6가지 인식 작용을 더해 18계라고 합니다.
6가지 인식 대상이란 색성향미촉법이고
6가지 인식 기관이란 안이비설신의이며
경과 근의 상호작용으로 일어나는 앎을
6가지 식이라고 부릅니다.
빛, 소리, 냄새, 맛, 촉감, 생각이
눈, 귀, 코, 혀, 몸, 의식의 기능과 만나
인식작용을 발생시킵니다.
육경, 육근, 육식이
세상의 모든 인식작용의 바탕이자 결과이자 해석입니다.
서구철학이 최근에서야 정리한 감각, 지각은
불교 철학에서 이미 오감, 즉 전오식과
육식, 즉 의식으로 정리되어 있었습니다.
감각하고 수용해 지각하고 인식하는 오온의 작용은
너무 세밀하게 정리되어 있어서
여기서는 일일이 보기에는 불량이 너무 많을 정도입니다.
이게 모두 기원 전에 정리되어 있던 내용입니다.
이게 인식론 철학의 보물 창고가 아니면 뭘까요?
우리는 서구철학의 존재론과 인식론이
우리의 세계관인 것을 이해한 후에
동양철학, 특히 불교를 들어
그것이 왜 뒤집혀 있는 상태인지를 알아보고 있습니다.
감각과 지각의 문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게 경험이냐 이성이냐, 현상이냐 실제냐 같은
관념의 문제로 치환될 것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오온설에서 봅니다.
전 우주는 상호의존적 인식 현상일 뿐이며
주체와 객체, 주관과 대상, 물질과 정신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오히려 우리는 왜 인식현상이
이런 식으로 생겨나게 되는지 의문을 가져야 합니다.
왜 주관과 객관으로 나뉘어서 보이는가?
왜 주체와 대상으로 분리되어 보이는가?
왜 물질과 정신이 나뉘어지는가?
왜 그렇게 이해가 되는가?
불교는 그것이 바로 미혹이자 환상이라고 합니다.
그것은 전도몽상이며
오히려 그와는 반대라는 것이죠.
저는 자연과학이 제시하는
감각과 지각의 생물학적 발생 과정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그것이 우리가 직접 보고, 듣고, 느끼는 현상을
이해하기 쉽게 설명한다는 것을 부정하지 않죠.
그것은 실용적으로 편리함을 줍니다.
생리학을 통해 우리는 병을 고치고
인간 공학적 기계를 만들어 낼 수 있죠.
그러나 그 이상의 것을 찾고자 할 때,
우리가 아는 것이 과연 무엇을 어떻게 안다는 것인지 찾고자 한다면
앎의 실상을 파고 들어가야 합니다.
불교의 인식론은 그런 점에서
뭔가 우리의 상식으로 보면
거꾸로 된 질서를 보여주려고 합니다.
감각에서 지각으로
지각에서 생각으로
생각에서 의식으로 올라가는 것이 아니라
어쩌면 거꾸로일지도 모른다고 이야기합니다.
정말일까요?
--
나는 뇌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김대식 교수 책 목차 중에서, <인간을 읽어내는 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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